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45]‘고난苦難의 역사’ 베트남과 대한민국
-민주평통 임실군협의회 '베트남 다낭' 안보 견학기記
지구촌에 ‘전대미문의 돌풍’을 일으킨 돌림병 ‘코로나19 바이러스’확산세가 주춤해졌다. 그 덕분에 막혔던 해외여행의 숨통이 조금은 트인 셈. 지난 5월 8일에서 12일까지 3박5일 동안 베트남 다낭에서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 제20기 전북 임실군협의회’가 정부와 군청의 지원으로 통일역량 강화를 위한 안보견학을 겸한 해외연수회를 가졌다. 당연직 자문위원인 군의회 의원 5명을 포함한 28명. 8일 오후 2시, 임실군민회관 앞에 대기한 관광버스에 심민 군수와 이성재 군의회 의장이 올라와 유익한 안보관광과 함께 무사히 다녀오라는 격려의 인사말이 있었다.
인근 사선대관광지 조각공원에서 간단한 몸풀기를 한 뒤 전망 좋은 운서정雲捿亭까지 가벼운 등반으로 올라가 관촌읍내와 오원천, 성미산성을 바라보며 숨을 가다듬은 후 청주공항을 향해 출발했다. 저녁을 공항근처 맛집에서 한 후 7시 출발 비행기를 기다렸다. 밤 11시 도착, 5성급 호텔에 짐을 풀었다. 다음날 새벽 5시, 탁 트인 미케해변의 바다는 일찍부터 나온 인파로 북적거렸다. 해변 길이가 34km로 세계에서 3번째로 길다던가. 날씨도 쾌청. 로비에서 만난 위원들의 얼굴이 모두 편안하게 보였다. 베트남은 출장으로만 두 번 온 적이 있으나, 최근래 유명 관광지로 부상한 다낭은 처음이고, 휴양지로 제격이라는 말을 여러 사람한테 들은지라 조금은 설렜다.
정종섭 가이드는 연륜이 상당한지라 노련했다. 관광을 한다며 새벽부터 서두르는 등 일정을 무리하게 잡지 않아 좋았다. 또 사실, 전통상가가 잘 보존된 호이안 말고는 인근에 특별히 꼭 봐야 할 관광명소가 많지 않은 듯했다. 바위 사이에 교묘히 은폐돼 있는 영흥사를 다녀온 후, 일행이 향한 곳은 ‘호이안 청룡부대 3차 주둔지’를 방문했다. 현재는 당시의 막사는 개발로 없어지고, 청룡2부대를 상징하는 머릿돌만 초라하게 남아 있었다. 월남전 당시 여단본부 내에서 노역을 하던 부모를 따라 부대 입구에서 구도를 닦았던 ‘깜’(1955년생)이라는 아저씨가 서투른 한국말로 우리 일행을 반겼다. 전쟁의 참상을 지켜봤던 11살의 구두닦이 소년이 68세의 노인이 되었으니, 언제나 무상한 것은 세월인 듯. 한국인 참관단이 오면 그때의 기억을 얘기해주며 한국인의 고마움을 잊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였다. 위로금인지 격려금인지 금일봉을 전달하며 기념사진 찰칵.
이튿날. 일행을 안내한 곳이 5군구 전쟁박물관이었다. 1, 2, 3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기억하시리라. 3차례의 큰 전쟁을 승리로 이끈 베트남인들의 민족 단결력에 새삼 놀랐다. 1946-54년 프랑스와의 전쟁, 1965―73년 세계 최강국 미국과의 전쟁, 1975-91년 중국과의 전쟁, 이밖에도 캄보디아, 라오스 등 인근국가들과의 전쟁이 있었지만, 세 차례의 큰 전쟁에서 승자는 모두 베트남이었다. 그들은 악랄한 고엽제 공격도 끝내 이겨냈다. 그 전쟁의 뒤에는 ‘호치민胡志明’이라는 전설적인 지도자가 있었다. 얼마나 많은 양민들이 죄없이 죽어나갔을까?
그 고난의 역정이 수세기를 이어져 내려온 베트남은 슬픈 나라였다. 대한민국 역시 슬픈 나라였다. 700여회의 침략을 받았으며, 결국에는 주권을 뺏긴 역사, 동족끼리 3년전쟁도 치렀다. 고난의 역사를 걸었다는 측면에서 두 나라는 많이 닮았다. 베트남은 수 백년간 서양 제국주의의 틈바구니에서 신음하였지만, 민족의 정기를 한번도 잃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그야말로 백절불굴百折不屈, 비록 40여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이지만, 꺾이면 꺾일수록 뭉쳐야 산다는 것을 너무나 알고 있었다. 현대사를 통틀어 온통 전쟁으로 얼룩진 그 나라, 백전백승, 이제야 비로서 사회주의공화국으로 당당하게 비상하고 있는 베트남은 전쟁의 비극을 딛고 일어나, 이제 동남아시아에서 경제적으로도 급부상하고 있는 ‘젊은 나라’였다. 우리나라처럼 ‘슬픈 나라’에서 ‘도약의 나라’로 발돋움하여 출퇴근 때의 수백만대의 오토바이행진처럼 질주하고 있다. 박물관 입구에 만들어놓은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호지명胡志明) 주석 기념관에는 참배객들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하노이시에서 봤던 호치민의 관저와 연못을 이곳에 그대로 재현돼 놓은 게 눈길을 끌었다. 조선의 세종대왕과 정조대왕처럼 애민사상에 투철한 명실상부한 국부國父임을 알 수 있었다.
