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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번에 테오도리의 남편들인 공동황제들의 이야기까지 하고 마쳤습니다.
이 왕조의 최고 인기남 이야기가 이제 시작됩니다.
5대 황제 바실레이오스 2세(Basileios II, 958–1025)는 963년 아버지의 급사로 정말 어린 나이에 황제로 즉위하게 됩니다. 실질적인 통치는 어머니의 남편들이 다 하게 됩니다.
그냥 황제 자리를 덥히고 있었죠. 워낙 잘난 의붓아버지들인터라...
976년이 이르러 의붓아버지가 독살되자 숨 쉬고 통치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때가 방년 19세이니... 정말 무서울 것이 없죠.
내가 이렇게 성장한다고 진짜 힘들었다...
내 동생이랑 숨 죽이고 산다고 얼마나 마음고생 한 줄 알아???
그가 착수한 첫 일은 역시 의붓아버지들의 정복전쟁을 계승하는 일...
군빠들이었던 그들의 정책과 업적에 힘입어 수월하게 정복사업을 전개합니다.
어떻게 보면 테오파노가 재혼 남성들은 정말 잘 고른 듯 하네요.
똑똑하고 유능한 군인들을 데리고 와서... 자식들 어릴 때엔 빡세게 부려 먹고...
사용한도가 다 되면 또 다들 저 세상으로 보내 버리고... 무서운 여편네 올시다...
바실레이오스 2세는...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유능하지만 잔인한 통치자였습니다.
제국의 입장으로는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능력 있는 군주였지만...
타국의 입장으로는 외교관계나 절차는 무시하고 잔인한 면모를 보여주는 인간일 뿐...
황제는 전대부터 계속 괴롭히던 불가리아를 한 방에 보내버리게 됩니다. 어떻게...
전쟁을 통해 잡은 수십만의 포로들을 깡그리 장님으로 만들어서 돌려보냅니다.
그래... 비록 살려는 주지만 이젠 여기 다시 오지마... 절대... 다음에도 또 오면 아랫도리도...
그 덕에 "the Bulgar-slayer"이란 별명이 붙죠.
불가리아와의 마지막 전투 후 벌어진 일은 너무 유명한 이야기라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수 십 만 명에 달하는 포로들이 잡히자... 원래는 돈으로 흥정해서 돌려보내는 것이 외교적 관례인데... 불가리아를 향한 정치적인 위협과 경제적인 고려 속에서... 불가리아 포로들 모조리 눈알 빼서... 병신들을 계속 먹여 살릴 수 없으니 고향으로 돌려보내는데... 돌려보내는 비용도 아까워서 자력으로 돌아가게 하려니... 해결책으로 몇 천 명당 눈알 하나만 빠진 한 명이 데리고 돌아가게 했다는 등등... 불가리아 왕이 이 광경을 보고 기절했다는 등등...
실망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면 곤란...
그리고 러시아 촌놈들이 또 제국으로 내려올까 먼저 선수를 칩니다.
최고의 예우를 해주는 모양새로... 여동생 안나를 키예프 공국으로 시집보냅니다.
어이... 촌놈... 내가 여동생 보내는 댓가는... 알지?
우리의 종교랑 문화를 받아들여서 영원히... 복종하라고... 그게 숨은 뜻이야...
안나는 블라디미르 류리코비치 대공에게 시집을 가서 딸 테오파노만 낳았고, 테오파노 공녀는 성장한 후 노브고로드로 시집을 갑니다. 이 시점을 계기로 러시아엔 정교회의 세례가 내려지죠. 엄청난 미지의 세계에 종교가 전파됩니다. 교회는 급 횡재... 선교가 아주 잘 이루어졌으니 신도들도 엄청... 기부금도 잔뜩... 덤으로 토지와 건물도...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그리고는 훗날 러시아가 좀 커서 동로마제국의 후손이랍시고 자칭 황제라도 떠벌립니다.
자신들이 동로마의 진정한 후계자라구요... 알고 보면 혈통이 전혀 닿지 않은 걸로 아는데....
특히 로마노프 가문의 경우에는 류리코비치 가문이랑은 전혀 다른 혈통인지라...
진정한 가짜들이 그들이죠. 가짜들... 족보 위조하지 마~ DNA를 속일 수 없어...
바실레이오스 2세의 벽화...
신과 천사들에게 찬양받고 인간들에게 경배받는... 누릴 것 다 누리네...
아나톨리아에서 연이은 내전으로 고통을 잠시 받기도 하지만 물리친 후 다시 외정으로 눈을 돌립니다.
파티마 나랑 붙자... 알간?
당시 동쪽의 국경은 의붓아버지들 대에 획득한 영토는 그의 대에 이르러서는 거의 상실한 시점이었기 때문에 제국의 영향력은 약화되어 있었죠.
빨리 회복하지 않으면 밀리는 것은 당연지사...
비잔틴과 파티마의 주요 전장은 다마스커스, 알레포, 안디옥 부근이었고 격렬하게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루지아에 대한 공격도 잊지 않았죠. 그의 치세는 원래 제국의 영역을 다시 확보하는 것이었죠. 그래서 그의 치세를 비잔틴 중세의 원 기점으로 간주하는 역사가들이 많습니다. 비록 파티마와는 산발적인 전투를 통해 영토의 확장 보다는 서로가 경계하는 수준으로 마무리 짓지만요. 아무튼 타국이 제국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에... 제국 입장으로는 침공하지 않으니 좋은 셈... 그만큼 황제의 역량이 좋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1025년 12월 15일 황제는 전대에 상실한 시칠리아 섬 회복을 위한 전쟁 준비 도중에 사망합니다. 67세의 나이로 죽었고 장구한 재위 기간을 기록했습니다. 960년에 아버지와 함께 공동황제가 되어 1025년에 죽었으니... 말도 안 될 정도의 긴 세월...
조선의 영조가 52년간 재위를 했는데...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도 64년간을 재위했으니...
흠... 아무튼 정말 길고 긴 나날을 통치했군요.
