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골(竗里)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육신사길
묘리에는 등실등실한 골기와집이 처마를 맞대고 있다. 이곳은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인 순천박씨들의 세거지이다. 1972년 기초공사를 시작해 1981년 완공한 건물로 외삼문, 삼충각, 숭절당 등이 들어서 있다. 사육신의 행적을 기록한 육각기념비와 박일산이 창건한 태고정(보물)이 눈길을 끌고있다. 이외에도 7대손 숭고(崇古)가 1644년에 세웠다는 충효당, 8대손 중휘(重휘)가 1664년에 세웠다는 금서헌, 14대 후손 문현(文鉉)이 1778년에 세웠다는 도곡재(무형문화재) 등이 있고, 묘골입구로 나와서 오른쪽 지름길로 작은 고개를 넘으면 박팽년의 자손들이 살았던 곳이며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는 묘동 박황(妙洞 朴湟)가옥, “삼가헌”(三可軒)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이 집은 박팽년의 11대손 성수(聖洙)가 지은 것으로 삼가헌이란 당호는 박성수의 호를 딴 것이라 한다. 그 집에 딸린 하엽정(유형문화재)에는 여름이면 연꽃이 만발한다.
육신사(六臣祠)
소재지 :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육신사는 조선 세조 때 사육신으로 일컫 는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등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처음 사당을 지을 때는 박팽년(醉琴軒 朴彭年) 선생만을 모셔 제사 지냈으나, 선생의 현손인 박계창이 선생의 기일에 사육신이 사당 문밖에서 서성거리는 꿈 을 꾼 후로 나머지 5위의 향사도 함께 지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숙종 17년인 1691년 낙빈사를 지어 이 들을 봉안하고 제사 지냈으나, 서원철폐 령으로 낙빈사가 서원과 함께 철거 되었 으며, 1924년 낙빈서원이 재건되면 서 위패를 다시 봉안하게 되었다.
1974년부터 1975년 사이 [충효 위인 유 적정화사업]에 의해 현재의 위치에 육신 사로 이름을 붙여 재건하였고, 2003년 부터 2011년에 걸쳐 충절문을 세우고 건물을 복원하였다.
이후 향사는 육신사에서 지내고 있다.
현재 육신사에는 숭정당, 숭절당, 사랑 채, 외삼문, 내삼문 등의 건물과 보물 제 544호로 지정된 달성 태고정과 태고 정 안채 등이 남아 있다.
달성 태고정은 1479년 박일산이 태건립 한 것으로 종택 에 딸린 별당 건물이다.
이 밖에 사육신 육각비를 비롯하여 박정 희 대통령, 최규하 대통령, 박준규국회의 장의 기념 비석, 헌성 방명록 비, 제13· 14· 15대 국회 의장 송산 박준규 생가터 표석 등이 세워져 있다.
묘골 아름 마을 입구에는 사육신 기념관 이 있다.
태고정(太古亭) 보물 제554호(1971년 12월6일 지정)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
달성 태고정은 조선 성종 10년(1479) 박팽년의 손자인 박일산이 세운 별당건축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서 일부만 남았던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지은 것이다.
항상 바르고 올곧게 살자는 뜻에서 일시루라고도 한다.
대청에는 윤두수의 한시를 새긴 현판과 정유재란 후 이곳에 온 명나라 선무관이 남긴 현판 등이 걸려 있다 네모난 모양의 단 위에 서 있으며 앞면 4칸 ·옆면 2칸 크기로, 동쪽 2칸은 대청마루이고, 서쪽 2칸은 방으로 꾸몄다.
대청 앞면은 개방되어 있는데 옆면과 뒷면에는 문을 달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청 앞 기둥 사이에는 2층으로 된 난간을 설치하였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이지만 가구나 세부 가공이 정교할 뿐만 아니라 초익공계의 정교한 가구 구성을 갖추었기에, 건축사적 가치를 지닌 건물로 평가되고 있다.
태고정 주변으로 도곡재와 육신사, 충효당이 있으며 사육신기념관을 방문하여 사육신과 박팽년에 대한 전시 및 영상 자료를 관람할 수 있다.
도곡재(陶谷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