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 봄 봄
와아! 봄이다
따스한 햇살에 온갖 생물이 자라는 이봄날
뾰족 뾰족 솟아나고
피어나고
열리고
흐드러지고
날리고
산수유꽃 필때 설레이던 가슴
매화꽃 향기에 전률을 느끼고
조용한 자리에 잎하나 없는 검은 빛깔 나무에 순백색의 아름다운 목련꽃 모습은 소름끼치도록 숙연하기까지
한 하루
숨어 흐르던 끼를 발산하기 위해
겨우내 켜켜로 앉았던 찌들은 찌꺼기 먼지를 날리기 위해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우리는 밖으로 뛰쳐나가 '까불까불' 가슴에 키질을 합니다
후~~~~~ 내 뱆는 날숨이여
흑~~~~~~~마시는 들숨이여
오랫만에 만난 우리들을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 앞에서 소녀처럼 환하게 산객님
웃는 우리는 즐거워하며 봄을 만끽했다. (경덕
이 궁에서 유일하게 남은 옛날 그대로의 문이다
흥화문(興化門)은 '비운의 문'으로 불린다.
어떤가 보기엔 양팔을 벌려 하늘을 날을 것같은 자세로 서 있지만
슬프게도 이리저리 팔려 다니다 원래 있던 자리도 아닌 이곳에 겨우 자리 잡았지만 그래도 봄을 만나니
다시 새가된 듯 새 아침을 맞듯 기지개를 켜는 것 같다
조선총독부는 지금의 장충단공원 자리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모하기 위한 사당인
'박문사(博文祠)'의 정문으로
그후 박문사에 영빈관이 들어서고
신라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었다가
현재 경희궁 정문인 이곳으로 옮겨졌었다고 한다
흥화문뿐 아니라 여러 문화재의 건축자재들이 박문사 건립에 동원됐으니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수난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고
이 경희궁 안에 일본인들만 다닐 수 있는
학교를 세웠으니 ...
경희궁은 건물이 100 여채 가운데 정상으로 남은 것은 정전인 숙정문 황학정 3채뿐인데
인터넷
대원군이 경복궁을 지을 때 경희궁를 헐어 패허가 된 경희궁
가엾어라!
나라가 겪은 수난의 길을 같이한 경희궁
사연을 들을 수록 볼수록 가엾고도 애닯은 사연의 주인공인 흥화문이 그래도 내나라 궁의 정문으로 다시
섰고 경희궁이 복원되어 빛나는 희망찬 주위배경 과 건물이 다시 살아 나 우리를 맞이하니 그나마 마음이
흐믓하다 .
역사가 살아야 나라가 잇고 또한 우리가 있지 아니한가
우리가 살아갈 미래의 거울을 보는 것 같으니
흩어지고 깨어진 나라의 보물과 국보뿐 아니라 아무리 작아도 내 조상 삶의 흔적을 찾아내어 다시
복원하는 것은 거룩한 작업이다.
인터넷
정문인 흥화문의 현판 글씨가 명필이었고,
글씨의 광채가 밤에도 훤히 비추었다고 해서 이 일대를 야주개라고 부른 데서
경희궁은 일명 ‘야주개 대궐[夜照峴大闕]’로 불렸는데 유래한다고 한다.
숭정전의 남문
숭정문에서 경종과 정조, 그리고 헌종이 즉위식을 치렀다.
원래의 숭전전
일제 시대 일본인 사찰 조계사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동국대학교 안에서 정각원(正覺院)이라는 법당 .
이 건물을 제자리로 옮기려 했으나 건물이 낡아 이전이 어렵게 되자 원래 자리에 새 건물을 복원
인터넷
경희궁의 정전(正殿)이다.
숭정전은 조선 광해군에 지어진 것으로, 경희궁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
바위솔님작 감사합니다.
숙정전앞의 탑도
계단 가운데에는 봉황이 새겨진 답도(踏道)가 있고 그 양 옆으로는 돌짐승 모양의 소맷돌이 있다.
돌계단 하나 하나의 옛문양이 정겹기까지 하다.
바위솔님작 감사합니다.