기념관 내부 양쪽 벽면에는 5군단사령부의 역대 사령관 사진과 전쟁 속에서도 꿋꿋했던 영웅적인 어머니들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기념관 내부계단을 이용한 2층 실내에는 12개의 전시실이, 3층에서 1층으로 내려온 계단에는 연대순으로 전쟁 사진, 서류, 전투그림과 총, 소품 등이 전시돼 있었다. 마침, 우리나라의 베트남 참전용사들이 서울에서 단체로 관광을 와 민주평통 자문위에서 안보견학을 왔다며 인사를 건네니 더욱 반가워했다. 자신들이 실제 겪었던 전쟁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 무기들을 보며 네 기억이 옳으니, 내 기억이 옳으니 설왕설래,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아무튼, 다민족국가인데도 전쟁 때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통합된 모습으로 단결해, 어려운 전쟁들을 승리로 이끈 만큼 자부심이 대단한 듯 보였다. 거기에는 전국민이 죽음을 불사하고 신봉한 지도자 호치민이 있었기에 가능한 듯했다. 가이드는 필자가 영양가 있는 질문을 하자, 베트남에 대해 더 알고 싶으면 <호치민 평전>(찰스 펜 지음, 김기태 옮김)을 봐야 한다며 다음날 복사본 한 권을 선물을 주기도 했다.
GNP가 아직은 5천여달러에 불과하지만, 그 오랜 질곡에서 벗어나 신흥강국이 되는 건 시간문제인 듯했다. 왜냐하면 베트남은 젊기 때문이다. 젊어도 너무 젊은 듯했다. 2016년 전체 여대생 설문조사가 있었는데, 아이를 2명이상(25%), 4명이상(25%) 낳기를 희망하고, 26세쯤 결혼할 것이라고 했다 한다. 인구 110만명인 다낭시의 평균연령이 23세라니, 자녀 4명인 가족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이다. 우리나라와 비교해 볼 때 격세지감이 아닌가. 유엔에서 대한민국을 공식적으로 ‘선진국’으로 분류했다지만, 어쩌면 우리는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트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결혼도 포기하고 출산도 포기하는 등 ‘3포세대’의 젊은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현상은 어쩐지 불안하다.
베트남에 ‘함석헌’같은 역사학자가 있었다면, 틀림없이 <뜻으로 본 베트남역사>를 썼을 것같다. 이번 여행길에 가져간 책이 이미 고전古典이 되어버린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였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고난의 여왕'이었던 베트남민족과 우리 한민족이 그 숱한 고난의 역사를 딛고 ‘빛나는 왕관’을 쓸 날을 그 언제일까? 그리고 그 날은 기어이 오고야 말 것인가? 그러기에 우리뿐만 아니라 베트남민족에 있어 ‘고난의 역사’의 뜻이 있지 않겠는가?
거미줄같은 지하땅굴을 보지 못한 게 아쉬웠지만, 5관구 전쟁기념관에서 주마간산격으로 훑어본 베트남전쟁의 이모저모와 현재의 발전상들을 보면서, 평화平和와 통일統一이 왜 가장 중요important하고 시급한urgent 과제인지를 거듭 느끼게 된 것은 수확이라면 큰 수확이라 하겠다. 어떤 경우에도 전쟁은 일어나면 안되는 것임을 깨달았던 짧은 여행이자만, 보람있었다는 말로 글을 맺는다.
후기: 이 졸문은 [찬샘별곡 32]를 본 민주평통 임실군협의회의 여성실장이 보고서에 '안보견학기'를 첨부하면 좋겠다며 안보견학부분을 강조해 rewrite해달라는 요청에 의한 것이다. 하여, 우리가 방문한 ‘청룡2부대 주둔지’와 ‘5관구 전쟁박물관’을 둘러본 느낌을 추가했다. 우리나라도 전쟁박물관이 있지만, 베트남의 전쟁박물관은 감상이 더욱 특별났다. 왜냐하면, 그들은 1945년부터 70년대까지 3차례의 엄청난 전쟁을 오로지 깡다구 하나로 이겨낸 ‘독한 민족’임을 알게 돼서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민족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것을 어머니 자궁에서부터 체득하고 태어난 것같다. 무서운 일이다. 본받아야 할 일이다.
‘민주평통’은 어용御用기관같기도 하고 아닌 것같기도 한, 별로 의미없는 대통령 직속 자문기관일 것이다. 정권에 둘러리서는 것같기도 하고 아닌 것같기도 하다. 전세계 각나라의 자문위원을 합하면 2만명을 넘는다고 한다. 2021년 9월 문재인대통령으로부터 자문위원 위촉장을 받았는데, 3선같은 초선 국회의원의 추천에 의해서다. 자문위원들 앞에서도 ‘용감하게’ 말했지만, 오는 10월 다시 시켜준다해도 절대로 안할 생각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비록 종이장 하나이지만, 그 속에 현재의 대통령 이름과 내 이름이 같이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할 일도 없기도 하고. 수당 있냐고 물으면 “한 푼도 없다”. 분기별 회의를 한 후 회식은 한다. 해외 안보견학은 덤이다. 흐흐.
첫댓글 우천이 평통위원인가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