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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1일 화요일 [(백)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교회는 해마다 1월 1일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성모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를 뜻하는 ‘천주의 성모’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부여한 것은 에페소 공의회(431년)이다. 지역마다 서로 다른 날짜에 기념해 오던 이 축일은 에페소 공의회 1500주년인 1931년부터 세계 교회의 보편 축일이 되었고, 1970년부터 모든 교회에서 해마다 1월 1일에 지내고 있다. 또한 바오로 6세 교황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1968년부터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세계 평화의 날’로 정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는 평화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통하여 하느님께 평화의 선물을 청한다. 오늘 전례 ▦ 오늘은 2019년 새해 첫 날입니다. 우리는 해마다 새해 첫 날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냅니다. 올해도 한결같이 우리 신앙의 모범이신 성모 마리아를 본받아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로 다짐하고, 세계 평화를 기원하며 성모님의 전구를 청합시다. 주님께서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고 모세에게 이르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셨다고 한다(제2독서). 목자들은 베들레헴으로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복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 민수기의 말씀입니다. 6,22-27 22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24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25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26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27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게 하셨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4,4-7 형제 여러분, 4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5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6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7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찾아냈다. 여드레 뒤 그 아기는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6-21 그때에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16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17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18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19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20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21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목자들은 천사들의 인도로,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아기 예수님을 알현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그런 특별한 은총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하고 기쁨에 넘쳐 찬미 찬양하며 돌아갑니다. 그때 세상에서 그들만큼 행복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왜 베들레헴의 수많은 사람들은 이 목자들이 느끼는 기쁨을 맛볼 수 없었을까요? 베들레헴 사람들은 천사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일 만큼 한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빴습니다. 바쁘면 들리지 않습니다. 땅에 정신이 팔려 하늘의 천사의 외침이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땅에 참된 기쁨이 있었다면 하늘에서 기쁨이 내려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모세를 보내시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내리십니다. 제2독서에서도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파견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해 주셨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만큼 기쁜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기쁜 소식에 관심이 없습니다. 더 큰 기쁨이 지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돈, 명예, 성공, 쾌락 등이 이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지상의 헛된 기쁨으로 천상의 참된 기쁨을 포기하며 살아갑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유일한 기쁨을 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목자들처럼 세상 것에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가난한 마음’만 있다면, 저 교회에서 들려오는 복음의 외침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땅에서 기쁨을 찾을 수 없을 때 하늘을 바라봅니다. 이것이 마음의 가난함입니다. 가난한 이들만 하늘 나라를 차지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마리아입니까?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모님은 신화적인 인물이 아니라, 개인적인 역사를 지닌 참 여인이셨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전해진 ‘수태고지’란 엄청난 초대 앞에, 마리아는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온 몸으로 떨었을 것입니다. 요셉과 꿈꾸던 단란한 신혼생활을 접어야 하는 데서 오는 서운함에, 눈물도 흘렸을 것입니다. 