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민주화 운동](26)여성노동자의 어머니 조화순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6. 24. 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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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민주화 운동](26)여성노동자의 어머니 조화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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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0. 21:25조회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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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민주화 운동](26)여성노동자의 어머니 조화순
짓밟힌 여공들 일깨운 ‘작은 예수’
경향신문 입력 : 2003-10-12 18:36:11
위당 정인보 선생의 ‘순국선열추념문’은 정부수립 직후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하신 영령들을 국내에 모시면서 바친 글이다. 국·한문 혼용체의 고풍스런 문체에 담긴 곡진하고 절절한 충정이 구절마다 배어나는 명문이다. 그 중에 선생이 가장 우러르고 기리는 분들은 ‘일성과 병수할 열적’이 빛나는 분들이 아니라 ‘명자조차 물을 길 없이 마른풀 위에 유골을 굴리며’ 방치되어 있는 무명 선열의 높고도 매운 뜻이다.
우리 민주화운동사에도 그 이름이 빛나고 아름다운 이들이 있는가 하면 고결하고 순정하게 헌신했으되 이름도 명예도 없는 이는 훨씬 더 많다.
조화순도 그들중의 한 사람이다. 그이는 남성패권주의 한국사회에서 몇 명뿐인 여성목사이며 스스로 목사의 자리에서 내려와 개발독재의 가장 후미지고 낮은 곳에서 신음하던 가난하고 힘없는 나어린 여성노동자가 되어 살다가 그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일제시대, 3·1운동 참가자의 일제 검거령을 피해 충남 예산을 떠나 객지를 전전하다가 인천에 정착한 부지런하고 검소한 마부 부부가 있었다. 워낙 근검성실한 그는 한때 말을 12필씩이나 길러 팔았다. 1934년 인천에서 태어난 그의 막내딸은 노래하고 춤추고 연극놀이를 하는 데 재능을 보인 발랄한 소녀였다. 비교적 부유하게 성장해 별 열등의식이 없었던 소녀는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중학교 4학년때 6·25가 발발하고 학교가 문을 닫자 그녀는 YMCA자원봉사단으로 부산의 전상자병원에서 봉사한다. 사람의 살이 썩는 냄새 속에서 피범벅이 된 담요를 연못의 얼음장을 깨고 씻으면서도 낡아서 더 이상 못쓰게 된 담요를 잘라서 중환자들의 덧버선을 만들어 신겨주는 인기절정의 간호원이었다.
그녀는 전후에 복교해 학업을 마치고 3년여의 초등학교 교사생활 후 신학대학에 진학해 감리교회의 목사가 된다. 인천 앞바다의 작은 섬, 덕적도의 동네 화장실로 변해버린 퇴락한 작은 교회가 그녀의 첫 부임지였다. ‘상록수’의 주인공이 된 그녀는 성경과 찬송가 없이 허름한 작업복에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마을을 샅샅이 누볐다. 그들과 함께 밭을 매고 모를 심고 낫질을 했다. 부임해온 여자목회자에게 죽은 까마귀와 고무신을 던지며 야유하던 이들이 점차 마음을 열었다. 교회는 그녀 생각대로 그 마을의 것이 되어갔다. 그녀의 목회방법은 철저히 비기독교적이었다. 그녀는 교인과 비교인을 구분하지 않았다.
1966년 경기도 시흥의 달월교회 목사인 조화순에게 미국인 목사 조지 오글과 조승혁이 찾아와 ‘산업선교’를 제의하기 전까지 그녀는 ‘산업선교’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남이 하기 싫어하는 고생스러운 일을 어디 한번 해보자는 생각에 그녀는 안정된 교회를 떠나 인천 만석동에 있는 동일방직에 우선 여공으로 취업한다.
이것이 조화순이 목회자의 단상을 버리고 산업화의 숨가쁜 질주 속에서 신음하는 여성노동자와 함께 뒹구는 고난의 시작이었다. 목사의 신분을 숨기고 아줌마여공으로 취업한 그녀는 맨먼저 모욕감과 수치심과 고된 노동을 견뎌야 했다. 예사로 쌍욕을 듣고 반장에게 머리를 쥐어박히고 더러 발길에 차이기도 했다.
