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경환의 명시감상
----천양희의 [알피니스트]에 대하여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을
열네 번 등정한 매스너가
이 시대 최고의
알피니스트라면
십년 면벽 끝내고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버린
이름 모를 스님은 무엇이라 할까
평지에서도
힘들어 못살겠다고 악을 쓰는
나에게는
아무래도 그 스님이
지상에서 제일 높은 정신의 암벽을
등정한 알피니스트란 생각이 든다.
정신은 오를수록
높이가 더 높을 것이니까
----천양희 [알피니스트](( {마음의 수수밭}, 창비, 1994년) 전문
전통불교(교학불교敎學佛敎)는 경전을 중요시 하고, 선불교는 경전을 중요시 하지 않는다. 전통불교는 그 경전을 통해서 부처를 성화시키고, 선불교는 그 경전을 배척하고 자기 자신을 부처로 끌어 올리기에 여념이 없다. 전통불교에서의 부처는 절대적인 존재이며 숭배의 대상이지만, 선불교에서의 부처는 불완전한 존재이며 극복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전통불교는 문자를 중요시 하고 선불교는 말을 중요시 한다. 문자는 말의 장식이며 말의 외양에 지나지 않지만 그 문자가 말에 침투하여 말을 타락시켰다는 것이 선불교의 주장이라면, 말은 어디까지나 불완전하고 문자에 의해서만이 그 불완전성을 극복할 수가 있다는 것이 전통불교의 주장이라고 할 수가 있다. 문자의 기원이 말이고, 말은 그 주체자의 현존과 대상을 지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말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말은 문자로 기록되지 않으면 그 말의 진리를남길 수가 없는 것이다. 문자는 경직되고 이념화되고, 말은 어디까지나 임의적이고 순간적이다. 경전을 중요시 하는 전통불교, 경전을 배척하는 선불교, 부처를 숭배하는 전통불교, 그 부처를 배척하는 선불교, 문자를 중요시 하는 전통불교, 말을 중요시 하는 선불교----. 이 싸움은 형식(전통불교)과 내용(선불교)의 싸움이며, 영원히 그 싸움이 끝나지 않을 가장 중요한 싸움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싸움을 통해서 전통불교와 선불교가 상호 모순점을 극복하고 더욱 더 훌륭한 불교의 역사를 씌어갈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는 숭배의 대상인 동시에 살해에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가 절대적인 숭배의 대상이기만 한다면 우리 인간들의 삶이 없게 되고, 또한 부처가 무조건 살해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 인간들의 숭배의 대상이 없게 된다.
달마 대사는 왜 서쪽으로부터 왔는가? 달마 대사는 왜 숭산의 한 굴 속에서 면벽을 하고 9년 동안이나 지내야만 되었던 것일까? 달마대사는 전통불교에 반하여, “문자를 세우지 않으며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리켜 알게 하는 데 있다. 그것은 마음과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며 언어가 아닌 별도의 방법으로 전하는 것(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이심전심以心傳心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는 선불교를 중국에 전하러 왔지만, 그러나 중국의 불교는 아직 그 ‘부처님의 마음’을 받아 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달마 대사는 크게 실망을 했지만, 그러나 그 실망을 넘어서서 양자강 건너 숭산에서 면벽을 하고, 그 시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달마 대사의 모든 사태를 꿰뚫어 보는 혜안과 그 쓰디 쓴 기다림과 인내(견인주의)는 그의 법력의 크기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를 만나면 아버지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되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 달마 대사는 자기 자신을 부처의 경지로 끌어 올리고 그 부처의 경지에서 영원불멸의 삶을 얻었던 것이다. 도道는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며, 종교적으로는 이 세상의 근본 이치를 가리킨다. 도는 앎이며, 깨우침이고, 궁극적으로는 그것의 실천을 의미한다. 아버지와 부처를 살해하고 자기 자신을 아버지와 부처로 끌어 올리고, 그 모든 중생들을 극락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것이 달마 대사의 종교적인 신념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천양희 시인은 1942년 부산에서 출생했고,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사람 그리운 도시}, {하루치의 희망},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너무 많은 입} 등이 있으며, ‘소월시문학상’과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천양희 시인의 [알피니스트]는 세 개의 시선과 그것에 걸맞는 대상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첫 