나자렛의 한 처녀가 나름 계획하고 있었던 인생에 대한 소박한 기대와 희망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도 컸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마리아의 ‘Fiat’에서부터 시작해, 영광스런 승천을 통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기까지의 여정은 고달프고도 험난했을 것입니다. 소년 예수님을 양육하는 과정에서 목격하게 된 정말이지 이해하기 힘들었던 수 없는 사건들 앞에서, 성모님께서 느꼈던 난감함과 당혹스러움은 참으로 큰 것이었습니다. 때로 비수처럼 느껴지던 아들 예수님의 말씀 앞에 인간적인 상처도 많이 받으셨을 것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오 복음 12자 48절)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복음 2장 49절)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복음 2장 4절) 예수님과 함께 시작된 성모님의 신앙 여정은 약간의 힌트라든지, 사업계획서라든지, 로드맵 같은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었습니다. 언제, 무엇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 것도 명백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안갯속을 걷는 불확실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엄청난 도전 앞에 뒷걸음질치지 않았습니다. 불확실한 초대였지만 물러서지도 않았습니다. 회피하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었지만, 기도하면서, 희망하면서 당당히 직면했습니다. “그래 지금은 내가 부족해서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지만, 주님께서 언젠가 내 눈을 밝혀주실 것이다.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되겠지.” 그렇게 성모님은 오로지 주님께 의지하고 신뢰하면서, 하루하루 살얼음판 같은 여행길을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평생에 걸친 철저한 순명으로 당신의 뜻을 너그럽게 수용하시며, 당신의 인류 구원 계획에 충실하게 협조한 마리아를 ‘천주의 어머니’요 ‘교회의 어머니’ ‘인류의 어머니’로 높이 들어올리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성모 신심과 관련해 우려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성모님, 성모님! 하고 외치다보면, 참 하느님이시요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위치를 손상시키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입니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두려움입니다. 성모님 옆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계십니다. 성모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성모님의 신비를 이해하면 할수록 예수님의 신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깊어질 것입니다. 성모님이 공경받으실 때, 그것은 아들 예수님께 영광이 됩니다. 성모님이 찬미받으실 때, 그것은 아들 예수님께 영예가 됩니다. 두 분을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 속에 계십니다. 인류 구원 사업이라는 사명과 운명을 공유하신 분들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에 대한 제2차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을 늘 염두에 둬야겠습니다. “신앙과 사랑과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일치에 있어서 천주의 어머니는 교회의 모델이십니다.”(교회 헌장 63항) 오늘도 성모님을 잘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따집니다. “빨리 선택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마리아입니까?” 성모님은 인류 역사상 모든 신앙인들 가운데 가장 완벽하고 모범적인 신앙인이어서 우리는 그분을 공경합니다. 성모님은 오랜 교회 역사를 빛낸 수많은 성인성녀들 가운데 첫째 가는 성녀요, 가장 빛나는 별이기에 우리는 그분을 사랑합니다. 성모님은 몸소 예수 그리스도를 낳아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것을 칭송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잘 실천하셨음을 더욱 칭송합니다. 천주의 어머니이며 동시에 이 세상 모든 나그네들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나몰라라 하지 않은 성모님께서, 올 한해 우리 나라와 모든 가정, 모든 공동체를 보호하시고, 좋은 길로 인도해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어머니의 자격>
더운 여름에 세계 곳곳에서 아이를 차에 방치해 두어 아이가 사망하는 사고가 종종 발생합니다. 이에 우리나라 한 초등학생 아이가 그런 아이들이 불쌍해 한 앱을 개발하였습니다. 아이가 차에 그대로 있는 채 차 밖으로 나가면 핸드폰에 알람이 울리게 하여 아이가 차 안에 있음을 알려주는 어플리케이션인 것입니다. 그 아이가 이 일로 발명왕 상을 받은 후 정말로 이런 기능을 갖춘 차량들이 출시되었습니다.
물론 이 아이가 아니더라도 그런 장치가 장착된 차량들이 나올 수는 있었겠지만 그래도 자신과 같은 아이들에게 더 이상 안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그런 장치들을 개발해 낼 수 있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그 아이의 머리가 뛰어난 것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 아이는 아이지만 엄마의 마음을 벌써부터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어머니는 아이를 차에 방치해 두지만 어떤 아이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기계를 발명합니다. 누가 더 어머니의 자격이 있을까요?
어머니의 자격 중 가장 중요한 자격은 모성애입니다. 남성은 밖에서 일을 하고 밖에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어머니만큼 자녀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한 시도 자녀에게 눈을 떼지 않아야하도록 모성애를 지니고 있습니다. 모성애가 있어야하는 이유는 아이가 어머니의 관심이 없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아주 약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한 시도 신경을 떼지 말도록 만드는 모성애가 어머니의 가장 큰 자격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새해 첫 날 성모 마리아 축일로 지내는 것만큼 적당한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 아드님의 어머니가 되신 이유는 그 자격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자격은 자녀의 존재를 잊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세상 누구도 갖지 못했던 이 모성애를 성모 마리아만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 매우 강력한 모습으로 거하시지 않고 그저 마구간의 힘없는 아기처럼 거하십니다. 