조화순은 맨 먼저 남자친구도 없고 교회도 나가지 않는 외로운 사람들을 모아 모임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요리, 꽃꽂이, 뜨개질로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작업현장 이야기가 그들로부터 나왔다. 형편없는 작업조건, 관리자와 임금에 대한 불만 등을 토로하던 그들은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동일방직은 1,300명 종업원중 80%가 여성이었으나 남성중심의 어용노조는 조합원의 복지에 무관심했다. 그러나 1972년, 우리나라 노조운동사상 최초로 여성지부장이 동일방직에서 탄생했다. 회사는 부서이동, 사표강요, 출근정지, 전격해고, 남자공원들을 동원한 반조직 행위 등으로 거세게 밀어닥치는 ‘여공바람’을 제압하려 했으나 조화순의 산업선교회를 거점으로 무서운 조직력을 가진 이들을 뒤엎을 수 없었다. 이영숙, 이총각 등으로 이어지는 진짜 노조를 더 이상 두고 보지 못한 회사측이 남성어용노조를 앞세워 일으킨 난동이 유명한 똥물투척 테러와 이에 맞선 노조의 알몸저항과 끝없이 이어진 고난의 투쟁이다.
목사 조화순은 불행하게도 신학생이나 목회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이들 여성 노동자들로부터, 또는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나온 실무자들에게서 ‘예수’를 체험한다. 인천여성노동자회 회장 김지선은 조화순을 ‘교회운동의 틀을 벗어나 철저히 노동자중심, 노동운동주체를 주장하고 실천한’ 목사로 기억한다. 조화순은 설교도 토론식으로 진행했다. 75년 해고 노동자의 쉼터였던 인천 부평의 광야교회는 조화순의 토론식 설교후에 가난하고 지친 노동자들이 천국에서의 위안을 얻는 곳이었다. 조화순은 그들을 향해 끊임없이 일깨웠다. ‘우리는 작은 예수다. 예수의 길을 가는 자는 모두 예수다’
이화여대 사회학과 선·후배로 일찍이 노동운동에 투신한 최영희(내일신문 사장)와 인재근(전 민가협 총무)은 75부터 79년까지 산업선교회 실무간사를 지냈다. 이들은 “조화순에게 있어서 ‘선교’와 ‘교육’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수출입국에 짓눌린 노동자와 ‘함께’ ‘같이’ 생활하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자장면을 같이 만들어 먹고 함께 담요를 뒤집어쓰고 잤다. 인천 산선에 실무자로 일하다가 김근태를 만나 부부가 된 인재근의 부평집에 들러 수시로 흐트러진 살림살이를 청소하고 정돈해주었다. 조화순은 결코 그들의 ‘상관’이나 지도자가 아닌 친구요 동료였던 것이다.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124명을 위한 대책위원회와 기도회 등을 주도하면서 그녀는 거칠 것이 없었다. 조화순을 체포하기 위해 형사들이 포진해 있는 인천 답동 천주교회로 그녀는 수녀복 차림으로 당당하게 진입해서 주변을 아연실색케 했다. 78년 11월 그녀는 마침내 체포되어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3년 징역선고를 받는다. 74년 반도상사 노조결성을 도운 것이 긴급조치 2호 위반이라하여 구속된 데 이어 두 번째 징역이었다.
“주님께 붙여졌던 영광스러운 이름이 내게도 붙다니!” 왜 순진한 노동자를 선동하고 다니느냐는 수사관의 서슬퍼런 추궁에 대한 그녀의 답변은 종종 심문을 중단시키곤 했다. “내 평생 소원이 예수를 닮는 것이다. 나는 오늘 소원을 이뤘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은 것은 선동자였기 때문이다. 이제 나를 보고 선동자라하니 이렇게 기쁜 일이 있겠는가. 고맙고 기쁘다. 당신들이 나를 보고 남미의 해방신학에 도취되고 어쩌구 하지만 난 그 책 읽어 본 적 없는 무식쟁이야. 내가 아는 건 오직 성경, 그리고 해고된 이 애들이 어디서 굶지나 않는지, 어디 가서 자는지, 추운데 연탄은 있는지 그저 그 생각만 할 뿐이야”
중앙정보부는 증거보강을 위해 노조원들을 무려 43명이나 더 불러들였다. 그때 수사관들은 모두 놀랐다. 차례차례 불려온 그들은 하나같이 모두 자신이 주동자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조목사는 우리가 배고플 때 쌀을 구해주었고 우리가 감옥에 있을 때 우리의 옥바라지를 했습니다. 우리가 슬프고 고통스러워 울 때 우리와 함께 울었습니다. 이런 행위가 공산주의라면 나는 기꺼이 공산주의자가 되겠습니다”
어느 노조원의 진술서를 읽고 조화순은 또 감동을 받았다. 일찍이 그녀의 별명은 ‘조감동’이었다. 그러나 수사기관에서의 당당함이 하루아침에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수시로 엄습하는 고문에 대한 공포 앞에서 떨어야 했다. 그녀는 ‘죽으면 죽으리라’고 결심했다.
