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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2. 묵상글 ( 연중 제18주간 토요일. - 믿음을 청하는 기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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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2. 연중 제18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믿음을 청하는 기도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고,
그것은 믿음이 약한 탓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믿음이란 자신에 대한 믿음 곧 자신감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일 테고 그러니 믿음이 약했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약했다는 것이요,
무엇보다도 악마 앞에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약했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쩌자고 악마 앞에 있는 것입니까?
사실 악마 앞에 있는 것부터가 문제이고,
믿음이 약한 사람의 가장 큰 문제는 악마 앞에 있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환난이 닥치거나 우환이 생길 수도 있고,
그때 마음이 허해지고 정신이 약해지기도 쉬운데
바이러스가 몸이 약하고 면역력이 떨어질 때 쉽게 침입하듯이
이때가 악의 세력 또는 악마의 먹잇감이 되기 제일 쉬운 때입니다.
이때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께 매달려야 하는데
용한 점쟁이나 무당이 있다고 하는 등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이 있으면
거기에 혹하고 넘어가고 하느님을 저버리는 것이지요.
어쨌거나 악마 앞에 있는 이상 악마에게 사로잡히는 것은 불가항력적입니다.
이것은 마치 쥐가 고양이 앞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옴짝달싹 못하고 하느님이 옆에 계셔도 시선을 돌리지 못합니다.
이미 악마 앞에 있기에 옆에 계신 하느님께 시선을 못 돌립니다.
그러므로 누가 이 지경이 되면 옆에서 그를 빼 내줘야 하는데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는 그럴 힘이 없었고,
주님께만 그럴 힘이 있기에 마귀병자의 애비는 주님께 달려옵니다.
제자들에겐 체면 구기는 일이었지만
이때 제자들은 얼른 자기들에게 구마(驅魔) 능력이 없음을,
아니, 주님 말씀대로 믿음이 없음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믿음은 가능성을 보고 가능성 있는 쪽을 보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믿음은 개방 곧 가능성에 문을 여는 것입니다.
마귀병자의 애비는 제자들에게는 가능성이 없고
주님께 있음을 보고 얼른 주님께 달려와 문을 열었는데
이것이 믿음이고 이 믿음의 문으로 치유의 힘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마태오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같은 내용의 다른 복음 곧 마르코복음에는
기도하지 않고는 마귀를 쫓아낼 수 없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두 복음을 합쳐서 볼 때
주님처럼 치유의 힘이 있어서 직접 마귀를 쫓아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제자들처럼 그럴 힘이 없으면 주님께서 치유해주시길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이고,
기도한다는 것 또한 주님께 그 힘이 있음을 오늘 복음의 애비처럼 믿는 것이지요.
아무튼, 우리는 믿음을 주십사고 청하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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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2. 연중 제18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예수님께서 산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모’하신 후, 산을 내려오시어 군중에게 가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무릎을 꿇고 말하였습니다.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간질병에 걸려 몹시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마태 17,15-16)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를 개탄하시면서,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주어야 한다는 말이야?”(마태 17,17)라고 하십니다. “언제까지”라는 표현은 당신 수난의 시간에 대한 급박감을 드러내줍니다.
특별히 여기서는 ‘비뚤어졌다’는 말과 ‘믿는다.’는 말이 대조를 이루는데, ‘비뚤어졌다’는 것은 <신명기> 32장 5절에서 모세가 말해주듯이, 주님을 향하지 않아 비뚤어졌기에 우상숭배에 빠짐을 말합니다. 곧 주님께 속하기보다 우상을 소유하고 자신이 주인이 되고자 함을 말해줍니다. 반면에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무능과 한계를 인정하기에 전능하신 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임을 뜻합니다. 곧 ‘비뚤어졌다’는 것은 주님을 믿으려 하지 않음이요, 그 결과 병을 치유하지 못하는 무능력임을 말해주는 반면, ‘믿는다.’는 것은 주님을 받아들임이요, 그 결과 병을 치유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못할 일은 하나도 없는”(마태 17,20) 전능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마태 17,19) 하고 묻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그렇습니다. 믿음이 약한 탓입니다. 믿음이 작아서가 아니라, 약해서입니다. 곧 믿음의 지향이 흐트러진 것입니다. 지향이 올바르면, 곧 자기 자신이가나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롯이 주님을 향하여 있으면,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도 굳세어지고 강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마태 17,20).
