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화양연화(花樣年華)

[서교분]

            

* 화양연화(花樣年華)

  한밤에 묵직하게 들리는 소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착각이려니 읽고 있던 책에 눈길을 돌리지만, 무언가 세차게 휩쓸리는 소리가 이어집니다. “이것이 무슨 소리냐? 네가 나가 살펴보아라.” 글을 읽던 노옹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동자에게 이르던 **「추성부」의 소리를 지금 내가 듣고 있는 것일까. 언 듯 무섬증이 일지만, 곁에 동자가 없으니 외등을 켜고 현관문을 여는 순간 세찬 비바람이 들이칩니다. 삽시간에 거실 바닥은 빗물이 흥건하고 번갯불이 어둠을 가르고 천둥이 웁니다. 비설거지는커녕 간신히 문을 닫고 무섭게 쏟아지는 폭우가 잦아들길 기다립니다. 좀처럼 그칠 기미가 없는 거센 폭풍우 소리, 밤은 깊어가고 뇌성 번개가 멈춘 것 같아 재빨리 마당으로 뛰쳐나가 태양광 정원등에 비닐봉지를 씌우노라니 온몸이 흠뻑 젖었습니다. 일 년 중 손꼽을 정도로 비 구경이 어려운 나성에 뇌성벽력을 동반한 겨울비가 연일 내립니다. 세상사 속진을 다 씻어 새로운 날을 마중하는 날이런가. 우박이 쏟아지고 무지개가 뜨는 신비로운 날 생각지 못한 작별을 마주합니다.

  성탄의 한밤에 먼 길 떠난 수산나 님과 본향 가는 길에 동행하시려는지 한낮에는 같은 구역 말지나 단독회원님의 부음이 이어졌습니다. 집에 머물라는 행정명령에 조문도 불가한 상황입니다. 비탄에 잠긴 우리 회원들은 이틀을 줌 (Zoom) 화상 미팅을 통하여 돌아가신 영혼을 위한 기도를 바치고 추모의 시간을 마련하였답니다. 어머니의 천명인 모정을 아낌없이 주고 가신 두 분 중 한 분은 한국에서 오신 단독회원이시기에 모르는 회원들이 많으셨습니다. 어느 해 참사진과 단독회원님들 방문 중 어르신들을 모시고 식사를 하던 자리에서 뵈었던 인자하신 어머니셨습니다. 96세의 연세에도 성무일도를 빠지지 않고 기도 생활에 충실하셨다고 가족들과 친교를 나눴던 회원들이 회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기도 우체국)에 기도를 청하며,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하심에 의지하여 두 분의 아름다운 영혼을 주님 전에 봉헌 드렸습니다.

  바로 전날 인사를 주고받았던 윤수옥 사랑의 수산나 들꽃 님. 성탄 대축일 늦은 밤 관구에서 올려주신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영상물>을 시청하고도 왠지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언 듯 선잠에서 깨어 처음 접한 부음. 그대의 선종 소식은 마치 꿈을 꾸듯 무척 긴 하루 이틀 시간이 멈춘 듯합니다. 회원들의 추모 영상과 글, 오카리나 추모 연주, 기도와 위로의 말씀을 전해 주신 신부님 수사님들, 저마다의 마음에 남겨준 사랑이 슬픔의 강이 되어 끝없이 흘러갑니다. 늘 상냥한 미소와 다정한 몸짓으로 순전한 기쁨을 나눠주던 그대는 사랑스러운 여인이었습니다. 말없이 조용조용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던 들꽃 님, 주위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현의처럼 사랑이라는 선물을 주고 간 하느님의 어여쁜 따님이셨습니다. 아기를 보면 좋아서 절로 입이 올라간다던 이야기처럼 얼마 전부터 산모를 돌보아주러 다닌다며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지요.

  어려운 시절이기에 가족들만 고별식을 치르겠다던 예정과 달리 신부님과 소수의 인원이 참석하도록 장의사 측과 조절되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내내 울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허리 통증으로 요즘엔 사용하지 않던 카메라를 챙겼습니다. 반닫이를 뒤적이다 우연히 눈에 띈 예식용 장갑을 전례에 필요하려나 싶어 가방에 넣고 고통의 신비 로사리오 기도를 드리며 낯선 길을 나섰습니다. 주차장에서 만난 어느 자매님의 인사에 누구신지? 가르멜 회원은 아니지만 수산나를 통해 알고 있었다며, 신자들의 기도를 맡았지만 떨려서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셨지요. 저도 모르게 그분의 손을 꼭 잡고 걸음을 옮겼습니다. 성모님의 성의를 입고 예순한 살의 망자가 되어 말없이 누워있는 고별의 장소엔 은발의 장부님과 가족들의 애통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환자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전문의인 아드님이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관 이편에서 유리 스크린에 손을 대고 고개 숙인 망극함이 절절한 뒷모습. 혹여 코로나 사태로 응급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이런 비통한 일이 생겼을까? 석연치 않은 의문을 도리질하며 차오르는 슬픔을 다독였습니다. 사랑을 남김없이 몽땅 쏟았기에 마지막 심장의 고동을 멈추고 귀향길에 오른 하늘 아버지 마련하신 시간임을 스스로 위로하면서요.

