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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본여행 [J여동] 원문보기 글쓴이: 바이칼1
대마도 여행7 - 히타카츠에서 렌터카를 타고 산길과 바닷길을 달려서 에보시타케에!
어제 2024년 1월 25일 부산에서 NINA 호 를 타고 대마도 (對馬 쓰시마) 의 히타카쓰
(比田勝) 항에 도착해 hotel DAEMADO hitakatsu 에 체크인후.... 미우다
(三宇田) 해수욕장과 나기사노유(渚の湯) 에서 온천욕 까지 하고 하룻밤을 잤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니 창이 밝아오는지라 보니 창 밖으로는 히타카츠항이 보이고 바다 너머에서 하늘이 점차
붉어지는 장면인 일출 을 보고 텔레비전에서 한국 드라마 를 시청하고는 10시에 체크아웃을 합니다.
렌터카 를 인수하기로 한 시간은 10시 반인지라 “히토츠바타고 렌터카” 로 가서 차량을 인수하는데 여기
차량 이용자 대부분이 한국인 여행자인 탓인지 상호가 일본어나 영어가 아닌 한글 인게 인상적 입니다.
혹시라도 나중에 분쟁에 대비 하기 위해 회시측 사람과 또 우리도 차량의 외부를 살피면서 사진 을
찍는데...... 이게 나중에 서로 얼굴을 붉히지 않는 방법이며 또 타이어 공기압 도 살펴봅니다.
여기 렌터카는 차량에 기름을 완전히 만땅 으로 채워서 주어 좋은데 물론 나중에 차량을 반납
할때도 가득 채워야 하지요? 옛날에 그리스의 산토리니섬의 공항 에서 차량을 인수
했을 때와 또 그리스 로도스섬에서 페리로 터키 서부 마르마리스에 상륙해 렌터카 를
빌렸을 때는 기름이 거의 없는지라 길도 잘 모르는데 주유소 를 찾아 헤멘 기억이 떠오릅니다.
일본에서 자동차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운전석이 오른쪽 에 있는데.... 우리 손주가 하는 말이
조금 전에 보니 어떤 한국 사람이 차량을 인수하면서 왼쪽 창문을 열고
올라타서는 핸들이 없어 당황하는 모습 을 보았다고 신이 나서 말하기에 실소를 자아냅니다.
우리나라에서 자동차는 우측통행 인데 기차는 왜 좌측통행 일까요? 기차나 자동차
모두 영국에서 처음 만들어졌으니 당연히 2가지 모두 좌측통행 인데... 영국의
제도를 도입한 일본이나 홍콩, 태국과 싱가폴 등도 2가지 모두 좌측통행 입니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붉은 깃발법” 이라는 법률이 제정되었으니 자동차가 나옴으로써 실직의 위기
에 처한 마차 운전수 들이 데모를 하면서 자동차는 마차 보다 속도가 빨라서는 안되며 자동차
는 위험하니 그 앞을 붉은 깃발을 든 사람이 달려가면서 위험하니 피하라고 소리 치도록 했습니다.
이런 실정이니 현재 우리나라의 차량공유 서비스 “타다” 시태 와 같은 것인데.... 결국 영국에서는
자동차는 발전하지 못하고 후발주자인 미국이 자동차 산업 을 일으키면서 세계 표준 으로
성장했는데, 미국은 자동차를 우측통행을 실시한지라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도 일본을
따라 좌측통행이었지만..... 1945년 해방후 미군정이 3년간 실시되면서 우측통행 이 된 것 입니다.
일본에서 자동차는 우리나라의 좌회전과 우회전이 반대이니, 일본에서는 좌회전은 항상 할수
있지만 우회전은 신호를 받는게 정반대 인데.... 작은 네거리나 큰 도로에 진입할시
땅 바닥에 토마레 とまれ (토마레) 글자가 보이면 반드시 3초 정도 섰다가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이제 렌터카로 남쪽으로 달려서 이즈하라 로 가는데.... 지도를 보니 서쪽 그러니까 한국쪽으로 올라가서는
오른쪽에 대한해협 바다 를 끼고 남쪽으로 달리는데 길이 좁고 굴곡이 많으며 차량은 적은 편입니다.
