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의 시간 (외 3편)
진은영
검고 뾰족한 모자를 쓴 여자, 교훈을 싫어하는 여자다
권태로 새하얘진 아이들의 혓바닥을 칼로 긁어대며
자두향기 쏟아지는 그늘로 데려갔다
그녀는 우리의 작은 귓속에 술을 부었다
처음 마신 포도주 같은 이야기들
보랏빛 가죽주머니에선 날카로운 시간을 꺼내주었다
없을 땐
마시던 술병을 내리쳤지
그녀와 함께 누운 모래밭의 밤하늘
검은 미꾸라지들이 반짝이는 유리 조각에 찔리며
파닥거렸다
더 캄캄한 날엔
그녀가 쏟아졌지, 사내아이들의 몸속으로
어두운 복도에 달린
단 하나의 좁은 창문으로
달빛이 쏟아지듯
또 무엇을 훔칠 수 있을까
불을 꺼졌고 공기는 한없이 차가운데
아이들의 흰 목덜미에 은하수처럼 길게 빛나는 스카프를
칭칭 감아주고
검은 기차를 타고서 그녀는 떠났다
선 밖으로 몸을 내미는 것은 위험합니다
플랫폼 푯말을 쓰러뜨리며
창밖으로 가슴을 내밀어 마지막 인사를 해주었지
우리는 하늘처럼 파란 젤리를 씹으며
오래 묵은 담배냄새가 피어나는 꽃잎무늬 소파에 앉아
그녀가 보낸 엽서들을 큰소리로 따라 읽었다
얘들아, 도시가 점점 납작해져
끈적거리는 누런 기름접시처렁 납작해지면
내가 준 참나무 설거지통에
담가주길
또는, 새로 만든 도시의 카달로그를 동봉한다
밤공기의 부드러운 혀를 찢고
그녀의 모자가 별처럼 솟아오르길
작은 아이들은 공책 밖으로 삐져나오는 연습을 하고
조금 자란 아이들은 황도대() 밖으로 새들을 쫓아내며
계속되는 추위 속에서
우리는
그녀가 두고 간 탬버린처럼 몸을 떨었다
멜랑콜리아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
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도 닿지 못했다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
모래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
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그는 나를 지워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점
데카르트의 점
폐곡선 안의 점
아무리 보아도 넓이를 가진 이면지가 되지 않는 점
유일무이한 점
너의 콧등 위의 점
박하 잎 가득 담은 양가죽 주머니를 쥐고 하얀 하늘로 달아난 흰 올빼미의 발톱 같은 점
내가 사랑하는 권태로운 점
우주의 콧속에 떠도는 별의 후추씨
가벼운 재채기같이
네 얼굴 신비한 기하학의 하얀 무화과
연애의 법칙
너는 나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어제 백리향의 작은 잎들을 문지르던 손가락으로,
나는 너의 잠을 지킨다
부드러운 모래로 갓 지어낸 우리의 무덤을
낯선 동물이 파헤치지 못하도록.
해변의 따스한 자갈, 해초들
입 벌린 조가비의 분홍빛 혀 속에 깊숙이 집어넣었던
하얀 발가락으로
우리는 세계의 배꼽 위를 걷는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포옹한다
수요일의 텅 빈 체육관, 홀로, 되돌아오는 샌드백을 껴안고
노오란 땀을 흘리며 주저앉는 권투선수처럼
—시집 『우리는 매일매일』 초판 2008.8 (리커버, 양장) 20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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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 1970년 대전 출생. 2000년 《문학과 사회》 봄호로 등단.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출간. 실비아 플러스의 소설 『메리 벤투라와 아홉 번째 왕국』과 시집 『에어리얼』을 번역.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