바실레이오스 2세 죽음에 이르렀을 때 비잔틴 제국 영토 모습~
상당히 강려합니다... 불가리아를 훅 보낸 것이 영토 확장에 주효...
아직 남부 시칠리아는 그나마 유지하고 있군요.
역사서에서 그려진 그의 면모를 살펴보면 키는 평균보다는 작았고 밝은 푸른 눈동자에 아치형 눈썹을 가지고 있었으며 수염이 늙으면서 많이 줄어서 고민했다는 전설이...
화가 나거나 고민을 하면 수염을 손가락으로 잘 꼬았고, 말수가 적었으며, 전체적으로 웃는 경향을 보였지만, 전체적으로 금욕주의 경향이 짙었다고 합니다.
철저히 자신을 군대식으로 무장했고 그 자신을 군인황제로 생각했으며 자신의 병사들을 자식처럼 사랑해서 인기가 짱...
일반 군인들의 군대식으로 자신의 식사를 해결했다는 점 만으로도 열광적인 충성심을 얻었죠.
황제는 인기 비결을 너무 잘 알았던 것 같네요. 흠... 급식을 함께 먹었다라는 점...
황제의 통치 철학은 군대를 아주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비용을 도시민뿐만 아니라 성직자와 귀족에게도 부담토록 강요했습니다. 자신도 금욕적이었고 또한 군대의 인기가 너무 높아서 감히 토를 다는 인간들이 반란을 꿈도 꿀 수 없을 정도로...
이것은 거의 완벽하게 통치를 해냈다는 소리입니다. 감히 도전한다는 그 자체가 곧 죽음이니... 역사서에서 하나같이 황제가 부의 평등 분배를 통해 수 십 년간의 전쟁비용을 부담케 함으로써 리스크를 줄여나갔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의 부인이나 자식들에 관한 자세한 언급이 역사서엔 없어서 상세히 소개하지 못하겠네요.
다만 자식들이 태어나자마자 다들 일찍 죽어서 자손은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의 후계자는 공식적으로 동생 콘스탄티노스 8세였습니다. 이미 아버지에 의해 형과 공동황제가 된 이래... 68년의 전 일생 중에서 63년을 형과 함께 공동황제로 보내게 됩니다.
이에 따라서... 자신의 의지는 국정에 반영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조용히 잘 지냅니다.
그야말로 제국 내 최고의 공식 놈팽이로 삶을 살아갑니다.
그는 거의 매일 스포츠에 열광했고... 승마와 사냥으로 시간을 때우며... 보냈죠.
마냥 즐겁게 즐겁게 인생을 즐기고 살았던 황제였습니다. 그런데 여색은 그리 즐기지 않았던 것 같네요. 애첩이나 사생아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냥 스포츠광...???
그가 공동황제로 가장 중요한 시간을 보낸 것은 소아시아 반란을 막아낸 1등 공신 바르다스 스켈로스(Bardas Skleros)와 형 사이의 중재를 맡았다는 의무 아닌 의무가 있었습니다.
스켈로스 가문은 초대 황제 바실레이오스 1세의 동생이었던 바르다스의 외동딸 그레고리아가 스켈로스 가문에 시집을 갔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낳은 자녀들 중 한 명이 바로 바르다스 스켈로스였습니다. 황실의 인척인지라 무시 못할 존재였고... 워낙 스켈로스 가문이 유명 귀족 집안인지라 함부로 하기 힘든 상대였죠. 아무튼 두 강한 세력 사이를 완화시킬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황제다운 일과였다고 합니다.
그는 헬레나와 결혼하여 두 딸을 얻습니다. 자식 없는 형과는 달리... 운이 조금 남은 듯...
일설에 의하면 바실레이오스의 자식들은 다 요절해서 살아남은 아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1025년 형이 죽자 비로소 단독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단독 통치 3년간은 완전히 재앙수준이었습니다. 되는 일이 없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능력이 딸리니...
외모를 보면 키가 작은 형과는 달리 키가 크고 우아한 모습을 지녔던 황제는 아주 능숙한 기수였고 사냥과 잔치로 일생을 보냈죠. 그 덕분에 말년에는 만성 통풍으로 걷기조차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즐기는 인생관 덕분에... 황제는 항상 가난했습니다. 돈이 없어... 돈...
더구나 타고난 용기도 없고 나약한 성품 덕분에 되는 일이 정말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매일 논다고 바쁘니 그 심오한 통치술이 오래 자리 덥힌다고 절대 나아질 리가 없었다는...
결국 아나톨리아 지방 귀족들은 황제에게 불만을 품었고 봉기합니다.
야... 넌 정말 안되겠어...!!! 도저히 넌 황제가 아냐...
지방 귀족들은 콘스탄티노플을 봉쇄하며 황제에게 공격을 가합니다. 너 나가... 당장!!!
한창 봉기가 진행될 무렵 황제는 숨을 거둡니다. 남성 후계자가 없는 시점인지라 결국 장녀 조에가 여제로 등극하게 됩니다. 이레네 이후 다시 등장하는 여제의 치세가 시작됩니다.
바실레이오스 1세로부터 6대째 내려오는 여황제 조에(Zoe Porphyrogenita, 978-1050)는 자주빛출생 황녀인지라 ‘Porphyrogenita’라는 별칭을 얻게 됩니다. 그노무 자주빛...
성 소피아 사원에 남아있는 조에의 초상화... 이거 비잔틴판 뽀샾처리...
그녀가 출생했을 때 정략결혼의 대상이 됩니다. 백부인 바실레이오스는 그녀를 신성로마황제에게 보내어 동맹을 체결하기를 희망하죠. 당시 오토 3세는 그녀를 황후로 맞이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함에 따라 배를 이용하여 서유럽으로 항해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 황제가 사망했다고 하여 결국 돌아오게 됩니다.
그 후 조에의 백부는 신롬의 다음 후계자에게 보낼 궁리를 하지만 대상자가 10세라는 소리에... 23세의 조에를 보내기엔 너무 무리인지라 결국 결혼을 포기하고 맙니다.
너무 차이가 나니 그녀가 늙어버려... 그렇다고 그가 무사히 자란다는 보장도...