대마도는 산간지역이 많아서 야생동물 을 조심할 필요가 있는데, 산간지역 도로에서 로드킬
당하는 동물과 같은 사례 말고도 특히 매를 조심 해야 하니... 쓰시마 곳곳에서 새매를
볼수 있으며 가장 번화한 곳인 이즈하라 시내 쪽에서도 매가 날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디고 합니다.
미우다 해수욕장 쪽에서는 매가 관광객의 음식을 노리고 급강하 해서 채서 달아나는 경우도
많고 이 과정에서 부리나 발톱에 할퀴어서 제법 큰 상처 를 입는 사람도 있으니.... 매가
날아다니는 곳에서는 가급적 야외에서 음식물을 먹지 말고, 미우다 해수욕장과 같은
곳에서는 휴게실이나 파고다와 같이 천장이 있는 구조물에서 음식물을 먹는 것이 좋습니다.
대마도는 동해의 입구 격으로 대한해협 (Korea Strait) 한가운데 에 있으니... 북쪽으로는 부산 해협(서수로
西水路, Western Channel, 조선해협) 남쪽으로는 쓰시마 해협 (현해탄/玄界灘/겐카이나다) 이 지나는데
일본에서는 남북 해협을 통틀어 쓰시마 해협이 정식 이름이고 부산해협(서수로) 을 조선해협으로 부릅니다.
쓰시마(對馬 대마도) 는 나가사키현에 속한 섬으로 제주도의 38% 에 고도 400m 산지라 농지가 적으니
인구 밀도가 낮다고 하니 도로에 교통량도 적은 편인데 북쪽 와니우라만 에는 조선국 역관사 순난비
(朝鮮國 譯官使 殉難之碑) 가 세워져 있습니다. 사진은 해외 나들이/일본(日本) 님의 글에서 가져왔습니다.
1703년(조선 숙종 29년) 음력 2월 5일 부산항에서 출항한 배 3척 이 있었으니, 정사 한천석 (韓天錫),
부사 박세양(朴世亮) 을 비롯한 108명의 역관사 (通譯官) 일행이 탄 사선(使船) 과 쓰시마번의
책임자 야마가와 사쿠자에몬 (山川 作左衛門) 이 방문을 위해 보내준 자신의 배와 예인선 이었습니다.
출항때는 날씨가 좋아 순풍을 타고 순조롭게 항해를 하였으나 정오가 지난 후 기상이 급변 하여 3척 모두
좌초 되었으니 쓰시마번과 마을 사람들이 구조와 수색작업을 벌였으나 생존자는 1명도 없었으니,
도착지가 눈앞에 보이는 와니우라(鰐浦:악포) 앞바다에서 전원이 사망하는 해난사고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 역관사 일행은 조선통신사와는 별도로 쓰시마 까지 100명 정도의 규모로 구성되어 파견된 통신사 사절로
에도(江戶)시대에 50회 이상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쓰시마번(對馬藩)의 경조사 시, 또는 한일 외교상
의견 절충이 필요할때 일본을 방문하여 한일 선린외교(善隣外交) 의 실질적인 중계자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사고 당일은 3대 쓰시마 번주(對馬 藩主) 요시마사(義成)의 장례 와 5대 번주 요시미치(義方)의 승계를 축하
하기 위해 방문하던 중이었는데, 1991년 3월 20일 한일건립위원회 가 이국의 바다에서 생을 마감한
역관사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조난현장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한국전망대 바로 옆)에 추모비를 세웠습니다.