그녀는 10·26 이후 긴급조치가 해제되면서 감옥을 나섰지만 이후 얼마 안되어 80년 5월17일 자정 영문도 모른 채 다시 안기부로 끌려간다. 광주항쟁이 계엄군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고 신군부가 권력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난 연후에야 그녀는 영장도 없이 체포되어 감금되어 있던 안기부 지하실을 80여일 만에 나온다.
조화순이 여러 집회에서 행한 설교나 연설을 종합해보면 그녀는 70년대의 노동현장을 예수 당대의 ‘갈릴리’로 인식했다. 로마병이 지키고 선 예수의 무덤을 용기있게 찾아간 이들은 다름아닌 천한 여성들이었다. 그들에게 예수가 전한 첫 복음은 갈릴리로 가라는 말이었다. 갈릴리는 강대국으로부터 늘 약탈당하고 능욕당하는 버림받은 땅이었다.
조화순은 70년대 노동집약적 제조업 현장의 어린 여성노동자들의 자존과 권리를 일으켜 세웠다. 불의한 현실에 순종하는 것이 여성의 미덕이 아님을, 갈릴리의 여성들이 결코 열등한 인간이 아님을 설교가 아닌 삶으로 깨우쳤다. 깨달은 여성들은 80년대의 여러 노동현장에서 노동자의 인권을 확립했으며 그 인맥은 오늘까지 현존한다.
더 이상 노동현장이 갈릴리땅이 아닌 이즈음 그녀는 강원도 심산궁벽에서 농부가 되어 있다. 고은 시인과 문익환이 그녀에게 쓴 헌시에 의하면 조화순은 ‘핏줄 속을 거꾸로 흐르는 미친 사람’, 열정의 화신이다.
부잣집 출신 처녀목사
여성노동자의 어머니 조화순
한국 노동운동의 대모 조화순. 그도 처음엔 노동자의 삶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그야말로 어여삐 자란 ‘부잣집딸’ 처녀목사였다. 그 시대 여성노동자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목도하고 그것에 천착하기 전까진 오늘날의 자화상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가 여공으로 들어간 곳은 동일방직. 그는 처음부터 적지 않은 충격과 맞닥뜨렸다. “야, 이것 좀 해, 저것 좀 해” “근무태도가 뭐야” 부잣집 딸인 데다 대학원까지 나와 내로라하는 자존심의 소유자였던 조화순. 여공들의 명령에 적잖이 당황했고 화도 치밀었다. “나는 니들과 달라”라고 위안하며 엉엉 울기도 여러 차례. 그러나 하루이틀 그들의 삶과 버무려지면서 그는 딴 사람으로 변해갔다. 부잣집 딸도 목사도 아닌 신앙심을 몸소 실천하고 가슴이 뜨거운 노동자가 되어갔다. 그는 이같은 번민과 갈등이 추후 신앙에 큰 도움이 됐다고 고백했다.
공장에서는 광목을 짰다. 솜에서 실을 빼내 물레로 돌려 베를 짰다. 베짜는 데는 온도가 중요해서 사시사철 후텁지근했다. 먼지가 수북해 눈을 뜰 수 없었다. 속눈썹에 하얀 솜먼지가 달라붙기 일쑤였다. 눈을 비비느라 일을 못할까 걱정도 했다. 3교대. 불규칙한 식사. 위장병과 결핵에 절어 사는 여공들이 부지기수였다. 너무 긁어서 몸이 헐은 나머지 목욕탕 가는 것조차 꺼렸다. 사람들이 문둥이라고 놀리며 못들어오게 한다며 여공들은 엉엉 울기만 했다. 그들은 당시 외롭게 투쟁하며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노동자들이 얼마나 노동을 더 해야/아, 살 수 있나/우리 모두 지금까지 피땀흘려 일했는데/아, 슬픈 현실/지금까지 빼앗겼는데/계속해서 착취당하면/노동자는 기계인가요/느낀 것이 많아요/설움에 지쳤던 눈빛에 보여요/내일의 찬란한 빛이.
노동자가 얼마를 투쟁을 더 해야/아, 살 수 있나/우리 모두 지금까지 단결하여 잘 싸웠는데/아, 슬픈 현실/지금까지 차여왔는데/계속해서 짓밟힌다면/노동자는 돌맹인가요/외칠 것이 너무 많아요/분노에 불타는 눈빛에 보여요/내일의 찬란한 빛이”
[출처] [실록 민주화 운동](26)여성노동자의 어머니 조화순|작성자 바람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