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박노해
...
어둠 속에 길을 잃은 우리를 부르는
께로족 청년의 호롱불 하나
이렇게 어둠이 크고 깊은 설산의 밤일지라도
빛은 저 작고 희미한 등불 하나로 충분했다
지금 세계가 칠흑처럼 어둡고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세계 속에는 어둠이 이해할 수 없는
빛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거대한 악이 이해할 수 없는 선이
야만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정신이
패배와 절망이 이해할 수 없는 희망이
깜박이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토록 강력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 있는 사람
어디를 둘러 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여지지 않는 최후의 사람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기에
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
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지난 7월 사랑방인문학당에서 소개된 박노해 시인의 시입니다. 칠흑처럼 어둡고,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고 있는 현장을 직접 체험하고 바라본 시인은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히는 것은 등불 하나로 충분하다는 시인의 외침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전합니다.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 희미한 불빛만 잘 간직하고 있다면 우리의 희망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고, 우리의 삶은 기적이고 신비로운 인생을 살아내게 됩니다. 그 불빛을 간직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가치 있고 참으로 소중하게 여김을 받는 인생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불빛을 간직한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