번째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을/ 열네 번 등정한 매스너가/ 이 시대 최고의/ 알피니스트”라는 시구에서처럼, 눈에 보이는 현상(산)을 바라보는 시선이며, 두 번째는 “십년 면벽 끝내고/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버린/ 이름 모를 스님은 무엇이라 할까”라는 시구에서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정신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평지에서도/ 힘들어 못살겠다고 악을 쓰는/ 나에게는/ 아무래도 그 스님이/ 지상에서 제일 높은 정신의 암벽을/ 등정한 알피니스트란 생각이 든다”라는 시구에서처럼, 자기 자신을 반성하며 어떠한 깨달음을 얻어가는 자의 시선이라고 할 수가 있다. 첫 번째의 시선은 눈에 보이는 현상의 시선이고, 두 번째의 시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 세계의 시선이며, 세 번째의 시선은 자기 반성의 시선이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은 왜, 높은 산과 높은 곳을 지향하고 있는 것일까? 또한 왜 우리 인간들은 육체를 멸시하고 정신의 세계를 지향하며, 자기 자신이 살고 있는 땅을 더럽고 추한 곳으로 폄하하게 되었던 것일까? 왜냐하면 신은 하늘에 존재하는 신이며, 전지전능하고 영생불사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은 하늘 가까운 성산이며 신들의 거주처가 되고, 우리 인간들은 자기 자신의 한계와 이 더럽고 추한 땅을 벗어나기 위하여, 그 어떠한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고산영봉을 올라가고자 한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 아마도 히말라야 산맥의 최고봉 14좌를 등정한 매스너의 집념과 의지도 바로 그 초월성에 맞닿아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산을 오른다는 것은 과거의 신을 죽이고, 자기 자신을 새로운 신의 존재로 끌어 올린다는 것을 뜻한다. 산의 우주의 중심이며, 신들의 거주처이다. 따라서 그 산을 오른다는 것은 고귀하고 거룩한 행위이며, 모든 인간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행위에 속하게 된다. 매스너는 자기 자신의 생명과 그 모든 것을 다 걸고 히말라야의 고산영봉을 등정했던 사나이이며, 우리 인간들의 영원한 알피니스트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천양희 시인은 이 매스너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매스너보다도 더 고귀하고 위대한 인물, 즉, “이름 모를 스님”을 최고의 성자로 성화시켜 놓는다. 왜냐하면 그 ‘이름 모를 스님’은 십년의 면벽을 끝내고서도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버렸기 때문이다. 왜, 그 스님은 십년 면벽을 했던 것이며, 왜, 또한, 그 스님은 십년 면벽을 끝내고서도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버린 것일까? 면벽이란 벽을 향하여 좌선하는 것을 말하며, 그 면벽의 화두는 그 수행자의 목적에 따라서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달마 대사는 ‘부처님의 마음’을 전하기 위하여 숭산의 한 굴 속에서 9년 동안이나 면벽을 하고 그 뜻을 이룩했지만, ‘이름 모를 스님’은 10년 동안이나 면벽을 하고서도 그 뜻을 이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달마 대사에 비하면 그 이름 모를 스님은 머리가 둔하거나 법력의 크기가 신통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십년 동안이나 면벽을 하고서도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또다시 면벽에 들어간다는 것은 보통의 인간으로서는 감히 꿈꿀 수도 없는 일이다. 면벽이란 먹고 마시는 것, 자유로운 행동과 쾌락을 쫓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며, 그것은 오직 모든 욕망과 싸우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되는 그런 수행 방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육체를 멸시하고 모든 중생들을 극락의 세계로 인도해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지구는 아귀지옥일 뿐이며 영원히 행복한 삶이 가능하지가 않다. 따라서 그 스님은 인간 존재의 한계를 초월하여 부처가 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부처는 신적인 존재이고 매스너는 기껏해야 죽음의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이름 모를 스님과 매스너의 차이는 신적인 존재와 죽음의 인간의 차이이며, 이때의 알피니스트라는 영광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의 세계를 정복한 그 이름 모를 스님이 차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평지에서도
힘들어 못살겠다고 악을 쓰는
나에게는
아무래도 그 스님이
지상에서 제일 높은 정신의 암벽을
등정한 알피니스트란 생각이 든다.
