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성의 무게
장성숙/ 극동상담심리연구원, 현실역동상담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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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후반 여성이 상담자인 나를 찾아와 결혼에 대해 걱정을 토로했다. 여자에게는 가임기가 있어 더 늦으면 아이를 가질 수 없어 불안하단다. 그동안 소개받은 사람이 100명이 넘는데 자기에게 맞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외견상 성실하고 수수해 호감을 사는 여성이었다. 직장생활은 원만하게 하는지 살펴보니, 상사나 동료들에게 퍽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소개받을 수 있었던 듯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기주장 없이 일이나 열심히 하는 직장인이었다. 그런데 주말이면 거의 빠짐없이 시골 본가에 내려가 농사일을 돕는 효자였다. 이러한 남편에게 불만스러웠던 그녀의 어머니는 울화를 이기지 못하고 성질이 나면 자녀를 때리는 식으로 풀었다. 어린 시절 이런 환경에서 자랐던 그녀는 학업을 계기로 대학 때부터는 집을 떠나서 살았다. 그러면서 남자친구를 사귀었는데, 어떤 약점이 보이기라도 하면 대충 넘기지를 못해 번번이 헤어졌다.
나는 그녀를 상담하며 애정결핍이 심할수록 완전한 것을 바라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며 그녀에게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이해력이 빨랐던 그녀는 매번 곧잘 알아들었지만, 그때뿐으로 툭하면 사귀는 남자의 결점을 후벼파는 식으로 까탈을 부리거나 사소한 일에 불안해했다.
사실, 그녀는 내게 처음 상담을 받는 게 아니라 그동안 숱하게 상담을 받아오면서 공감이나 지지를 많이 받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위로나 지지를 받으면 좋기는 한데 그때뿐이어서 직면을 시도하기로 소문난 나를 찾아왔다고 하였다.
그녀를 상담하며 예리하게 분석해주기도 하고, 친근하게 동조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환자라며 쓴소리를 던지기도 하면서 그녀의 변화를 촉구했다. 가령, 사람은 비슷한 수준끼리 만난다는데 당신은 완벽하냐고, 부모를 보면서 결혼생활에 염증을 느꼈을 텐데 왜 굳이 결혼에 목을 매느냐고, 그런 태도라면 결혼해도 파국을 면치 못하니까 포기하라는 등 독한 말도 많이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나와 매주 한 번씩 1년을 만났어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그녀의 과도한 불안을 잠재우고 본인이 원하는 결혼을 하게 할 수 있을지…. 이러한 고심을 거듭하다가 어느 순간 습(習)의 힘이라는 게 만만치 않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장시간에 걸쳐 굳어진 습성은 아무리 다독이거나 떨쳐내게 하여도 여차하면 재생하였다.
그녀를 분석하자면, 어린 시절에 형성된 분노가 큰 탓에 조금이라도 마땅치 않은 것이 있으면 트집을 잡는 식으로 터트려냈다. 분노의 대상은 어머니이지만 부모이기 때문에 대놓고 미워할 수 없는 양가감정을 다른 쪽으로 발산하는 식이었다. 왜 하필 결혼과 관련한 쪽으로 표출하느냐 하는 것은 여러 조건의 결과일 텐데, 일찍이 부모에게서 채우지 못했던 의존 욕구를 손쉽게 채우는 길이 이성과의 관계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어느 시점에 이르러 그녀의 불안은 이미 습성화된 것이기에 쉽게 털어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여기면서 나는 천천히 가자는 식으로 마음을 다졌다. 껍데기에 흠이 생긴 정도의 손상이라면 조금만 손을 써도 가시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지만, 폐부까지 침투한 상처는 좀처럼 없어지는 게 아니라고 자신에게 되뇄다. 상처를 받을 당시 엄청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텐데, 그 과정에서 생겨난 분노를 빨리 지워 버리려는 자체가 상처나 고통을 가볍게 보는 처사일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녀도 불안해하거나 안달하는 자기 자신에 지쳤는지 어느 날 축 처진 모습을 하였다. 전 같았으면 정신 차리라고 쓴소리를 하였겠지만, 이번에는 빨리 나아지려고 할 게 아니라 길게 보고 천천히 가자고 일렀다. 형성된 건 변화되게 마련이라며, 중간에 포기하지 않으면 좋아질 것이라는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하였다. 즉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형성된 불안이나 분노는 상담자인 나와의 관계에서 든든함을 자꾸 경험하다 보면 풀어질 테니, 다시 성장하는 과정을 거치자고 말했다. 그제야 좀처럼 변화하지 못해 내 앞에서 움츠리든 불편함을 내려놓게 되는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이런 사례에서 다시금 알게 되는 것은 빨리빨리 하고자 하는 마음이 합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상대에게서 마땅치 않은 점을 발견하면 그러려니 하는 식으로 넘기지 못하고 불안해하며 후벼파는 그녀의 습성은 한두 요인에 의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타고난 취약성, 분노, 욕심 등 온갖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텐데, 몰아붙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 게 합당하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극복하도록 도와야 하지만, 잘되지 않을 때는 그 뿌리가 생각보다 깊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 같다. 이 세상의 모든 결과는 그리 그럴만한 요인들이 낳은 것으로 그것들의 세력이 퇴색되거나 재편성될 때까지 견디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업에 대한 겸허한 태도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 여성은 상담자가 정신 차리라고 촉구하기보다 중도 포기하지 말고 길게 보고 가자는 말에 안도하며 움츠렸던 가슴을 폈다. 안 되는 걸 억지로 해야 하는 부담에서 풀려나는 이러한 징후는 내담자에게만이 아니라 상담자에게도 나타났다. 상담자 역시 그녀를 상담하는 게 한결 수월하게 느껴졌다.
다시금 생각하는 것은 부정적인 결과를 개선하려고 너무 애쓰거나 '빨리빨리'를 외치는 것이 때로는 타당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특히 깊은 상처에 의한 분노 또는 그것으로 인해 형성된 습성은 서서히 희석된다는 것을 알고, 또 모든 것은 다 변화하게 마련이므로 때가 되면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첫댓글
'때가 되면 나아질 것"
나아지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