그런데 우리는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어버리는 바람에 주님을 향한 믿음이 약해져 버립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무능한 자신을 믿으면 무능해질 것이고, 전능하신 그분을 믿으면 전능해질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주님!
제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기보다, 당신 뜻에 합당하게 하소서.
당신을 통해 제 뜻을 이루기보다, 당신 뜻을 알아듣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과 함께 하고, 먼저 기도하게 하소서!
힘을 주시는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하소서.
모든 것 안에서, 당신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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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2. 연중 제18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인간적인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하시며 불평을 털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사람들의 불신의 태도에서 왔습니다. 당신의 구원 활동에 대해 배은망덕한 대접을 받는 것에,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히브5,7). 예수님께서는 모든 능력을 지니고 계시고 불가능이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슬픔과 충격에 무감각하지 않으시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주심은 우리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우리의 눈높이로 품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내신 예수님께 와서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하고 말씀하시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능력은 믿음 안에서 옵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주님의 능력이 살아나고 기적을 가능케 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 배를 떠나 물 위를 걸었습니다. 완전한 신앙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 능력을 주십니다. 아니 나를 통해 주님의 능력을 드러내시길 원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어떠한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주님을 믿고 바라보면 길이 열립니다. 그러나 믿지 못하면 고통만 키우게 됩니다. 바오로사도의 말씀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피1,29).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마태28,20)을 믿어야 합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믿음에 믿음을 더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분명히 그 믿음이 헛되지 않음을 믿는 만큼 체험케 될 것입니다. 확고한 믿음은 외적인 상황에 따라 약해지거나 타락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음식을 나누시고 앞 못 보는 이의 눈을 침을 발라 뜨게 하셨으며 때로는 병자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셨고 믿음으로 구하는 곳에는 어디에든 계셨습니다. 성전 정화를 위해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마태21,12), 단호한 모습을 보여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지니셨으면서도 그것을 뽐내지 않으시고 필요한 이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며 기쁨이 되어 주셨으며 모든 사람의 구원이 되셨습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오신 주님의 품을 기억하며 우리도 이웃을 향한 눈높이를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는 외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단지 내가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주님의 동행을 믿으며 나에게는 엄격하되 이웃에게는 한없이 넉넉하길 소망해 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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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2. 연중 제18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중학교 때입니다. ‘우등생 교실’이라는 과외공부를 하였습니다. 선생님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선생님의 말씀은 46년이 지났어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습니다. 선생님은 3가지 부류의 사람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난사람’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목적은 남들보다 잘 살기 위해서입니다. 공부를 하는 목적은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사람을 ‘난사람’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든사람’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목적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아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는 목적은 배움을 통해서 삶의 이치를 깨닫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식별할 줄 아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된사람’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목적은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목적은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이왕이면 난사람보다는 든사람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든사람이 되었으면 된사람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영어의 문법과 수학의 공식은 다 잊어버렸는데 선생님의 ‘된사람’이 되라는 말은 아직도 제게 큰 울림이 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은 나중에 사제가 되어서 ‘영신수련’을 공부할 때 ‘겸손의 3단계’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겸손의 3단계를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 겸손은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살아도 열심한 신앙인이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주일미사 참례하는 사람의 비율이 30%도 안 되는 현실입니다. 두 번째 겸손은 계명은 당연히 지키고 주일미사는 물론 평일미사에도 참례하는 것입니다. 본당의 피정, 교육에 빠지지 않고 참석합니다. 본당의 신심단체와 구역에서 봉사합니다. 이런 분들이 있으면 본당 신부는 힘이 절로 납니다. 세 번째 겸손은 복음을 위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희생과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하기도 하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하기도 하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도 받아들입니다. 성인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입니다. 선생님께서 이야기했던 된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명한 ‘쉐마 이스라엘’을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으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파라오의 억센 힘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 주셨습니다. 광야에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목이 마를 때면 샘물을 주셨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드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 보답해야 할 사명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바로 ‘쉐마 이스라엘’입니다. 이것은 구약성서의 핵심이며, 예수님께서도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모세는 이것을 언제나 마음에 새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후손들에게도 전해 주라고 이야기합니다.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된사람입니다.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겸손의 3번째 단계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즐겨하는 말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저를 ‘초긍정 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잘 될 거야, 잘 했어요.’라는 말을 자주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힘든 것들도 견딜 수 있고, 말이 씨가 된다고 잘 되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께서 더 준비해 주신다. 그러니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주하는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시작은 믿음이며, 신앙의 마지막도 믿음입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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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2. 연중 제18주간 토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아침에 일어나 산책을 하다 보면 일찍 이곳 순교 성지를 방문하신 분들의 뒷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들은 하나같이 이른 아침의 공기와 함께 자신의 기도를 주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보기 좋은 모습이기도 하고 동시에 절로 기도하고 싶어지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을 보며 저 또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저분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우리 각자의 믿음은 부족하지만, 그 부족함이 모여 주님의 자비를 입게 하소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은 주님을 눈으로 보고 함께 걷고 주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믿음이 약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의 믿음은 얼마나 더 약할까요?