그러니 내가 신경써주지 않으면 예수님은 내 안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고 그렇게 시간이 너무 흐른다면 돌아가실 수도 있습니다. 성체를 영해도 모든 사람이 구원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신경써주지 않으면 돌아가실 수도 있는 매우 약한 모습으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잘 지켜낼 수 있을 때 그분이 지닌 영원한 생명도 내 안에서 지켜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체를 영하더라도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 자주 잊어버립니다. 이것이 성모 마리아와 다른 점입니다. 한 순간도 그분의 현존을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을 때 성모님처럼 누군가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덕분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분을 모실 자격을 갖춘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우리 노력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목동들이 아기 예수님을 보고 기뻐합니다. 그 이유는 아기 예수님이 강력해서가 아닙니다. 구세주께서 살아‘계심’을 보고 기뻐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엘리사벳과 그 태중의 아기가 기뻐 뛰놀았습니다. 자신들에게 큰 보화를 줄 분이 오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구원자께서 한 인간 안에 잉태되어 ‘계심’ 때문이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그리스도의 ‘현존’을 지켜줄 수 있는 모성애가 있어야 주위 사람들에게도 기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분의 현존을 잊고 내가 아무리 누군가에게 잘해줘 봐야 고생만 하고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저는 신학생 때부터 주님의 현존을 잊지 않기 위해 손에 묵주를 쥐고 다녔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축구를 할 때도 심지어 술집에 가도 묵주를 쥐고 있었습니다. 묵주 때문에 조금 불편함을 느낄 때마다 주님의 현존을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된 이후로는 교만해져서 그런지 그냥 그분의 현존을 느끼며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것들에 너무 정신이 팔려 주님의 현존을 잊고 사는 시간이 매우 많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즘 다시 손에 자그마한 묵주를 쥐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에 맞춰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그 시간을 통해 주님의 현존을 규칙적으로 되새길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현존을 위해 우리처럼 약한 사람들은 손에 그분의 현존을 알려주는 어플 하나 정도는 지니고 다닐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핸드폰이 있나 없나를 신경 쓰는 반 정도만 그분의 현존을 기억해 낼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 해를 시작한다면 우리 성탄 때 만났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함께 살아가시며 나와 이웃들에게 행복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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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성 풀젠시오 (Fulgentius)
신분 : 주교 증거자
활동지역 : 루스페(Ruspe)
활동연도 : 467-533년
같은이름 : 풀젠시우스 풀젠티오 풀젠티우스 풀겐티오 풀겐티우스
카르타고(Carthago)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파비우스 클라우디우스 고르디아누스 풀겐티우스(Fabius Claudius Gordianus Fulgentius, 또는 풀젠시오)는 어머니가 과부가 되면서부터 가문의 영지를 관리하였는데, 그의 탁월한 능력은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훌륭한 교육을 받았던 그는 카르타고의 재무관으로 임명되었으나 2년 후에 사임하면서부터 정통파 주교인 파우스투스(Faustus)가 지도하는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507년 그는 루스페(오늘날 튀니지의 쿠디아트 로스파)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 당시에는 아리우스파(Arianism)인 반달족(Vandals)이 북아프리카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통파 주교들이 사르데냐(Sardegna) 섬으로 추방당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그런대로 교구를 다스릴 수 있었다.
그는 사르데냐 섬의 칼리아리(Cagliari)에 유배된 동안에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반달족의 왕인 트라시문드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왕은 그의 입장을 이해하고 아리우스파 성직자와의 토론회를 주선하였으나 풀겐티우스의 영향력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518년에 사르데냐 섬으로 다시 추방해버렸다.
그 후 왕의 후계자인 힐데릭이 귀향을 허가하여 정상적으로 집무하였는데, 그의 재임 기간 대부분은 유배생활로 보냈다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신자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그의 이름만 들어도 아리우스파 성직자들은 겁을 내었다.
그는 아리우스(Arius) 이단을 배격하는 위대한 신학자이자 사목자였다.
그 후 그는 시르시니아(Circinia) 섬에 있는 수도원으로 은거하였다가 루스페로 돌아온 얼마 뒤에 운명하였다.
성 그레고리오 (Gregory)
신분 : 주교
활동지역 : 나지안주스(Nazianzus)
활동연도 : +374년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는 그의 생애 중 처음 50여년간을 이교도로서 보냈고, 성년의 대부분은 정부의 관리로서 지냈다.
그는 성녀 논나(Nonna, 8월 5일)와 결혼하였고, 그녀는 325년에 그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성 그레고리우스(1월 2일)와 성 카이사리우스(Caesarius, 2월 25일) 그리고 성녀 고르고니아(Gorgonia, 12월 9일)의 아버지인 그는 328년에 나지안주스의 주교가 되었다.
주교가 된 후 그는 이단적인 그리스도교의 분파에 빠져들었으나 361년 그의 아들 성 그레고리우스에 의해 정통 신앙으로 되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