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03 다해 연중18주일
호세 11:1-11 / 골로 3:1-11 / 루가 12:13-21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
오늘 복음을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집안 유산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유대교에서는 원칙적으로 율사가 유산문제의 판결을 내리지만 율사가 없을 때는 율법에 밝은 사람이 시비를 가려줄 수 있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형은 유산의 2/3를, 동생은 1/3을 차지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신명 12:17 참조) 이런 규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이 유산을 혼자 독차지하려고 했거나 자신의 몫보다 더 많이 차지하려고 해서 동생은 율법에도 해박하신 예수님께 중재를 요청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거절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마도 재산을 어떻게 나눠야 하는가 하는 개별적인 사안보다는 좀 더 근원적인 것에 집중하신 것 같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법률적인 계산으로 접근하시지 않고, 비유를 들어 하느님의 시각으로 이 문제를 좀 더 근본적으로 설명하십니다.
이 이야기에서 부자는 사기를 치거나 강탈하거나 매점매석 따위의 비도덕적인 방법으로 재산을 모으지 않았습니다. 그는 땅에 씨를 뿌리고 부지런히 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다행이도 날씨까지 도와준 덕에 그는 여러 해를 먹고도 남을 정도로 엄청난 수확을 거뒀습니다. 그래서 그는 큰 곳간을 새로 지어 거기에다 곡식을 쌓아두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제 몇 년 동안 걱정할 것 없다. 그러니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겨라”(루가 12:19)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제안하지만, 신은 처리한다(Man proposes, God disposes)’라는 서양 속담처럼 하느님은 만족해하는 부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루가12:20) 그리고 그날 밤 하느님은 그 영혼을 거두어 가십니다. 여기서 하느님이 이 부자에게 하신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에게 ‘이 나쁜 자야!’라고 하시지 않고, ‘이 어리석은 자야!’라고 하셨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는 남을 속이거나 남의 것을 뺏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근면하게 일해서 풍성한 결실을 얻는 본받을 점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가지 중요한 점에 대하여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재물이니, 오로지 자신만의 것이고, 그러기에 오로지 자신만의 행복을 위해 써야만 한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에 대하여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십니다. 그러면 하느님 앞에 부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그것은 재물뿐만 아니라 생명과 구원 그리고 그 밖에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믿는 자입니다. 이런 관점에 볼 때, 그 부자는 자신이 쌓은 재물이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복음 앞 부분에 어떤 사람이 자기 집안의 재산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했을 때, 예수께서는 그의 청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응답하시지 않는 대신에, 우리 안에 내재된 탐욕이라는 악의 뿌리를 경계하라고 하시면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통해서 탐욕이란 모든 부유함과 풍요로움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몰라보게 되고, 그리고 하느님이 맺어주신 내 이웃과도 담을 쌓게 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이처럼 탐욕이라는 담장과 창고는 스스로를 고립시켜서 종국에 가서는 나를 파멸로 몰아넣은 불행이 됩니다. 탐욕은 이처럼 우리 자신을 파괴시키는 무서운 악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전통적으로 탐욕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곱가지 죄 중에 하나로 여겼습니다. 참고로 칠죄종(七罪宗 Seven Deadly Sins)이란 교만, 탐욕 혹은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폭식, 나태로서 모든 죄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죄는 겉에 보이지 않는 뿌리와 같아서 우리가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죄는 영적성찰과 식별을 통해 찾아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이 탄식하신 대로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 하느님께 인색한 자로 살아갈 것입니다. 더 불행한 것은 우리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다면, 우리는 어리석고 그래서 인색하다는 사실도 모른 상태로 살다가 저 세상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불쌍한 인생이라고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인간의 욕망을 무한히 넓혀가라고 쉬지 않고 우리를 자극합니다. 그래서 과거엔 절약을 미덕으로 여겼다면, 지금은 자신의 발전을 위해 오히려 탐욕과 같은 강력한 욕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탐욕을 이루기 위해 극심한 경쟁속에서 승자가 되었건, 패자가 되었건 우리의 내면은 점점 병들어 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탐욕과 인색이 가져오는 병리적 현상인 이웃과의 단절과 그로 인한 고독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비참한 것은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하고,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사명을 갖고 있는 교회 역시 그 단절과 고독의 거대한 쓰나미에 휩쓸려서 점점 적막한 곳으로 퇴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2018년 영국정부는 외로움부(Ministry of Loneliness)를 신설해서 심각한 고독문제를 개인의 차원이 아닌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고, 정부차원에서 관련정책과 지원을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고독문제는 서구 선진국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 국가인 대한민국 역시 급격한 사회변화, 경쟁심화 등으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심각한 적색신호 상태에 빠졌습니다. 특별히, 1인 가구의 증가로 인한 고독감의 증가는 우울증을 비롯한 각종 정신질환과 자살이라는 극단적 사태로 우리를 내몰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축복하시는 하느님과 멀어져 가고 있는 사람들, 오늘 복음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들로 만연한 이 사회가 앓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하십니다: “여러분은 모든 세속적인 욕망을 죽이십시오. … 여러분도 전에 이런 욕망에 빠져 살 때에는 그런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 모두 버려야 합니다. … 여러분은 … 옛 생활을 청산하고 낡은 인간을 벗어버렸고 새 인간으로 갈아입었기 때문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된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골로 3:5-10)
종교학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신이교도주의(Neopaganism)가 발흥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당시 로마제국에 만연한 온갖 이교도 풍속과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상당수가 인간의 욕망이 투사된 것들로써 우리를 그릇된 길로 인도해서 우리가 하느님과 연결하여 새사람이 되는 것을 막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호세아 예언자는 그러한 이교도주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내 백성이 끝내 나를 저버리고 바알을 불러 예배하지만 바알은 저희를 높여주지 않으리라.” (호세 11:7)
이처럼 우리가 자신의 탐욕을 따라 하느님께 인색하게 굴 때에도 하느님은 오히려 마음 아파하시며 우리를 계속해서 부르십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너무 불쌍해서 간장이 녹는구나. 아무리 노여운들 내가 다시 분을 터뜨리겠느냐 … 나는 사람이 아니고 신이다. 나는 거룩한 신으로 너희 가운데 와 있지만, 너희를 멸하러 온 것은 아니다.” (호세 11:8-9)
하느님은 당신께 인색한 인간들이 겪고 있는 고독과 상처를 마음 아파하시면서 더 이상 두고 보고만 계시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된 우리는 더 이상 나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새 사람이 된 우리는 우리의 뿌리가 탐욕이라는 욕망에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사랑으로 창조하신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인색하거나 자신만의 창고 속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느님이 만드신 이 세상 한 가운데서 우리 이웃과 그리고 모든 생명과 더불어 살아가는 기쁨을 나누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총을 힘입어 이러한 이기적 욕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보혜사(保惠師, Paracletos) 성령은 우리 마음에 오셔서 우리를 인색함에서 벗어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나는 영적인 빈곤함에서 영적인 부유함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곳간에서 인심 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멀어질 때 내 영혼의 곳간은 빈곤해져서 인색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하나가 될 때, 내 영혼의 곳간은 풍요로워져서 넉넉한 사람이 됩니다. 사실, 그 곳간은 아빠이신 하느님의 곳간입니다. 하느님이 당신의 곳간을 상속자인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금요일부터 하는 전교인 수련회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풍성한 은혜가 있는 곳간에서 영적양식을 얻을 겁니다. 거기서 하느님을 닮아 관대하고 넉넉한 모습으로 변화되길 소망합니다.
풍요로움의 근원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