눈부신 색깔로 채색된 숙정전의 천장에는 왕을 상징하는 용 두마리가 꿈틀거리고 있다
모든 것이 신비하고 신비로울 수록 더 허망한 세월을 숙정전 안
파란 하늘아래 새가 되어 양 날개를 활짝펴고 날아갈 듯한 자정전 인터넷
아마도 한옥이 이리 예쁜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건뭉에서만 볼수 잇는 것 같다.
인터넷
위치와 연혁 : 자정전의 정문이자 숭정전의 북쪽 문이다.
정조가 지은 「경희궁지(慶熙宮志)」에 “ 네 개의 문이 있으니, 동쪽을 여춘문(麗春門),
서쪽을 의추문(宜秋門), 남쪽을 숭정문(崇政門), 북쪽을 자정문(資政門)이라 한다
숭정전의 서북쪽에 있으며, 임금의 초상화(御眞)를 받들어 안치하던 건물이다. 인터넷
빨간색과 초록이 어우러진 단아한 건물
흘러다니는 구름 울 울창창한 나무가 어우러진 이곳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아한 풍취가 흐르고 있다.
영욕의 세월은 흘러
태녕전 건물 뒤에는 너른 뜰이 있어 꽃이 피어 만발하였어요
꽃이 어쩜 이리도 고을 까요
'화란 춘성하고 만화방창이라 때좋다 벗님내야 산천경개 구경가자'는
옛구절이 절로 나와 흥얼거리게 한다.
암천이라는 이상하고 큰 바위 큰
누렇고 커다란 두꺼비의 입을 하고 있다.
두꺼비 의 큰 입처럼 벌어져있고 그 벌ㅇ진 곳에는 샘물이 흐르고 있다.
큰 잎에 침 고이 듯한 곳에서는 지금도 졸졸 흐르는 물을 보고 왔다.
암천이러고 하는 샘이 있다.
태녕전 뒤에 이상하게 생긴 바위가 있으며 그곳에는 샘이 있어 맑은 물이 퐁퐁 솟았다고 하는데 인터넷
그 날에도 맑은 물이 흘렀다.
암천에 숙종대왕께서 쓰신 글인데 지금은 없다고 한다. 인터넷
태녕전의 정문이다.
“ 태녕전에는 다섯 개의 문이 있는데, 동쪽을 집화문(集和門), 또 그 동쪽을 건경문(建慶門), 인터넷
남쪽을 태녕문(泰寧門), 서쪽을 제광문(霽光門), 북쪽을 현무문(顯武門)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의 건물은 태녕전과 함께 복원한 것으로, 사당의 문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뜻풀이 : ‘태녕(泰寧)’은 ‘형통하고 평안하다’는 의미이다.
건물이 어진을 모시는 공간이므로 임금의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 인터넷
이곳에 영조어진이 있었다.
현판은 한석봉(韓石峯,) 글씨를 집자한 것.
서체는 초서(草書)임 인터넷
옛 글씨들은 대부분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써나갔는데
용비천은 특이하게 왼쪽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쓰여 있다
이는 용비천의 글씨가 근대 이후에 새겨졌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용이 살아 꿈틀거려 약동하며 날아오르는 듯한 글씨 자체가 예술이다
그렇지 않은가!!!!!!!!!! 낭만만 그렇게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경희궁의 우물터 인터넷
일제 강점기에 훼손된 다음 경희궁 터에는 정전이었던 숭정전의 기단부와 근처의 원래 자리에서 옮겨온
석수, 댓돌 등이 남아 있어 이 자리가 궁궐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경고장
이분 앞에 서면 절로 머리가 숙여지는 분
김구선생님 안두휘가 이곳에서 김구선생님을 저격한 곳이다.
일본인도 못 죽인 이분을 내나라 내동포가 죽이다니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1945년 임시정부를 세울때의 모습 애플잭님 사진
얼마나 좋으셨을까 그리도 광복을 원하시고 임시나마 정부를 세울 수 있으니...사진만 보아도 감개가 무량
홍난파의 가옥
홍난파가옥 문화유산으로 등재될 것이라고 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 불긋 꽃대궐 차린인 동네
그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예쁜 집에서 사셨기에 이렇게 예쁜 노래를 지으실 수 있는지
사랑스럽고 정겨운 동요다
속으로 살그머니 불러본다.