약하고 약한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함께 기도합시다. 한 사람의 믿음은 약할지 모르지만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함께 있겠다.’하신 주님의 말씀을 믿으며 함께 기도합시다.
서로 기도해주세요. 우리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뭉쳐있는 하나의 공동체, 하나의 가족입니다.
내가 아닌, 우리의 믿음이 이 산을 저쪽으로 옮길 수 있는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들 강아지
말 그대로 들 강아지입니다.
들개라고 표현하기에는
덩치가 너무 작습니다.
들 강아지가
본관 레일 천막 틀에 올라갔습니다.
사람도 올라가기 어려운 곳인데
어떻게 거기 올라갔는지….
어찌어찌 올라는 갔는데 내려올 길이 보이지 않는지
짖고만 있습니다.
무섭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어찌어찌 가긴 갔는데
돌아올 길이 막막하거나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도 무섭고 두려울 것입니다.
들 강아지요?
우여곡절 끝에 들로 잘 돌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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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2. 연중 제18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선배 신부님과 술 한 잔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신학생 때부터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는데, 이상하게도 네가 하면 다 잘 되더라.”
신학생 때도 그랬고 또 신부가 되어 사목했던 곳을 떠올려 보면, 문제가 적지 않았지만 모두 무난하게 잘 해결되었습니다. 선배 신부님의 말씀처럼 제게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주님께서 함께해 주셨고 제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찾을 수 있게 해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일 글을 쓰고, 이곳저곳에 가서 강의하는 제 모습을 3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작가나 강사는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고,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 안에도 몰랐던 그런 ‘나’가 있었습니다. 이도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주님께서 찾을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주님을 잊어버리고, 자기 능력과 노력으로만 이 모든 것을 이룬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교만에 빠진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마음이 들었을 때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즉, 저의 능력과 노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오로지 주님을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간질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는 아들을 고쳐 달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청하기 전에 제자들을 먼저 찾아갔나 봅니다. 문제는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약한 탓이라고 하시지요.
제자들이 아이를 고쳐 줄 수 없었던 것은, 하느님의 능력이 자신들의 구체적인 활동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능력과 노력으로만 병을 고치려 들었기 때문입니다. 참되고 진실한 믿음이 모자랐던 것입니다.
자기의 능력과 노력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대신 하느님의 능력이 우리의 활동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것에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믿음이 있다면 이 세상 안에서 못 할 일은 하나도 없게 됩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부족하고 나약한 ‘나’를 통해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 정말로 큰 기쁨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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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지 진심으로 살아갈 것. 무엇보다 소중한 가르침이었다(테라오 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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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2. 연중 제18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삶
-믿음의 답이다-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시옵니다.”(시편18,2-3ㄱ)
행복은 선택입니다. 부정적 비관적 삶이 아닌 긍정적 낙관적 믿음의 삶을 선택하여 훈련하고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를 통한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만남보다 더 좋은 수행은, 처방은 없습니다. 밤에 일어나 휴게실에 들렸다 다음 주 가톨릭신문과 가톨릭평화신문 1면 기사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두 신문 다 태극기 휘날리는 바탕에 “2027년 세계청년대회 한국 서울 개최”글자가 선명했고 기쁨에 환호하는 한국 가톨릭 젊은이들의 모습도 신선했습니다.