당시 그녀의 결혼에는 상당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결혼 당사자가 당연히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아무나 결혼할 수가 없었죠. 분명 그녀와 결혼 한다면... 바로 반란테크 타서 황실을 엎으려고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녀는 궁 안에 방치되었고 혼자 늙어가야 했습니다. 과거 황녀들은 대부분 수도원에 직행 했는데... 결혼에 의해 귀족들의 분란이 일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습니다.
1028년 아버지가 죽자 비로소 50세가 된 조에는 결혼할 수가 있었습니다. 백부와 부친이 방치한 그녀... 가장 먼저 남편 후보자로 거론된 인물은 콘스탄티노스 달라세노스라는 유명 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제는 콘스탄티노플 지사였던 로마노스 아르기로스(Romanos Argyros, 968-1034)를 남편으로 지명합니다.
이에 조에의 첫 남편인 로마노스 3세(Romanos III, 재위 1028–1034)는 아내와 공동황제가 되어 제국을 통치하게 됩니다.
그녀는 무척 왕조의 연결에 집착하게 됩니다. 50세에 결혼해서도 자식을 낳으려고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게 됩니다. 어떻게든 자식을 얻겠다고 비방 동원, 마법동원...
모든 난리 치는 그녀를 본 로마로스 3세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고 동침조차 거부하게 되죠. 다만 그녀가 정무에 대해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과 과도하지만 지출하는 것은 그냥 둡니다. 그런 재미도 없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런 배려?
그러나 남편에게 소외된 조에는 또 다른 일을 꾸미게 됩니다.
나를 독수공방...? 두고 보자... 누가 진정한 황제인지를 보여주마...
로마노스가 그녀를 깜빡하고 있을 무렵... 조에는 애인을 만들게 됩니다.
남편이 없으면 다른 남자 꼬시지 뭐... 난 정통 황제라고... 내 눈에 들면 바로 황제여...
새 애인의 이름은 미카엘(Michael, 1010-1041)로 24살짜리 평민 출신의 시종 청년이었죠.
당시 로마노스 주변엔 권력욕에 충만한 이들만 모여 있었습니다. 그는 가문이 상당히 유수한 귀족 가문에서 레온의 아들로 태어났고 첫 결혼을 통해 딸 헬레나를 두었죠. 그의 두 번째 결혼이 조에였는데 그녀에게 자식 얻을 확률은 제로...
그래서 그의 제수씨였던 테오도라는 자신의 아이들을 후계자로 지목해달라고 떼를 쓰고 있었습니다. 즉 동생 바실레이오스는 테오도라 사이에 2남 1녀를 자녀를 두고 있었거든요. 형님 로마노스의 자식이 없다면 당연 친조카들을 지명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죠.
그러나 로마노스는 이런 요구를 무시하였고 그녀는 음모를 꾸밉니다.
그럼 너 죽어... 그럼 내 자식들이 혹여 후계자로... 이거 김칫국물? 줄 사람도 없는데...
1034년 4월 11일 로마노스 황제는 욕실에서 죽은 상태로 발견됩니다. 질식사 했는지 독살 되살는지 확실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재위 6년 만에 제 명에 못살고 죽네요.
그가 죽은 그날...
조에는 전광석화처럼 미카엘과 재혼하였고 그를 공동황제로 선포하게 됩니다.
그럼 그 배후에는 누가 있었는지 짐작 하시겠죠...? 항상 마눌님 애인창을 확인하시길...
로마노스 3세 가문인 아르기오스 가문 입니다. 홀로 황제... 조카들이 덕분에 출세하는군요...
조에의 두 번째 남편으로 황제가 된 미카엘 4세(Michael IV, 재위 1034–1041)는 갓 24세의 청년으로 팔라고니아(Paphlagonian) 지방의 농부 자식으로 출생하였습니다. 그래서 출세 후 별칭이 "the Paphlagonian"이 되었습니다.
원래 그의 일족 형인 이오아네스가 먼저 수도에 와서 왕국 여인들의 시종 노릇을 하다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고향에 머물던 친척 동생 미카엘을 상경시킵니다.
동생에게도 귀부인들의 시종하는 자리를 만들어 주었는데 이때 조에의 눈에 들게 됩니다.
조에가 남편인 현 황제를 미워하자 옆에서 부추기게 됩니다.
그럼 황제를 죽여 버리고 절 선택해 주시면 진짜 물심양면(???) 모시겠습니다. 폐하...
조에는 미카엘의 음모에 가담하게 됩니다. 이에 로마노스 황제는 욕실에서 사망하게 되죠.
그날 조에는 미카엘을 남편으로 공포하지만 총대주교가 반대합니다.
그러자 금화를 찔러주는 미카엘... 너 돈 마니마니 줄게... 응?
그 다음날... 조에와 미카엘의 대관식이 거행되었고 정식으로 미카엘 4세의 치세가 시작됩니다.
이젠 돈으로 모든 걸 해결...???
역사서에 의하면 미카엘 4세는 외모가 잘 생겼고 관대하였고 영리한 인물 이었고 합니다. 그러나 건강상 문제가 있었는데 간질에 의한 발작이 아무 심했다는 점이죠. 막상 황제가 되고 나자 정무에서 조에를 소외시킵니다.
마눌님은 그냥 집에 계셔... 내가 다 알아서 한다니까...
문제는 황제 자신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고 일족 형이었던 이오아네스를 너무 중요했다는 점이죠. 벼락출세하게 된 최고행정관 이오아네스는 소위 개혁을 주제로 시민들에게 많은 세금을 물렸고 기존의 제도에 대해 손을 대려 했습니다. 그러니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공분을 일으켰습니다. 저 놈 보게... 헐... 저 천한 녀석이 우리를 뭐로 보고...
이오아네스에 의한 독점적인 행정 운영 그리고 엄청난 세금에 의한 새로운 정책의 확장 등 주도한 일마다 실패를 거듭합니다. 더구나 안디옥과 불가리아 등지에서 반란이 발생하였고 날씨마저 엉망이라 일조시수 부족, 메뚜기들의 재앙에 의해 기근과 흉작이 연속됩니다.