안에 들어가보니 눈매가 곱고 정이 많은 얼굴을 하고 계셨다
안에는 피아노와 쓰시던 가구 그리고 사진들이 있어 당시에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셨다.
홍난파는 식민지 시대에 우리의 심금을 울렸던 봉선화, 성불사의 밤 등을 작곡한 이로 친숙했던 이름이지만
친일활동으로 또 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한다
수백년된 거대한 은행나무로 행인동이라 하고
이곳이 바로 권률장군의 집터라고 한다
權慄 장군
임진왜란에 이치대첩지에서 불과 1,500여명의 군사로 15,000여명의 일본군을 무찌르고
일본의 전라도 공격을 저지했으니
독산성에 일본군을 맞아 승리하였고, 더불어 임진왜란 전쟁의 흐름을 완전히 우리 쪽으로
가져온 행주대첩 승전의 장본인이다
이 행주대첩은 한산도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
독립문 소리꾼님 사진
독립문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이 청나라의 책봉 체제에서 독립 한 것을 상징하기 위한
영은문을 무너뜨리고 그 터에
서재필의 주도로 건립되었으며
현판은 김가진의 작품이다.
독립문 전면에는 영은문이 서 있던 기둥 돌이 함께 남아 있다.
우리나라 주체성이 강조되는 독립문을 바라보니 후손으로 가슴이 뿌듯하다
달큐샤 인터넷 펌
미국의 기업인이자 언론인인 앨버트 테일러가 부인 메리 테일와 함께 살던 집으로 ‘앨버트 테일러
가옥’이라고도 부른다.
딜쿠샤는 앨버트 테일러가 직접 지은 이름으로 힌두어로 ‘이상향’ 혹은 ‘행복한 마음, 기쁨’을
의미한다.
은행나무가 좋고 인왕산이 좋고 그리고 높이 않아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주위 경관이 아름다워
이곳에 집을 짓고 영원히 살겠다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을 사랑한 여인이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무렵 테일러는 한국 민족대표 33명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입수했으며,
동생을 통해 몰래 독립선언서를 외국으로 보내 보도했고
일본군이 수원 제암리에서 주민들을 집단 학살한 제암리학살사건을 취재하는 한편,
일본 총독을 찾아가 조선인 학살에 대해 항의했다.
이런 사건들로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기도 했으며 1941년 자택 감금되었다가
1942년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테일러는 1948년 미국에서 사망한 이후 유언에 따라 서울외국인묘지공원에 안장되었다.
지기님 서울회장님 총무님 사진 찍어주신분 회원여러분 감사합니다
사진은 복사하고 그리고 해설등 거의 인터넷에서 펌 했다.
지금 그 여인의 아들이 서울시 문화제청에 보호해 줄 것을 청했고 손주가 두 부부의
일상품등 소장품을 서울시에 기증했다고 한다
2016년 4월 11일 낭만 작성
첫댓글 즐거운 역사 나들이 봄날씨에 피곤은 않하셨지요.
자세한 설명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못갔고 낭만님글 보며 해찬솔님과 갔든 그날을 되돌려 생각해 봅니다
고맙습니다
써주신주옥같은글읽고또읽어 마음에양식으로삼을레요. 감사^*^합니다
우리의 근대사를 조근조근 알기쉽게 말씀해주시니,
따라 읽으며 공부하는 재미도 있네요
고맙습니다^^
글을 잘 쓰시는 훌륭한
선배님 덕분에 역사공부
다시 복습하고 갑니다
행복한 월요일 저녁 되세요
다른때도 그랬었지만 정말로 이번 역탐방 복습에 많은 이해와 도움이 되어 감사 드립니다.
인터넷을 뒤져도 되겠지만 이처럼 조목조목 요약해 올려 주시니 편안하고 손쉽게 접할 수 있어
너무 좋군요. 다시한번 애 쓴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이번에도 낭만님 덕분에 생생한 역사공부를 잘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