그 옆에 한국 전망대 로 가는 길에는 1930년대 초에 대한해협을 지나는 선박을 감시하기 위한 거대한 도요
포대(豊砲台跡) 의 유적 이 있는데.... 일본 해군은 진해에도 포대 를 만들었으니 이 양 포대에 의해
대한해협을 지나는 배들을 통제 할수가 있었는데, 들어가기 전 입구에 불을 켜는 스위치를 찾아 올리고
들어가 볼수도 있다지만 그러나 우린 오늘 일정이 빡빡한지라 들러지 못하고 지나치는게 아쉽기는 합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 에 보면 낙랑군 남쪽 대방군(황해도) 에서 해안을 따라 물길로 가서 한국을 거쳐
때로는 남쪽, 때로는 동쪽으로 나아가면 왜의 북쪽 대안에 있는 구야한국(狗邪韓國) 에 도착하는데
대방군에서 7,000여리이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바다를 건너 1,000여리를 가면 대마국(對馬國) 에 이른다.
그 대관(大官)을 비구(卑拘) 라고 하고 부관(副官)을 비노모리(卑奴母離) 라고 한다. 살아가는 곳은
홀로 있는 섬으로 사방 400여리쯤 된다. 토지는 산이 많아서 험하고 우거진 숲이 많으며,
도로는 새와 사슴을 비롯한 짐승들이 다니는 길과 같다. 1,000여호 정도가 있으나 좋은
밭은 없다. 해산물을 먹고 스스로 생활하고 있으며, 배를 타고 남쪽과 북쪽으로 가서 곡식 을 사온다.
쓰시마섬은 서기 3세기 중반의 사실을 기록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 에 처음 언급되는 데, 야마타이국
(야마토 정권)의 간접 세력권 하에 있는 왜계 소국으로 소개된다. 그때도 이름은 대마국(對馬國)
이었으며, 대략 '두시마' 정도의 발음을 음차한 것이다 . 현재의 경상남도 거제시나 부산시
복천동으로 추정되는 독로국과 김해시로 확실시되는 구야국(금관국)에서 바닷길로 접한다고 나옵니다.
쓰시마가 태초부터 왜국(야마토 조정) 의 직접 지배 영역은 아니었을지라도, 한반도 보다는 일본열도
와의 역사적 연결고리 가 더 깊었음은 분명한데, 이는 8세기에 저술된 고사기의 야시마 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유추가 가능합니다. 영토 관념이 모호하던 상고 시절 일본어족 화자들이
쓰시마에 자리 잡았으며... 이는 훗날 쓰시마가 일본령으로 자연스레 편입되는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은 수도를 아스카에서 후쿠오카로 옮기고 풍왕자에게 5천 왜군 을 주어 한반도로 나가
백제 왕위를 잇게 한후, 다시 3만 대군을 1천척 배 에 태워 보냈으나 금강하구에서 당나라 수군의 화공에
패해 쫃겨오니 일본 조정은 667년 11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일본 열도 역습을 대비해 피란온 백제인
들을 동원해서 서쪽 각지에 쌓은 이른바 조선식(백제식) 산성 가운데 하나인 가네다 성(金田城) 이 있습니다.
신라구(新羅寇) 가 활발하던 시절에 대마도는 규슈와 함께 습격 받았으며 고려시대 초기에는 함경남도에
수백년간 거주해온 여진족 해적들 까지 쓰시마를 공격(도이의 입구) 했는데.... 고려시대에 원나라가
고려군을 앞잡이로 세워 침공한 일본원정 때는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친 곳이 쓰시마 입니다.
차는 와니우라를 뒤로하고 좌회전을 하니 이제는 가미 쓰시마 가 아닌 가미 아가타 로 접어드는데, 쓰시마
는 산지가 대부분이니 평지가 거의 없어 농업 생산성이 떨어졌고 인구도 적은 척박한 섬이라.....
기록상 옛날부터 왜국계 거주민이 있었지만 본토에서는 외국처럼 묘사하면서 변방 외지 로 취급했으니
봉건제도 느슨한 복속관계만 맺으며 자치를 하고 있었고, 조선 정부는 대마도를 경상도 관할 로 여겼습니다.
