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엽 金承燁(1905~미상)】 「정의부원으로 평안북도에 진입해 수차에 걸쳐 군자금모집 활동」
1905년 7월 30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가산면(加山面) 방산리(方山里)에서 출생하였다. 일곱 살이 되던 해에 부모를 따라 서간도(西間島) 콴뎬현(寬甸縣)으로 이주하였다. 콴뎬현은 고향 의주에서 압록강만 넘으면 도달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후 일제의 압박으로 삶이 어려워지자 압록강을 넘은 것이다. 콴뎬현은 국치 이후 국내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던 이진룡(李鎭龍)·조병준(趙秉準) 등이 옮겨 와 이주 한인 사회를 기반으로 포수단(砲手團)·향약계(鄕約契) 등을 만들어 무장 활동을 이어 간 지역으로 한민족(韓民族)의 애국적 정서가 일찍부터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다. 콴뎬현에 도착해 부모를 도와 농사를 지으며 민족운동 지도자들이 세운 강습소에서 공부하였다.
일제 경찰에 체포된 후 법정에서 1923년 9월에 재만(在滿)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에 가입했다고 진술했으나 당시 정의부는 성립 전이었다. 다만 중대장 김석하(金錫河)와 소대장 장철호(張喆鎬)를 만난 후 정의부에 들어갔다는 신문 진술로 미루어 보아 통의부(統義府)에 가입하여 정의부 성립 시기에 활동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통의부는 1922년 8월 남만주(南滿洲)지역 17개 독립운동단체가 통합해 성립되었다. 하지만 1923년 초 대한제국의 재건을 주장하는 복벽주의(復辟主義)계열의 인사들이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를 만들어 이탈하고, 그해 후반기부터는 의용군의 일부 세력이 분리하고자 하는 조짐을 보였다. 이 같은 움직임에 통의부를 지키려고 노력한 지휘부가 독립군을 증원하던 시기에 통의부원이 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1924년 중반 통의부 의용군 제1·2·3·5중대와 유격대 및 독립소대가 이탈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독립군단임을 자임하며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部)를 성립시켰다. 이에 통의부 잔류 세력은 또 다시 통합운동을 전개하고, 광정단(光正團)·의성단(義成團)·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 다른 7개 단체와 통합해 1924년 11월 24일 정의부(正義府)를 성립시켰다.
통의부에 가입하였지만 정의부 시기부터 본격적인 항일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정의부 제5중대 소속 상등병(上等兵)에 임명되었다. 정의부가 성립되고 얼마 되지 않은 1924년 (음)11월경, 유격대에 가담해 국내로 진입하였다. 의주군 옥상면(玉尙面)에 진입한 유격대는 독고탁(獨孤鐸)을 비롯한 부호 네 명의 집을 기습적으로 들어가 군자금을 모집하고 본부로 귀대하였다.
1926년부터는 유격대장 이진무(李振武)가 이끄는 국내 진입대에 가담하였다. 이진무는 서간도(西間島) 최초의 독립군단인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해 1920년대 초부터 평안도 지역을 무대로 일제 침략기관과 침략자들을 무수히 파괴하고 처단한 대담한 인물이었다. 순식간에 나타나 작전을 끝내고 사라지는 그를 일제는 체포하고자 혈안이 되었다. 이에 국경지방 한국인들은 이진무를 흑선풍(黑旋風)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이진무가 이끄는 유격대에 가담해 1926년 (음)5월 압록강을 넘었다. 구성원은 대장 이진무와 조원국(趙元國)·김인옥(金仁玉)·김성숙(金聖琡) 등이었다. 구성군(龜城郡) 천마면(天摩面) 송수동(松水洞)으로 진입해 부호들의 집을 기습적으로 습격해 군자금 200원을 모집하였다. 작전이 끝난 후 본부로 귀대하였다가, 8월 하순 다시 이진무 유격대의 구성원이 되어 국내로 진입하였다.
8월 27일 구성군 방현면(方峴面)으로 가 일제 경찰 주재소와 우편사무소를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가는 도중 한국인 순사 김봉규(金奉奎)가 일행을 불심검문하려 들자 그를 저격하였다. 김봉규는 부상당한 채 도망을 갔기에 곧 경찰대를 이끌고 유격대를 추적할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계획을 취소하고 본부로 귀대하였다.
이후 1928년 2월 동지 이춘회(李春廻)와 국내로 진입하였다가 같은 달 24일 창성진주재소 소속 경찰에게 붙잡혔다. 1929년 7월 31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가담하지 않은 사건의 혐의자로 몰려 사형을 선고받았다. 1925년 7월 4일 이진무 유격대가 차련관(車輦舘)주재소를 습격해 일본인 경부보 무라카미(村上) 이하 4명의 일제 경찰을 사살할 때 그 대원이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1925년 8월 의주군 광평면(廣坪面)에서 밀정 김태봉(金泰奉)을 살해했다는 것이었다. 두 사건에 자신이 가담하지 않았음을 경찰 신문(訊問)에서 누차 주장하였으나 일제 경찰이 혹독한 고문 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시인했다는 조서를 만들고 이를 검사에게 넘기는 것으로 유죄가 확정되었다. 이 같은 결과에 억울함을 참을 수 없어 재판장을 향해 침을 세 번 뱉었다. 그리고 의자를 들어 재판장을 향해 던지려는 순간 간수들의 제지가 있자 만세를 고창하였다.
항소하여 평양복심법원으로 갔다. 복심법원의 공판이 이루어지는 동안 일제는 정의부원으로 붙잡혀 투옥된 이용담(李龍淡)·김봉수(金奉守) 등을 증인으로 세워 두 사건의 연루자라는 상황을 만들고자 했다. 정의부 군사위원장 겸 의용군사령관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겪던 있는 오동진(吳東振)까지 대질 신문하여 연루자임을 입증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들 모두 연루 사실을 부인하여 결국 재판장은 1930년 4월 17일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투옥되어 있는 동안 20년으로 감형되었고, 경성형무소에서 15년간 옥살이한 뒤 출옥하였다. 출옥 이후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