특히 군사문제에 있어서는 거의 영토 상실로 귀결되는 형편이었습니다. 침공에 따른 패배... 그저 수도에 앉아서 현지 지휘관만 족치니 문제 해결 될 리가 없죠. 제국의 역사에서 그냥 군인황제가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영토가 넓으면 넓을수록 댓가가 크기 마련이었죠.
1038년에 이르면 황제의 간질은 더욱 악화됩니다. 너무 아프니 신에게 구원을 얻고자 하는데 수도원을 건설하고 아이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의식을 거행합니다.
신이시여... 저를 구원해서 황제노릇 더하게 해 주세요...
결국 상태가 더 악화되자 그의 친족들은 가문 내에서 후계자를 지명하라고 재촉합니다. 그는 자신의 누나였던 마리아의 아들인 미카엘을 후계자로 지명합니다. 그리고 조에에게 강요합니다.
내 조카를 다음 황제로 만들어 달라...
즉 두 사람의 양자 형식을 빌려 조에의 확답을 받은 직후인 1041년 12월 10일 황제는 31세로 결국 병사하게 됩니다.
미카엘 4세는 평민 출신이라 출신지명을 따서 팔라고니아 가문...
후계자로 지명된 미카엘 5세(Michael V Kalaphates, 1015-1042)는 외숙부 미카엘 3세에 의해 제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스테파노스와 마리아 사이에 태어난 그는 외숙부보다 5살 아래였으며 아마도 미카엘 4세 친척들 중 촌수로 다음 세대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던 인물로 보입니다. 제위에 오르자마자 권력을 좌지우지하던 이오아네스를 수도원으로 추방해버리고 스스로 통치하는 분위기를 만들죠.
1042년 4월 19일 밤... 미카엘 5세는 스스로 유일한 황제가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양모이자 공동통치자인 조에를 추방하기로 결심합니다. 황제 주도 하의 이러한 이벤트는 밤에 급작스럽게 이루어졌고 조에는 그 밤에 궁에서 추방됩니다.
그 다음날 추방 소식이 알려지면서 폭동이 발생합니다.
감히 정통 계승자를 몰아내고 가짜가 진짜 황제가 되려 하다니...
이것은 있을 수 없다는 시민들의 태도였습니다.
그대... 너무 성격이 급했어~~~ 시간을 기다리지 젊은 넘이 지혜가 없었구먼...
폭동은 황제를 궁에서 도망치도록 하였고 조에는 다시 그녀의 동생 테오도라와 공동황제로 선포됩니다.
4월 20일 기점으로 달아난 미카엘에겐 체포명령이 발동되었죠.
일족인 이오아네스가 있던 수도원으로 달아난 미카엘은 수도사가 되겠다는 서약과 함께 목숨 연장을 꾀하게 됩니다.
그러나...
잡히자마자 미카엘은 눈이 뽑히고 거세 됩니다. 그리고 8월 24일 두 콤보(?)의 휴유증으로 수도사의 신분으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너무 욕심이 앞선 어리석은 자의 말로였습니다.
미카엘 5세는 칼라파테스라는 가문의 명칭이 있네요. 외숙부보단 집안이 좋은가?
미카엘 5세를 내좇고 다시 여제가 된 조에는 결혼을 통해 공동황제를 지명하게 됩니다.
그녀의 세 번째 남편의 이름은 콘스탄니노스 모노마코스(Constantino Monomachos, 1000-1055)였습니다.
공동황제가 된 콘스탄티노스 9세(Constantine IX Monomachos, 재위 1042-1055)는 전대 황제들의 신임을 받았던 테오도시오스 모노마코스의 아들로 일찍부터 중요한 궁정 관료로 진출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조에의 눈에는 관료로써 상당히 유능하게 비친 탓인지 총애를 받았고 이런 광경을 본 조에의 남편 미카엘 4세은 그를 향해 시기하고 질투 했습니다. 결국 미카엘에 의해 콘스탄티노스는 레스보스 섬으로 유배를 당하게 됩니다.
이후 미카엘 가문이 전복되자 재판관으로 복직된 그가 궁전으로 돌아왔을 당시...
조에는 공동황제였던 여동생 테오도라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는 것을 싫어하여 자매끼리 독설이 난무하는 궁전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자매의 독설 전쟁 두 달 후... 자신이 인기에 밀리고 있음을 까달은 조에는 새 남편을 영입해 여동생을 밀어내기로 합니다. 이리하여 선택된 남편이 바로 콘스탄티노스였습니다.
모노마코스 가문의 가족 트리인데...
콘스탄티노스가 황제가 되기 전 두 번에 걸친 결혼에서 딸 하나가 있었고...
그녀가 류리코비치 가문으로 시집갔다는 전설이... 믿거나 말거나...
왜냐면.. 러시아측에서 강하게 주장하고 있어서... 우리 조상님 혈통에 비잔틴 황제의 DNA가...
그는 이미 두 번의 결혼을 했으며 첫 아내를 통해 자녀를 두었다고 합니다. 세 번째 결혼으로 조에랑 했지만...
이미 애첩을 두고 있었죠. 그녀는 두 번째 아내의 조카였던 마리아였습니다.
여인과의 쾌락을 사랑하고 음모에 대해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새로운 황제의 성격은 수도에서 미카엘의 잔당들을 모조리 몰아내었고 황제야망을 지녔던 군단장 게오르그 마니아케스의 반란을 진압해버립니다.
그의 치세 때 엄청난 국내 반란이 일어납니다. 특히 황제의 조카 레온(Leo Tornikios)의 반란은 콘스타니노플을 포위하여서 제국군이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됩니다. 그 덕분에 발칸에서의 방어력은 현저히 감소됩니다. 그 여파로 페체네그족이 제국을 침공하게 되었고 5년간 약탈을 자행하게 됩니다. 군인출신이 아니었던 황제는 군사적으로 억누르지 못했고 그들을 달래어서 제국 내 정착을 허락해주죠. 좀 조용히 해... 먹을 거 줄게...
돈과 식량 그리고 정착지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어르고 달랩니다.