반면에 대마도 토착세력은 일본 본토에 꽤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니..... 대마도는 평상시 고려, 조선국
의 물품을 수입하여 일본 본토 에 넘겨 이득을 보았고, 식량이 부족하면 조선에서 원조 를 받거나
왜구가 되어 한반도를 600차례나 약탈 했는데 고려와 조선은 생산성이 떨어지는 땅에 일본민족이
살고 있으니 일본의 가신이자 조선의 신하 라는 대마도주의 이중적인 지위를 인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마도는 일본에서도 드물게 전란에 휘말리지 않고 평온 하게 지낼 수 있었으니... 가마쿠라 막부 때
부터 영주였던 쓰시마 소(宗) 씨가 하극상의 시대인 센고쿠 시대를 거쳐서 700년이 지난 메이지
덴노 시대까지 별 문제 없이 집권하고 있었을 정도로, 조선 시대 초기 대마도 정벌 이후로는
쓰시마가 군사 공격을 받은 일은 전혀 없었으니 제2차 세계 대전과 6.25 전쟁시기에도 평온했습니다.
소씨의 기원 은 헤이안 시대의 호족인 고레무네(惟宗) 이니 외부(일본열도)에서 쓰시마섬으로 들어와
기존의 세력이었던 아비루 씨를 누르고 섬의 권력을 장악했는데.... 저 아비루 씨도 소 씨와
마찬가지로 외부로 부터 유입된 세력인데,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가즈사(上總)의 아비루군(畔蒜郡)
에서 쓰시마로 건너왔으며 아비루씨는 섬의 유력자로 남았고, 지금도 쓰시마에서 가장 많은 성씨입니다.
헤이안 시대 중기에 쓰시마의 카미(守, 태수) 로 부임해 있던 미나모토노 요시치카(源義親) 가 쓰시마 에서
관물을 횡령하고 백성들을 약탈 한다는 고발을 받았는데, 이 요시치카의 아버지가 당시 무사들의 신망을
한몸에 받으며 하치만타로(八幡太郞) 라 불리던 가와치 겐지의 수장 미나모토노 요시이에 (源義家) 였습니다.
요시치카는 요시이에의 둘째 아들로써 아버지 못지 않은 무력으로 명성이 자자했고, 조정에서는
요시치카 회유를 위해 요시이에의 가신이었던 후지와라노 스케미치 (藤原資道) 를
보냈지만 스케미치는 그대로 눌러 앉아 요시치카와 함께 관리를 죽이는 등의 범죄 를 저지릅니다.
결국 요시치카는 소환 및 오키(隠岐) 유배 라는 처벌을 당했는데, 유배지로 가지도 않고 이즈모
(出雲) 로 건너가서는 현지 지방관을 죽이고 관물을 약탈하는 등의 악행을 일삼았으니.....
결국 일본 조정은 이세 헤이시의 다이라노 마사모리(平正盛) 를 시켜 요시치카를 토벌하게 합니다.
이 마사모리가 바로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할아버지 이니, 무사들의 신망을 얻고있던 하치만타로
요시이에의 아들이자 천하 제일의 무용을 가진 것으로 이름높던 요시치카가 조정의
명을따르지 않고 반란 을 일으켰다가 토벌당한 것은 가와치 겐지의 체면을 구기는 것이었고
세력이 꺾인 겐지(源氏) 를 제치고 헤이시(平氏)가 무사 가문 으로써 대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신라)왕 은 왜인이 대마도(對馬島)에 군영 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쌓아 우리를 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서, 그들이 일을 일으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정예 군사를 뽑아 적의 진영을 격파하고자 하였다.
서불한 미사품(未斯品) 이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무기는 흉한 도구이고 싸움은 위험한 일이다' 라고 합니다.