“아, 전쟁은 없겠구나!”
하는 안도감과 더불어 하느님이 보우하사 한반도의 평화도 정착될 것이라는 희망도 들었습니다. 요즘 제 기도 1순위는 한반도의 평화입니다. 문득 떠오른 성가처럼 느껴지는 애국가 1절 첫연입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애국가 가사 그대로 될 것입니다. 저의 믿음이자 우리 신자들의 믿음입니다. 믿어야 삽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살기위하여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 빠지면 남는 것은 무지와 허무뿐일 것입니다.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 믿음의 빛입니다. 도대체 믿음이 없다면 이 삭막한 광야 여정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런지요?
살아갈수록 믿음의 여정에 믿음이 얼마나 중요하고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과연 믿음의 여정과 더불어 날로 성장 성숙되어가는 믿음인지요? 기도와 회개와 더불어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은총이자 믿음의 선택이요, 믿음의 훈련이자 믿음의 습관화입니다. 절대로 값싼 믿음은 없습니다.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가 되어 평생 믿음의 훈련에 항구해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 긍정적이고 낙관적 삶입니다. 병의 치유에 약보다 더 우선적인 것이 긍정적 낙관적 삶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과 기쁨, 찬미와 감사의 삶입니다. 어제 신문에서 읽은 3년간의 투병을 마치고 드디어 암세포 완치 판정을 받은 51세 장로교회 신자인 가수 윤도현의 고백입니다.
“지난 2021년 건강검진후 암이란 말을 듣게 되었고 태어나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시간이었다. 이제와서 굳이 말씀드리는 이유는 제가 겪어보니 암세포보다 부정적인 마음이 더 위험한 것이란 걸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긍정의 마음으로 부정적인 모든 것들로부터 이겨내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야기한다.”
긍정의 힘은 바로 믿음의 힘이자 하느님의 힘입니다. 긍정의 마음보다, 희망과 기쁨, 찬미와 감사, 평화보다 더 좋은 약은 없습니다.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백 낫습니다. 건강할 때부터 이런 긍정적 낙관적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도와 회개와 함께 가는 믿음이요, 믿음의 훈련, 믿음의 고백과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오늘 신명기의 “셔마(들어라)” 믿음의 고백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도 그대로 바치는 믿음의 고백이요 기도문입니다. 우리는 토요일 끝기도시 독서때 읽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너희는 집에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날 때나, 이 말을 너희 자녀에게 거듭 들려 주고 일러 주어라. 또한 이 말을 너희 손에 표징으로 묶고, 이마에 표지로 붙여라. 그리고 너희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 놓아라.”(신명6,4-9)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모세를 통한 주님의 간곡한 당부 말씀 입니다. “들어라!” 경청과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잘 듣기 위한 침묵이요 잘 들어야 겸손에 순종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고 갈림없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듯 매 수행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일하는, 최선을 다하는 사랑의 수행, 진인사대천명의 삶입니다.
평생 사랑의 훈련이요 사랑의 습관화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참삶입니다. 이런 사랑과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더불어 믿음도 깊어집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도 믿음입니다. 주님의 탄식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 세대에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말이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그대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호통치시자 마귀가 나갔고 바로 그 시간에 아이가 낫습니다. 제자들과 주님의 대화가 오늘 우리에게는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그대로 우리와 주님이 주고 받는 대화처럼 느껴집니다.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리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다.”
탓할 것은 주님이 아니라 우리의 약한 믿음입니다. 믿음의 도약이나 비약, 첩경의 지름길은 없습니다. 결코 값싼 믿음은 없습니다. 믿음의 여정, 믿음의 훈련, 믿음의 전사라 했습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입니다. 그러니 우보천리牛步千里,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우직하게, 한결같이 믿음으로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죽을 때까지 온 마음, 온 목숨, 온 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듯 매 수행을 사랑하는 것이요 믿음의 훈련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영원히 믿음의 초보자일뿐입니다. 그러니 죽는 그날까지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로 초발심初發心의 자세로 늘 새롭게 시작할 뿐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은 살아 계시다!
나의 반석 찬미받으시리니,
내 구원의 하느님 드높으시다.”(시편18,4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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