이건 마치 중국 송나라가 문약에 빠져 요나라가 항상 침공해 오자 돈과 비단으로 어르고 달래던 기억이 납니다.
꼭 이런 역사적인 상황이 다른 곳에서도 연출되는군요.
이래서 역사는 돌고 돌죠... 그렇기에 중요시해야 합니다. 미래에 또 이런 일이 벌어지기 때문...
콘스탄티노스 모노마코스의 초상화...
성 소피아 사원에 아직도 남겨져 있다네요.
외부적인 일도 다난했지만 내부의 일은 제위와 직결되는 문제였으므로 황제는 신중하게 처리해 나갑니다.
귀족 출신 지주 및 교회에 대해서는 아주 관대한 세금을 통해 그들의 지지를 확보하였고, 귀족들을 중용하여 그들의 지지를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이런 저런 그의 정책들은 제국의 침몰 위기에서 구했다는 평가를 내리는 역사가들도 있더군요.
아마도 행동파 귀족들과 부유층들의 환심을 얻었다는 뉘앙스로 들립니다.
더 이상 내분이 없도록 잠재웠다는 평가를 이런 식으로 호평하는 듯...
그리고 1054년 결국 그리스와 로마 교회는 최종 분리되게 됩니다. 주교들끼리 서로 파문하고 끝나는데...
특히 남부 이탈리아에서의 긴장은 점차 높아져만 갑니다. 아마도 데쥬레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서로 내꺼...
당시 로마주교는 콘스탄티노플주교를 인정하지 않고 이탈리아 남부를 노르만 정복자들에 주려고 합니다.
그들의 무력을 앞세워 이탈리아에서 비잔틴세력을 몰아내려 했던 것으로 보이네요.
그 덕분에 대박 터진게 아마 드 오트빌 가문이었죠... 근본은 북프랑스 촌놈들이었는데...
동서교회 분리 직전의 이탈리아 상황입니다.
이탈리아 판도는 항상 걸레짝이죠... 교황의 욕심에 의해서...
남부 이탈리아가 원래 비잔틴 영토였는데 그 사이를 비집고 드 오트빌이란 노르만 촌넘들이...
로마주교의 부추김 속에서 노르만인들은 남부 시칠리아에 본격적으로 침공을 가하게 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황제는 크게 놀래어서 시칠리아 문제에 개입하려 합니다만...
그러나 이미 병중에 있어서 황제는 움직이기 힘들었죠. 결국 1055년 1월 11일에 황제는 병사하고 맙니다.
죽기 전 황제는 후계문제에 있어서 공동황제인 테오도라의 권위를 무시하고 제위를 불가리아 공작 니케포로스에게 전달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궁정 분위기상 자신의 의도를 이루지 못하였고 종국에는 테오도라가 단독 황제로 계승하게 됩니다. 조에는 1050년에 이미 사망한 터라 마케도니아 왕조의 남은 혈통은 테오도라 뿐이었죠.
흥미로운 건 역사서에선 전반적으로 그의 통치는 비잔틴 제국에 대한 재해였다고 평가합니다.
아마도 군에 복무한 경험이 전무했던 그의 통치기에 발생한 군사적인 부분의 약화는 훗날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를 통해 소아시아의 상실에 기여했다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귀족과 교회의 환심만을 사기 위해 이루어진 내부 개혁들은 황제에 대한 지지는 강화되는지는 모르나... 전반적으로 군사력에 대해서는 너무 까막눈인지라... 외부의 변화에 대해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마지막 혈통이었던 테오도라(Theodora, 980-1056)는 조에의 여동생으로 일찍부터 제국 정치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백부의 아이들이 요절하고 아버지에게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두 자매의 결혼은 항상 정치적으로 계산되었죠.
테오도라의 지능은 몹시 뛰어났고 자신의 의지에 대해 강한 자신감을 내 보였으며 금욕적인 성품을 지녔습니다. 언니 조에가 로마노스 아르기오스와 결혼했을 때 형부가 자신의 사촌과 결혼하기를 주선하자 강하게 거부합니다. 시러... 싫다고...
결국 말 안 듣는 그녀는 언니와 형부들에 의해 강제로 수도원에 보내지게 되고 평생을 거기서 살도록 강요를 받게 됩니다. 제관에 도움이 안 된다고... 그냥 처박혀...
그러나 미카엘 5세에 의한 마케도니아 왕조 전복 사건이 발생한 후 궁정 인사들은 조에에게 공동황제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그녀를 수도원에서 데리고 나옵니다. 그 때도 그녀는 강하게 반발하였고 예배당으로 숨어버립니다. 그러나 사람들에 의해 세상 밖으로 끌려나왔고 공동황제로서 궁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두 자매는 항상 다투었고 결국 콘스타티노스를 공동황제로 내세워 세 사람이 함께 통치하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집니다. 이게 무슨 꼴이냐... 허걱...
그렇지만 콘스탄티노스의 애첩이었던 마리아는 두 늙은 여제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밉니다.
내 싸랑 만이 유일한 황제가 될 수 있도록... 뭐 이런 생각이었겠죠. 그렇지만 마케도니아 가문의 후광은 이미 제국 내 공고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씨도 안먹혀...
콘스탄틴노스는 당시 불가리아 공작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Nikephoros Bryennios)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지지하면서 테오도라의 권리를 박탈하려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승리는 테오도라가 차지합니다. 아무래도 그녀가 지녔던 마케도니아 왕조의 정당성은 능력 좋은 공작들을 커버했던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녀가 죽지 않는 한 왕조가 바뀔 확률은 엄청 낮았다는 반증도 됩니다. 그녀가 죽어야 모든 것이 바뀐다... 아마도 시간만이 해결해 주었을 듯...
1056년 8월 31일 76세의 나이로 사망한 테오도라는 그녀의 후계자로 군 재무장관이었던 미카엘 브린가스(Michael Bringas)를 지명합니다. 그의 지명에는 궁정을 독점하던 환관들의 묵인이 가장 컷습니다. 오랜 기간 관료생활을 해 온 미카엘은 어떻게 황제가 되는 지를 잘 알았던 것 같네요. 두 여편네가 죽음으로써 진정한 마케도니아 가문은 종결됩니다.