정신은 오를수록
높이가 더 높을 것이니까
천양희 시인의 [알피니스트]는 눈에 보이는 현상의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의 세계를 통하여 초월의 세계, 즉, 참다운 ‘득도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앞에서 시사한 바가 있듯이, 도는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며, 종교적으로는 이 세상의 근본 이치를 말한다. 득도를 했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한계를 넘어서서 예수나 부처가 되었다는 것을 뜻하고, 그 전지전능함으로 인하여 모든 중생들을 그 아귀지옥으로부터 구원해낼 수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매스너는 눈에 보이는 형이하학적인 길을 선택했고, 이름 모를 스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길을 선택했다. 매스너와 이름 모를 스님과의 싸움, 형이하학과 형이상학의 싸움, 그 싸움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 것은 그 스님인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시읽기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눈에 보이는 현상의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의 세계를 뛰어 넘어서서 바라보면, 자기 반성적인 시인의 시선만이 최종적인 승리의 월계관을 거머쥐고 있기 때문이다. 천양희 시인의 [알피니스트]의 참다운 힘은 매스너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십년 면벽을 끝내고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버린 이름 모를 스님에게 있는 것도 아니다. 천양희 시인의 [알피니스트]의 참다운 힘은 “평지에서도/ 힘들어 못살겠다고 악을 쓰는” 그 “나”로부터 솟아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힘은 고귀함이며 위대함이고, 힘은 권력이며 권위이다. 모든 힘은 그 어떤 외부에서 저절로 주어지지 않고,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솟아나온다. 반성이란 자기 자신을 가장 처절하고 잔혹하게 다루는 것이며, 천재 생산의 제일급의 힘인 것이다. 과연,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을 열네 번 등정한 매스너와 십년 면벽을 끝내고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간 이름 모를 스님의 행위들을 비교 평가하여 그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자는 어느 누구이란 말인가? 매스너인가? 이름 모를 스님인가? 아니다. 그 어느 누구도 아니고, “아무래도 그 스님이/ 지상에서 제일 높은 정신의 암벽을/ 등정한 알피니스트란 생각이 든다// 정신은 오를수록/ 높이가 더 높을 것이니까”라고, 그 최종적인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자는 “평지에서도/ 힘들어 못살겠다고 악을 쓰는/ 나”일 뿐인 것이다. 판관은 고귀하고 위대한 존재이며, 이 세상에서 최고의 권력자이다. 힌두교의 시바, 불교의 부처, 기독교의 하나님, 그리스 신화 속의 제우스 신 등이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평지에서도/ 힘들어 못살겠다고 악을 쓰는/ 나”는 다만, 매스너와 이름 모를 스님을 우러러 보는 존재가 아닌 데, 왜냐하면 그는 그 반성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더욱 더 높이 높이 끌어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천양희 시인의 “평지에서도/ 힘들어 못살겠다고 악을 쓰는/ 나”의 세계는 섣부르게 고산영봉을 오르거나 면벽에 드는 자의 세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낙천주의자의 세계이다. 다시 말해서, “평지에서도/ 힘들어 못살겠다고 악을” 쓴다는 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현실을 긍정하는 말이며, 그 악을 쓰고 있는 만큼 현실을 사랑하고 있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진정으로 현실을 부정하는 자는 매스너와 이름 모를 스님처럼 외부 초월----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자 한다는 점에서---을 꿈꾸거나 염세주의자(자살자)의 삶을 살게 되지만, 그러나 진정으로 현실을 사랑하는 사람은 현실과의 싸움을 통하여----악을 쓰면서----그 현실을 지상낙원으로 변모시키려고 애를 쓰게 된다. 그의 초월은 내부 초월이며, 수평적인 초월이다. 따라서 “평지에서도/ 힘들어 못살겠다고 악을 쓰는/ 나”라는 시구는 반어가 되어야만 하고, 그리고 그 ‘나’는 비천하고 더러운 인물을 벗어나서 고귀하고 위대한 인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평지에서도/ 힘들어 못살겠다고 악을 쓰는/ 나”라는 시구가 없다면 매스너도, 이름 모를 스님도 그 존재 가치를 상실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알피니스트는 ‘나’이며, 그는 이 세상의 삶을 옹호하는 낙천주의자이다. 다시 말해서, “평지에서도/ 힘들어 못살겠다고 악을 쓰는” ‘내’가 매스너와 이름 모를 스님을 창조해놓고, 그리고, 그들을 뛰어 넘어서서 천하 제일의 [알피니스트]라는 시를 창조해놓고 있는 것이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을 열네 번이나 등정한 매스너를 바라보는 시선도 반성을 불러 일으키고, 십년 동안이나 면벽을 하고서도 또다시 산중으로 들어가는 이름 모를 스님을 바라보는 시선도 반성을 불러 일으킨다. “평지에서도/ 힘들어 못살겠다고 악을 쓰는/ 나”는 그 반성이 낳은 시구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결과, “아무래도 그 스님이/ 지상에서 제일 높은 정신의 암벽을/ 등정한 알피니스트란 생각이 든다// 정신은 오를수록/ 높이가 더 높을 것이니까”라는 그 반성의 힘에 의하여 최고의 권력자만이 내릴 수 있는 판결문을 쓰게 되는 것이다.
참다운 반성은 그 자체로서 아름다운 시가 되고, 그 주체자를 인신人神의 경지로 높이 높이 끌어 올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