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 5】
13세기의 왜구와 경인년 이후의 왜구(1350년 이후부터 1391년 약 40여 년 동안 발생한 왜구)는 약 40년 이라고 하는 같은 기간 동안 각각 11회와 591회라는 엄청난 빈도의 차이가 있다.
경인년 이후의 왜구는 그 행동 양식에서도 13세기의 왜구와 큰 차이가 있었다.
그들은 약탈이 끝나도 곧바로 철수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고구려의 지방관청에 방화까지 행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지방관청에 대한 방화는 고려의 지방 행정에 대해 일시적으로 큰 타격을 미쳤다.
그러나 경인년 이후의 왜구가 13세기의 왜구와 비교하여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사람을 납치해 간 점에 있었다.
경인년 이후의 왜구의 빈번한 침구는 또 다른 심각한 사회 문제,즉 백성의 유랑과 기근을 파생시켰다.
<고려사, 우왕 14년 8월>
압록강 이남은 대개 모두 산이고,비옥해서 매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대개 해변에 있습니다.
기름진 들,수천리의 수수밭은 왜노들이 점령해 갈대가 하늘에 닿고 있습니다.
왜노들이 오면 앞에 누운 풀도 없어지고,놈들은 마치 무인지경을 드나들 듯 했습니다.나라는 이미 여러 섬의 물고기,소금,목축에서 나는 이익을 잃었고 또 기름진 들의 곡식이 나는 곳을 잃었습니다.
이러한 왜구로 인한 기근은 백성의 유랑을 초래하였으며 또 화척과 재인이라는 백성들의 소위 "假倭"활동으로 이어졌다.
경인년 이후의 왜구의 활동 범위는 고려의 전 해역은 물론이고 러시아의 연해주와 중국에 까지 미쳤다.
중국에서 왜구의 활동으로 중국 조정은 고려에 대하여 왜구 진압을 요구하는 등 고려와 중국간의 외교 문제로까지 발전했다.
<고려사,권113,열전 제 26>
우왕 13년,정지가 상서해 스스로 東征(대마도 정벌)을 청하여 말하기를,근년에 중국이 왜구의 정벌을 소리높여 말하니,만약 우리나라 각지에 그 병선들을 정박시키면,비단 그 뒷감당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우리나라의 허실을 엿볼 우려가 있습니다.
여기서 중국이 왜구 정벌을 명분으로 삼아 고려 해안에 정박할 경우에 부담해야 할 물적,인적 부담은 물론 명나라 군대가 고려를 공격해올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고려 조정에 팽배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인년 이후의 왜구의 진압은 고려와 중 국간의 외교 문제로까지 확산될 위험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경인년 이후의 왜구의 빈번한 침구로 인해 관료들에게 봉급을 지불하지 못하게 되었고,겨우 도착한 조세의 배분을 둘러싸고 서로 다투어 살인까지 발생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정부는 연안에 있는 창고를 내륙으로 옮기고 지방에서 중앙으로 보내는 조세의 운반을 일시적이나마 해로가 아닌 육로로 운송하게끔 지시하였다.
이처럼 경인년 이후의 왜구는 고려의 국가재정을 궁핍하게 하여 국가의 여러 기능을 약화시켰다.
왜구는 단순한 약탈 행위의 차원을 넘어서 고려의 외교와 내정에 걸친 지배체제 전반을 뿌리채 뒤 흔드는 국가의 死活이 달린 문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