테오도라의 지명을 받고 즉위한 미카엘 6세(Michael VI Bringas, 재위 1056–1057)는 궁정에서 출세한 전형적인 관료 출신이었습니다. 브린가스란 성을 본다면... 과거 조에의 즉위 때 환관의 우두머리로 활약한 조세푸스 브린가스가 있는데 아마도 지역명에서 따 온것 같지만 혈통이나 족보가 남지 않아서 자세한 내막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냥 같네...?
그가 황제후보자로 부상하자 콘스탄티노스 9세의 조카는 암살을 시도했지만 살아남았습니다. 간신히 제위에 올랐는데 이번엔 군인출신 귀족들의 불만에 시달려야했습니다.
아마도 가장 많은 재원이 국방비에 소비되었기 때문에 기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돈이 문제였죠... 돈이 잘 돌지 않으면 국방이 약해지니... 책임 진 넘들은 불안하죠...
이걸 빌미로 잘릴 가능성이 높아지니... 이래저래 몸 보전이 최고...
내부의 가장 큰 적은 콘스탄니노스에 의해 후계황제로 공인된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였습니다. 황제는 의도적으로 그의 존재를 무시했고 군인출신 귀족들은 또 다른 황제 옹립을 꿈꾸게 됩니다. 결국... 파플라고니아에서 군단장 이사키오스 콤네누스가 스스로 황제로 선언하고 미카엘의 군대를 급습하게 됩니다.
종국에는 1057년 카파도키아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고 황제는 친히 진압하기 위해 달려갔습니다만... 기다리는 것은 너무나도 강력한 반란군들 뿐... 6월 8일에 스스로 황제로 선언했던 이사키오스 콤네누스는 계곡을 지나던 황제를 급습하여 붙잡게 됩니다.
포로가 된 황제는 결국 이사키오스를 공동황제로 삼겠다고 약속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수도의 관료들은 자신의 지위를 보장받기 위해 수도를 무장하게 됩니다. 니케아 근처에서 전투가 진행되고 양측 협상이 이루어질 무렵... 수도에서는 이사키오스의 황제 등극을 지지하는 폭동이 발생합니다. 그래... 우린 강력한 황제가 좋아... 무능한 미카엘을 꺼져라!!!
미카엘은 돌아가는 분위기를 직감하였고 이사키오스에게 양위 의사를 전달합니다. 상당히 개방적인 입장을 보였던 이사키오스는 총대주교를 통해 미카엘의 양위를 순수하게 받아들였고, 미카엘은 퇴위 후 수도사가 되어 완전히 정계를 은퇴합니다. 그리고 1059년에 병사하여 삶을 마치게 됩니다.
나 홀로 황제군요.... 짜고치는 관료 출신 황제라서인지 오래 못 버틴듯...
1057년 양위를 통해 황제가 된 이사키오스 콤네누스(Isaakios Komnēnos, 1007-1061)는 콤네노스 왕조의 첫 황제로 이름을 남깁니다. 나중에 콤네누스 왕조를 설명할 때 가문의 내력이나 출세 배경 등을 언급하겠습니다. 아무튼 무력을 통해 권력을 잡았으며 전대 바실레이오스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최고위 군인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미카엘 황제가 퇴위 한 후 이사키오스 1세가 황제로 등극하였고 자신을 도와준 주변들에 대한 보상에는 임했지만 그들을 수도에 두진 않았습니다. 그냥 나의 가문 본거지인 파플라고니아를 지켜줘... 이들은 훗날 콤네누스 가문의 부흥에 기반이 됩니다.
이점에서 이사키오스가 상당히 머리 좋은 생각을 한 듯...
이건 좀 칭찬받아야 됩니다. 그는 제국의 미래를 보는 견지에서 아니 가문을 위한...
알렉시오스가 백부 이사키오스의 후광 아니었으면 등장할 건더기가 없었을 듯...
당시 제국의 재정은 바닥 상태였습니다. 결국 해결책은 긴축재정 밖에 없었죠.
그러나 연금 같은 걸 확 줄이면 난리 납니다. 그래서 새로운 황제에 대한 반감이 증폭되죠...
저 봐라... 새 황제가 개혁한다고 내 연금 빼앗아??? 개혁은 시러... 반발이 증폭...
내부의 문제가 얽히고 설킬 때 이사키오스 1세는 헝가리 왕국과 분쟁이 발생함에 따라 친정길에 오릅니다. 이 친정은 상당히 성공적으로 마쳤고 평화협정을 맺고 귀환했지만...
뜻하지 않은 사건을 계기로 황제는 심각하게 병석에 눕게 됩니다.
나 곧 죽을 것 같아... 황제 된 지 몇 년인데... 이러는지... 아이고...
당시 황제의 긴축재정에 가장 불만을 갖고 있던 곳은 교회였습니다. 개혁의 주요 목적에 교회 재산 몰수해서 국고로 넣고 싶어하는 뉘앙스가 풀풀...
당시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우오스가 엄청 반발하게 됩니다.
이 자는 훗날 황제가 되는 콘스탄니노스 루카스의 장인이었습니다.
좀 냄새가 안나시나요...? 교회와 두카스 가문이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거...
총대주교의 반발에 군인출신 황제는 대노하였고 본보기로 그를 총대주교직에서 쫓아내고 반역죄로 몰던 중... 재판받으로 나오라고 했더니 죽는 통에 사건은 종결됩니다.
야... 너희들 시끄러워... 감히 나에게... 지금 어떤 와중인데 교회가 돈 타령하냐???
그렇지만 친정에서 돌아온 황제의 병이 점점 위중해지자 당시 석학이라고 이름 높았던 수도승 한 명이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미카엘 프셀루스(Michael Psellus, 1018-1078)로 플라톤의 학문에 심취한 자였습니다. 그는 병석에 누운 황제에게 친동생인 요하네스보다는 황제옹립 1등 공신이며 모에시아 공작인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를 후계자로 지명토록 부추깁니다.
