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 부부의 결의 - “우리는 빠·삐·따”
(빠지지 말자·삐치지 말자·따지지 말자)
‘111’
주교회의 국내이주사목위원회 성지순례사목소위원회(위원장 옥현진 주교)가 지난 2010년 발간한 성지순례 안내 책자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에 소개돼 있는 전국 성지 숫자.
이 ‘111’이란 숫자에 필이 꽂혔다. ‘도대체 어떤 곳일까?’
익히 들어는 봤지만 직접 가본 곳을 손으로 꼽아보았다. 모두 합쳐도 열 손가락을 넘기기 힘들다.
“그냥 별 생각없이 나서게 됐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111곳의 성지를 완주하고 난 지금, 그 ‘그냥’이라는 말 속에도 하느님의 섭리가 함께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 ‘빠·삐·따’ 길을 나서다
이제 7학년인 최성준(라자로·73·서울 화양동본당)씨부터 그의 아내 오종례(안나·68)씨, 최씨의 대자 조민(토마·69·서울 화양동본당)씨와 아내 우영란(마리아·65)씨, 순례의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낸 정현석(65)·신민정(67)씨 부부까지, 성도 제각각, 사는 곳도 제각각, 살아온 내력도 제각각인 세 쌍의 부부가 뭉치자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분이 도와주신 덕택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어요.”
불교 신자인 정현석씨의 입에서 먼저 튀어나온 말이다. 세 부부 모두 정씨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신들도 똑같은 생각을 품고 있기에….
세 부부의 역사는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씨 부부를 중심으로 따로따로 만남을 이어오던 부부들이 그해 말 강원도로 함께 여행을 다녀오게 되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한 이들의 나들이는 이미 예약돼 있었던 셈이다.
부부여행으로 길이 트이자 세 부부는 매주일이면 자연스럽게 모이기 시작했고 그 걸음은 전국 곳곳에 있는 성지나 성당들로 이어졌다.
“같이 다니는 게 여간 행복한 게 아니에요.”
아내들의 행복감이 더 컸다. 덩달아 남편들의 행복도 자라났다.
그러다 지난해 초 다시 찾은 원주교구 배론성지가 새로운 분수령이 됐다. 성지 담당 신부의 소개로 성지순례 안내 책자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의 존재를 알게된 것.
“어떤 것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왕이면 의미를 찾아보자.”
특별한 계획이나 생각없이 무턱대고 나섰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세 부부의 마음에 오롯한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간 숱하게 지나쳐간 성지도 적지 않았지만 마음을 한 데 모으자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2012년 2월 26일. 청주교구 감곡매괴성모순례를 시작으로 드디어 세 부부의 여정이 새로운 궤도에 올랐다. 회장을 맡은 오씨의 제안으로 모임 이름도 정했다. ‘빠·삐·따’. 자신들의 순례여정에서 누구 하나 ‘빠지지 말고 삐치지 말고 따지지 말자’는 소박한 듯 원대한 좌우명.
■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를 함께하다
주일 새벽 6시. 모이는 시간은 어김없다. 하지만 새로운 ‘도전’을 향한 설렘으로 세 부부는 늘 출발시간보다 일찍 나와 있는 서로를 발견하게 된다.
‘운짱(운전을 책임진 사람)’은 대부분 제일 젊은(?) 정현석씨가 맡는다. 정씨는 순례기간 내내 ‘살아있는 내비게이션’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씨는 그 주의 성지 순례를 위해 서너 장의 지도를 따로 사서 일주일 내내 들여다보며 공부를 했다. 그러다보니 몇 년을 함께 다니면서도 길이 막혀 곤란을 겪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 또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 놀라운 일은 불자인 정씨가 누구보다 먼저 그날 순례하는 성지의 미사 시간을 챙기는 등 열성이란 점이다.
“알아서 미사를 챙기고 어느 성지를 가더라도 봉헌초를 제일 먼저 밝히는 모습에 우리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뿐만이 아니다. 순례 때마다 바쁜 길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길’ 기도를 꼬박꼬박 바치는 통에 다른 일행들이 머쓱해질 정도다.
순례에 나선 지 반년쯤 흐르자 요령도 생겼다. 교구를 넘나들며 비슷한 곳에 있는 성지를 순례하며 속도를 더해갔다. 하지만 정씨의 타박(?)을 피해 미사 봉헌과 ‘십자가의 길’은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거의 매주일 나선 성지 순례길은 매번 1000㎞ 이상 이어지는 게 보통이었다. 어떤 날은 네 번이나 자동차 기름탱크를 채워야 할 정도로 강행군을 하기도 했다.
2012년 12월 25일.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 성신교정 성당을 끝으로 제주도만을 남겨두고 육지에서의 순례 여정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성지에서 꼬박 사계절을 보내며 하느님께서 저희와 함께 하시는 모습을 온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새로운 순례를 꿈꾸다
“성지순례는 그 자체로 더할 데 없는 신앙 행위이며 하느님 공부인 것 같습니다.”
성지 순례 내내 묵묵히 맏형 역할을 해온 최성준씨는 성지 순례 자체가 기적이며 은총이라고 말한다.
“그간 자신의 조그만 창을 통해 세상과 하느님을 보려했다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하느님께서는 저희에게 꼭 필요한 이를 보내셔서 당신을 보여주시는구나 하는 깨달음에 감동이 북받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조민씨는 “하느님 안에서 한 번도 우리들의 여정을 의심해본 적이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지금 당장 서 있는 곳, 가는 길이 다를 뿐 언젠가는 한 곳에서 만날 것이라는 생각이 더 깊어졌다”는 정현석씨의 말에 아내 신민정씨는 “가톨릭에 온전히 몸 담을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아이들부터 교회에 나가도록 해야겠다”고 화답했다.
막내 정씨 부부를 위해 지난 5월 제주도 성지 순례에 오른 세 부부. 111곳이나 되는 곳을 순례하다 보니 가장 기억에 남는 곳도 제각각이다.
정씨는 충남 서천군 천방산에 있는 산막골성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지금도 제대로 된 길이 없어서 찾기 힘든 이런 데서 어떻게 살았을까….”
“얼마나 신기한 지 몰라요. 무작정 길을 떠나도 하느님이 알아서 그때마다 필요한 지혜를 주시더군요. 길을 몰라 헤맬 때도, 지치고 배고플 때도 어디선가 은인들이 나타나 도움을 줬어요.”
최성준씨는 그런 소중한 체험을 ‘길에서 만난 하느님’이라고 불렀다.
7월 첫째 주일. 서울 화양동 최씨의 집에 세 부부가 다시 모였다.
“우리의 만남 자체가 늘 새로운 순례입니다. 물론 순례의 끝은 하느님만이 아시겠죠.”
늘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는 세 부부, 그들은 순례 자체가 은총임을 들려주는 듯했다.
첫댓글 천주교의 순례길은 고난의 순례길이지만 불교의 순례길을 만들면 여유와 경쾌함이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