하물며 큰 바다를 건너서 남을 정벌 하는 것은 만에 하나 이기지 못하면 후회해도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험한
곳에 의지하고 관문을 설치하여 오면 곧 막아서 침범하지 못하게 하고, 유리해지면 곧 나아가 그들을
사로잡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남을 유인하지만 남에게 유인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가장 좋은 계책입니다." 라고 하니, 왕이 그 말에 따랐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실성 마립간 7년(408년) 2월 기사
쓰시마 섬은 산이 많고 농토가 적어 이곳의 주민들은 주변 지역에서 식량을 조달해 생활했다. 야마토가
급속히 성장하고 신라와 대립이 심해진 5세기 초에는 군사적인 전진 기지 역할을 한 적도 있었으나,
실성 마립간 시기에 풍도 해전에서 왜군이 박살 나면서 소강 상태에 들어간 듯하다. 단 고대의
왜군은 후대 왜구가 임진왜란을 제외하면 큰 해적이었던 것과 달리 일본 관군의 성격 을 띤 경우도 많았다.
조선시대 동사강목에 태종 무열왕이 이곳을 정벌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무열왕의 대마도 공격은 고려 이전
의 기록에서 교차검증되는 부분이 아니라 큰 주목을 받진 못하고 있고 조선시대에 그런 전승이 전해지고
있었다는 근거는 된다. 이 때 무열왕이 중간 진지로 쌓고 주필(駐蹕) 한 곳이 부산의 태종대 라고 되어 있다.
통일신라 말기부터 후삼국시대 전반부 까지 신라구(新羅寇 신라해적) 가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에는 일본 본토
까지도 신라인 해적이 쳐들어갔지만, 역시 가장 많이 습격당한 곳은 한반도와 가까운 쓰시마 였다. 후백제
의 사절단이 쓰시마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는데, 이처럼 쓰시마는 일본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같은 역할을 했다.
이런 옛날 기록들을 생각하면서 근 한시간을 달리니.... 이제 가미 아가타 를 지나 미네마치(峰町) 로 접어
드는데..... 가미 쓰시마에 나기사노유 온천이 있었다면 여기 미네마치에는 호타루노유온천
(ほたるの湯) 이 있으니.... 탕과 내부는 삼나무로 꾸며져 있어 이국적인 분위기를 느낄수 있다고 합니다.
이 지방에 엔쓰지(円通寺) 라는 절이 있으니 1397녀경부터 소 사다시게에서 사다모리와 시게토로오 이어지는
3대 도주가 여기 정착 하니 무사와 상인들이 모여들어 성시를 이룬지라 무로마치 시대 대마도의 도읍
이니 마을이 번성하면서 1408년 7대 도주 소 사다모리가 지은 저택이 그후 소씨의 보리사 로 변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조금 더 남쪽으로 달리니 바다에 도리이가 2개 가 서있는데 지도를 꺼내 확인해 보자니....
위치로 보아 저건 와타즈미신사 가 아니라 가이진진자(海神神社 해신신사) 인 듯 한데
대마도에서 유명한 신사로 이즈하라의 시모쓰하치만구 신사에 대해 가미쓰하치만구 로 불렸답니다.
1871년 5월 국가에서 직접 관리 하는 관사(官社) 로 국폐중사(國弊中社) 로 지정되었다고
하며 바다의 수호신 인 도요타마히메노미코토 (豊玉姬命) 를 주신으로 모시는
지라 해신신사(海神神社) 라고도 하는데.... 여기가 일몰 Sun Set 이 매우 유명하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차는 조금 더 달려서 언덕 으로 올라가서는.... 드디어 에보시타케 전망대 에 도착하는데
주차장에 차를 대고는 200여개 정도의 가파른 계단 으로 산을 올라 전망대 에 올라섭니다.
산 정상의 전망대 는 탁 트인지라 360도 파노라마 를 볼수 있으니..... 쓰시마 북섬과
남섬 사이에 바다인 아소만 을 내려다 보노라니 가히 절경 이라고 할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