프셀루스를 만난 후 황제가 무슨 마음이 들어서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상할정도로 순순히 친동생보다는 콘스탄티노스 두카스를 후계자로 지명하였고...
아직 자신이 죽지도 않았는데 양위하고 스스로 수도원으로 들어갑니다.
나중에 허덜덜하게 승천하게 되는 콤네누스 가문...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님이 군인 출신이지라 순진했었는듯... 천벌에 두려움을...
그 덕분에 유능한 조카가 황제가 되기는 됩니다. 황제로의 길을 터 주었다고 해야하나...
이러한 이사키오스의 양위 이벤트에 대해 해석이 분분합니다. 가장 유력한 해석으로는...
아마 황제가 북쪽 경계에서 친정 도중 나무에 기대어 있다가 번개를 맞아 넘어졌는데 이것을 하나님의 진노로 해석했던 모양입니다. 신이 노해서 번개를 내렸다는...
이 문제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황제에게 가서 이상한 소릴 한 넘이 바로 미카엘 프셀루스...
결국 황제는 자신의 질병이 신이 내린 징벌로 받아들이고 친동생의 반발을 무시하고 두카스에게 제위를 넘겨줍니다. 그리고 그의 처자 역시 모두 수도원에 들어가면서 역성에 의한 왕조 교체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족들은 피를 보진 않게 됩니다. 순순히 물러나 주어서...
이렇게 제국 역사 속에서 최악의 가문이라 불리는 두카스 가문이 등장하면서 비잔틴 역사는 또 한 번 휘둘러지게 됩니다.
누구에게,,,
바로 저 멀리 동족에서 온 투르크족에게 말입니다.
이사키오스 1세를 마지막으로 마케도니아 왕조의 시점은 공식 종료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두카스 왕조가 열리게 됩니다.
위 내용을 요약하는 의미에서 작성해본 연대기 입니다.
여전히 등장하는 황제가 많네요... 간단치 않은 역사.... 으으으...
흔히 중세 비잔틴 제국은 마케도니아의 황제 아래에서 제국의 도시 확장, 인구의 증가, 무역의 촉진 등으로 풍요로움을 만끽한 시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문화적으로 그리고 교육과 학습에 상당한 성장이 이뤄져서 이른바 "마케도니아어 르네상스"로 불립니다. 고대의 문서들은 보존되고 다시 복사되어 후세에 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회가 마련되었습니다. 그리고 비잔틴의 예술은 번영했고 화려한 모자이크는 많은 새로운 교회의 내부에 축복을 불어넣게 됩니다.
비록 제국의 영토가 유스티니아누스의 통치 기간 동안 보다는 훨씬 작았지만 지리적으로 가까워 진터라 어떻게 보면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통합이 가능해졌고 훨씬 강력해 졌다고 평가받습니다.
제가 읽었던 로마역사책은 워낙 옛날 서적인지라...
이것을 인용하면 돌이 날아 올 것 같아서... 투석당하고 싶지 않아~~~
이에 적극 사양했구요. 그냥 위키피아를 탐독했습니다.
어차피 역사의 흐름은 다 비슷한지라... 무엇을 보든 상관없다고 제 스스로 판단...
위키피아 내용이 어쩌면 최근의 경향을 담고 있을 런지도 모른다 싶어서요.
다수의 사람들이 관련 연구가 나오면 사전에 넣고 싶어 안달하더군요. 흠...
저의 쓰잘데기 없는 불평이지만...
상당히 글쓰기가 까다로운 편입니다. 이노무 비잔틴 역사가...
마케도니아 가문 경우 소개글이 총 A4 21장이 나왔습니다. 단지 16명의 황제를 서술하는데...
이러다간 콤네누스 가문 소개에 들어가면 글 쓰다가 도중에 기절할 듯...
당시 역사적 사건이나 사고가 엄청 많은데다...
친족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또 관련 문서나 논문이 후대로 갈수록 많아지는 경향이 농후하니...
그렇지만 언급 안하고 그냥 넘어가려니 그렇고...
앙겔로스나 팔라올로고스 가문들의 경우 황제들 리스트 보기 만해도 거의 반죽음... 허걱~
거기에다 십자군도 터지고... 실타래처럼 얽히는 관계들...
아무리 생각해도... 서유럽의 혈통위주 가문 소개와는 전혀 다르네요.
각 황제마다 신분이랑 배경이 다 달라서 하나하나 언급하려니 글이 자연 늘어납니다.
그렇다고 그냥 은근슬쩍 넘어가려니...
뒤의 사건이랑 연결이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하게 발생합니다.
또 비잔틴 사랑하시는 분들이 이걸 왜 언급 안하느냐고 불만을 토로하실까 두렵기도...
덧글이 무섭습니다. 너무 잘 아시는 분들이 많은 터라...
이쯤에서 마케도니아 왕조 200년을 마무리 짓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두카스 가문인데 비잔틴 제국의 비극이 시작되는군요.
장문의 미숙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첫댓글 로마의 혈통관념은 우리네의 강력하고 타이트한 부계 혈통 관념하곤 상당히 다르죠. 흔히 잘 알려진 바와 같이 Queen이 왕비로도 번역되지만, 여왕으로도 번역되는 것처럼, 사실상 그 둘은 같은 의미였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작위를 얻을 때는 부부가 공동으로 작위를 얻었다는얘기죠. 그래서 공주들과 결혼한 남편들은 곧 공주들을 통해 "황실 혈통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고, 그로써 제위를 주장할 자격도 얻는 것이었죠. 특히 살리카 전통을 따라 남계질서가 강했던 게르만 지역에 비해 로마와 그 영향을 받은 동유럽 지역은 더욱 그랬죠.
그런데 Skleros는 스켈로스가 아니라 스클레로스입니다.
예... 정정해야겠네요. 감사합니다.
오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는 비잔틴 빠들에게 수백년 넘게 까이게 되는 두카스 가문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군요.
조에와 테오도라는 좀 안타깝다는 생각도 많이 드는 여제들입니다. 후계로 유력해진 시점이었다면 좀더 본격적으로 후계자에
걸맞는 교육을 통해 단순한 유능한 데릴사위 받는 수단이 아니라 국가의 안주인으로 키웠다면 더 좋았을 것을...
