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이 비치는 스타킹, 무늬가 들어간 스타킹, 컬러가 강한 스타킹 모두를 죄악시해온 시간이었다. 그것도 강산이 바뀐다는 10년여 내내, 변함없이. 두터운 민자 블랙 타이츠만이 진리라 믿고 살았다. 심지어 블랙 타이츠가 허용되지 않는 고등학교 입학식 날에도 애정을 버리지 못해 생전처음 보는 수백 명의 전교생 앞에서 마이크를 통해 불호령을 듣고 선도부 손에 끌려나가 맨 다리에 흰 양말로 되돌아오는 대망신을 당했다. 그나마 허용할 수 있는 범위는 어두운 차콜 그레이 정도? 블랙 바라 슈즈와 아이보리 타이츠 매치에 모두 열을 올릴 때도, 차마 내 두 다리가 막걸리 색(내 눈엔 정말 그랬다)이 되는 것 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기억을 돌이켜보니 딱 한 번, 정말 딱 한 번 밝은 버건디 타이츠를 신었다. 저녁 식사 약속을 위해 집을 나선 그날, 음식이 채 나오기도 전에 원목 테이블에 심하게 긁혀 구멍난 타이츠 사이로 살이 삐져나왔다. ‘역시 내 짝이 아니군’이라 생각하며, 묵묵히 허벅지를 어루만졌고, 나의 외도도 거기서 끝이 났다. 그랬던 내가 블랙 타이츠 이외의 파트너를 생각하는 계기가 된 건, 아직 추위가 채 가시지 않았던 2009년의 어느 이른 봄날이었다. 80년대 무드에 푹 빠져 있던 당시 A는 후들후들한 티셔츠에 톡톡한 헤링본 재킷을 입고, 폭이 좁은 체크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80년대풍 데님 배기 팬츠를 돌돌 말아 입고 있었다. 그 아래로 빼꼼히 드러나 있던 블랙 레이스 스타킹, 날렵함과 둔탁함이 여성성과 남성성을 공존해서 보여주던 블랙 샌들. 대화를 나눌 때도 대화가 끝나고 나서 그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매고 나갈 채비를 했을 때도, 내게 헤어짐의 인사를 건넬 때도, 내 눈은 블랙 레이스로 보드라운 살빛을 감싼 채 살짝 드러난 그녀의 발목과 발에 고정돼 있었다. ‘이 느낌은 뭐지? 저 새로운 세계는 뭐지? 교태와 페로몬 가득한 여자들, 혹은 고딕 세계에 심취한 마니아들의 전유물 혹은 이벤트성 아이템이라고 생각해온 레이스 스타킹이 어떻게 저토록 담백하면서 강렬할 수 있는 거지!’ 올해 들어 일상 속에서 누군가가 걸친 아이템을 보고 감동받았던 가장 강렬한 신이었다. 레이스 스타킹이 실컷 등장했던 2007 S/S 칼 라거펠드 컬렉션보다, 레이스로 도배됐던 2008 F/W 프라다 컬렉션보다 훨씬 가깝고, 실제적이라 더 큰 ‘한방’이었던 그 순간.
그러나 생각해보면 2006년 F/W 시즌 절정을 이룬 뒤 지난 몇 년간 ‘F/W 시즌=블랙 타이츠’ 공식을 꽤 충실히 이행해오던 디자이너들 역시 블랙 타이츠에 대해 진부함을 느끼긴 마찬가지였나 보다. 이번 2009 F/W 시즌 런웨이 모델들의 미끈한 다리는 대부분 있는 그대로 드러나 있거나(지방시, 발맹, 질 샌더를 비롯한 80% 이상의 런웨이), 살이 훤히 비치는 얇은 블랙 스타킹(발렌시아가, 스텔라 맥카트니), 피시넷 스타킹(장 폴 고티에), 레이스 스타킹(두리 정, 크리스챤 라크로와), 아니면 아예 니트 소재의 톡톡한 니 삭스(샤넬, 미우미우)나 패턴이 화려한 타이츠(마크 제이콥스, 마르니) 등이 블랙 타이츠의 공석을 대신하고 있었으니까. 지난 여러 시즌 내내 블랙 타이츠가 코쿤 실루엣, 텐트 실루엣 등 볼륨감 넘치는 실루엣의 옷들이 돋보이도록 다리를 붓펜으로 그어놓은 듯 간결한 ‘선’으로 마무리하는 역할에 머물렀다면 무드, 실루엣, 컬러가 한결 명료해진 이번 시즌엔 한층 더 장식적인 역할이 부각된 스타킹들이 주목받고 있다. 그 중에서도 단연 블랙 레이스 스타킹이 리얼웨이를 위한 아이템으로 눈에 띄는 이유는 이번 시즌의 키 트렌드인 40년대 레이디 무드와 80년대 스트리트 무드를 모두 아우르는 극과 극의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화려하고 클래식한 느낌과 펑키한 느낌이 공존하는 이 아이템은 올 블랙 룩을 별다른 주얼리 매치 없이도 멋드러지게 마무리해줄, 알고 보면 무엇보다 쉬운 액세서리인 것이다. 다시 말해 맨 얼굴의 레드 립처럼 포인트 아이템이라는 것이다. 수많은 남성들이 ‘입은 것과 벗은 것의 경계선에 있어 더욱 자극적’이라고 말하는 피시넷 스타킹과 함께 애매모호한 경계선에 있으면서도 좀 더 ‘옷’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이 아이템은 패턴에 있어서도 선택의 폭이 무궁무진해 더욱 매력적이다. 하지만 언제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강렬한 아이템들이 그렇듯 스타일링에 있어 균형감을 잃는다면 ‘안 신으니만 못한’ 역효과를 내게 된다는 것은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내게 더없이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A의 스타일링이 빛을 발했던 건 캐주얼한 데님 배기 팬츠 아래로 살짝 블랙 레이스가 드러났기 때문이지, 블랙 가죽 쇼츠 아래로 훤히 드러난 레이스 스타킹이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테니까. 그래서 이번 F/W 시즌에 블랙 레이스 스타킹을 시도해보고 싶다면, 클래식하고 페미닌한 스타일링보다는 간결하고 캐주얼한 룩으로 드레스다운해 볼 것을 권한다. 예를 들어 코튼 소재의 박시한 블랙 미니원피스에 레이스 스타킹을 신고 남성적인 앵클 부츠를 신는다거나, 클래식한 트렌치코트 아래로 드러난 레이스 스타킹에 블랙 옥스퍼드 슈즈나 납작한 스니커즈를 매치하는 식의 룩. 혹은 모노 톤의 얇은 면 티셔츠나 셔츠에 복숭아 뼈가 드러나는 블랙 배기 팬츠를 입고 레이스 스타킹이 살짝 드러나도록 단화를 매치하는 식의 룩은 의외성 때문에 더욱 즐겁고 스타일리시한 룩이 될 테니 말이다. 여기까지 읽고도 왠지 혹해서 구입한다손 치더라도 신고 나서기 부담스러워 옷장에만 묵히는 아이템이 될 것 같아 망설여진다면 걱정할 것 없다. 패션이란 언제나 취향의 문제일 뿐 비록 옷장에 묵히고 있어도 언젠가 연인과의 특별한 날을 위한 이벤트 아이템으로도 이 요염한 아이템은 너무나 훌륭한 자격 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으니까.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9월호를 참조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