나중에 나올 안나 콤네누스 같은 처자는 너무 재능이 과한 것에 비해 기회가 없었다면... 이 자매는 기회가 충분했으니
재능과 노력이 수반되었으면 좀더 나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가 하는 아쉬움이 남더군요.
특히나 게오르기우스 마니아케스의 회군은 두고두고 안타까운...
뒷 왕조 가 보면... 황녀들 모조리 수녀원으로 gogogo~~~ 아무래도 권력 싸움이 우려되어서...
바실레이오스 불가록토누스와 관련된 일화는 말 그대로 야사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뭐 그런 야사가 떠돌만큼 잔인하게 대하긴 했을 것 같긴 합니다만 ㅋㅋ 하지만 정말 유능한 군주였죠
예... 감사합니다. ㅎㅎㅎ 야사는 어딘가에서 꼬리를 물고 등장합니다.
이반 3세의 아내인가, 어머니가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일원 아닌가요? 그래서 류리코비치가 그렇게 주장했던걸로 알고 있었는데...로마노프는 원래 주워먹은거긴 합니다만.
고생하셨습니다 ㄷㄷ
아마도 그럴껍니다. 어차피 류리코비치 가문은 절멸되어서 로마노프의 러시아와는 아무 연결이 없는 건 사실입니다.
동롬 역사는 참.. 언제봐도 다이나믹하네요.
그게 매력이긴 하죠 ㅎㅎ..
너무 역동적이라 힘듭니다. 약술하기가...
안나 씨 덕분에 강력크한 정교회 러시아가 될 수 있었던 거군요 ㅎㅎ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러시아가 정교회 받아들이면서 서유럽화가 늦어졌다고 볼수도... 비슷한 슬라브족이지만 폴란드의 경우는 가톨릭을 받아들이면서 먼저 서유럽 사회로 편입됩니다.
그리고 동군연합을 통해 동유럽의 패자로 등장합니다(사견입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4.21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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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카스....ㅂㄷㅂㄷ
저도 ㅂㄷㅂㄷ...
삭제된 댓글 입니다.
뒷 왕조에도 여전히 두 콤보는 계속되더군요. 흠...
두카스... ㅎㄷㄷ... 얼른 넘어가서 콤네노스 황조가 등장하기를+_+!! 잘 읽었습니당. ^^
예... 조금만...
동롬은 중앙집권적이고 왕권이 높다고 하는데 오히려 왕위의 상속자체가 불안한게 의문입니다.
상속개념 자체가 서유럽과는 전혀 다른듯... 아마 십자군 터지고 나서 계승개념이 서유럽식으로 변하더군요. 그때 무렵은... 더 이상 동로마제국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서유럽화되어버린 비잔틴...
콤네노스가 야바위 두카스에게 이렇게 당한거였구나!
종교가 이런 식으로 정치에 개입하기도 합니다. 당신... 신에게 벌받는거야... 회개하시오... 그래야 천당으로 갈 수... 두카스에게 넘기시오~ 그래야 천국으로... 제국 전체가 천국으로...ㅎㅎㅎ
마케도니아 왕조가 무너진건 결국 후계문제네요... 유일한 혈족인 딸들을 수녀로 취급하다니...
그렇더군요. 아마도 또 다른 제위 라이벌로 성장할 것을 두려워해서... 방치... OTL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사실 바실리우스 불가록토누스가 애만 낳았어도 좀 낳았을 것 같은데 말이죠...ㄸㄹㄹ
원래 분열해야 제맛이죠... 세상의 이치란 뭉치면 흩어지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200여년을 버틴 것도 기적이라고... 봅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판단이었네요.
가문에 오로지 자매만 남았으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안되니 만큼 그 자매를 어떻게든 이용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안하고 아이를 못낳는 나이까지 방치를 했다는 것은
가문을 회생 불가능하게 망치는 것일 뿐이니까요.
이건 제 추측-어디서 본걸 기억하는건지도 모르지만-이라서 맞다 그르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바실리우스 2세는 두려웠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shyisna님도 쓰셨지만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신랑은 대를 잇는다는 뜻이니, 괜히 쿠데타 맞으면 큰일나니까요. 어린 시절 니케포루스-요한네스를 지난후 친정 초반 바르다스 스클레루스/포카스로 대표되는 반란은 반역에 대한 공포심을 줬을지도 모릅니다. 로마가 이 시기 전성기를 맞이한 이유는 황제가 잘하기도 했지만 상속의 여지를 싸그리 잘라버려서 본인에게만 충성을 바치도록 했기 때문이기도 하죠. 바실리우스 2세에게 중요한 것은 계승이 아니었습니다. 권력이었죠.
그리고, 사실 콘스탄티누스가 아들을 낳기도 했었으니까요. 딸과 결혼시켜 양자로 입양하는 것은 당시에도 최후의 수단이었을겁니다.
딸에게 후계자 교육 안시키는 것은 정말 만약에, 아들을 낳을 수도 있으니, 그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이는 수백년 뒤인 오스트리아에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 마리아 테레지아를 무방비 상태로 두게 되죠. 마리아 테레지아가 워낙 똑똑해서 실수 몇번하고 잘 적응했다지만...이건 다른 환경인가?(...)
맞는지 아닌지는 확신 못합니다 ㅎㅎ(...)
가문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먼저 보는 경우도 있어요. 아마도 바실레이오스 2세의 판단 미스가 가문을 문닫게 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조카까지 라이벌로 크는 꼴을 못보니... 당연 싹부터 잘라야...
너무 늦게 댓글을 달아서 확인해주실지 모르겠지만...부르고뉴가도 해주시면 안될까요? 여기도 꽤나 흥미롭던데...
확인했습니다. 마침 메일 확인하러 왔다가... 제가 지금 너무 바빠서 여기까지 신경이 안쓰이네요.
부르고뉴 가문도 대단하죠. 카페의 분가들은 다 재미있습니다. 내력이 흥미로운데... 읽어 주셔서 감사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