  첫눈에 작은 꽃님 아니냐고 마스크까지 쓴 저를 알아본 낯선 분은 가깝게 지내던 본당의 지인이시랍니다. 선배들에게 ‘언니’라 부르던 들꽃님은 저에겐 늘 ‘작은 꽃님~’ 그렇게 부르셨죠. 어쩌면 예비하신 섭리였는지, 유가족과 그분의 청으로 고별예식 사진을 찍고 들꽃님의 마지막 모습을 단장하게 되었습니다. 흰 장갑을 끼고 뒤로 눕혀진 화관을 조심스럽게 앞머리에 씌운 후 손잡아 마지막 고별인사를 했던 한해의 끝자락을 돌아봅니다. ‘아무것도 너를’ 목이 메 부를 수 없었던 이별가, 코로나 안전 수칙 준수로 야외 파킹장에서 함께 하던 회원들의 정성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가르멜의 한 가족임을 깨닫습니다. 고별예식이 끝난 후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서성이던 회원들, 차 안에서 누군가의 통곡 소리를 뒤로하고 영광의 신비를 바치며 돌아오던 날이었습니다. 생각할수록 눈물이 그렁그렁 목이 아파오지만, 사랑스러운 발자취에 차오르던 슬픔이 아름다움으로 정화됩니다. 이젠 천상의 가족들 특히 가르멜의 성인성녀와 사랑하는 분들을 만나 아버지 집에서 행복하리라고.

  지난가을, “엄마, 선물 왔어!” 막둥이가 전해 준 박스엔 초승달과 삼색의 잠자리 태양열 정원등이랑 외손자 루카스의 영양제가 들어있었지요. ‘참 예쁜 하루네요.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우리 아기들 비타민 사는 편에 루카스 생각이 나서요. 옆에 계셔주심에 감사드립니다.’라던 뜻밖의 선물. 회보에 실린 글 중, 에디트 슈타인이 태어나신 속죄의 날과 저의 생일 이야기를 허투루 여기지 않고, 생일 선물을 보내주셨습니다. “지금 잠자리와 놀고 있어요. 기쁨이 파문되어 퍼져 나가는 환희예요.”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제 생일은 음력이에요~ 웃음꽃을 피우던 날이 선연합니다. ‘오늘 음력 0월 00일이네요.’ 잊지 않고 거듭 축하의 인사를 전해 주던 그날은 마침 추수감사절이었지요. 둥굴레 뿌리와 꽃씨 몇 가지 곁들여 보낸 성탄 선물을 받고 잘 키우겠다며 기뻐하시더니 지금은 천상에서 정원지기이신 님과 꽃을 가꾸며 행복하리라 믿습니다.

  비는 그치고 맑고 따스한 겨울 볕이 마치 봄날 같은 청명한 새해를 맞았어요. 세찬 비바람에 잎사귀를 떨군 빈 가지마다 꽃망울이 빗방울처럼 맺혔습니다. 아기처럼 순한 청매 한 송이가 옆 가지엔 마치 삼위일체인 양 세 송이가 피어 있어요. 꽃을 좋아하던 들꽃 님 “새해 첫 손님, 청매가 폈어요!” 티 없이 맑은 창공으로 꽃소식을 전합니다. 때마침 답신처럼 핸드폰이 띵~ 울리네요. 세상도 사람도 다 꽁꽁 얼었다는 지리산 자락에서 보내온 ‘... 여여 하시기를....’ 들꽃님처럼 꽃을 좋아하는 시인의 새해 인사입니다. 여여(如如), 가만 떠올리기만 해도 찾아오는 고요 그 안에 담긴 변함없음에 수선스러운 저의 마음을 잠재웁니다.

  밤마다 어둠 속에서 포근한 달빛 등이 잠자리 스무 마리와 아름답게 빛을 발합니다. 사람마다 간직한 아픔 한 자락씩, 그 아픔을 눈물로 나누던 어느 해 연피정에서 한방을 쓰던 인연이 때때로 아픔으로 다가왔답니다. 깜깜한 밤에도 온전한 봉헌으로 그대의 일생은 순간순간이 꽃으로 피어나는 화양연화(花樣年華)였음을 두고 간 마음자리마다 아름답고도 빛나는 사랑이란 꽃밭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엄동의 시린 날이 가고 봄날이 찾아오듯 허방을 딛던 애도의 시간을 지나 다시 마주 볼 부활의 그 날을 희망합니다. 우리는 기도의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언제나 함께할 거니까요. 그대의 사랑이 빛나는 작은 꽃밭에 ‘영원한 사랑’이란 꽃말을 지닌 도라지 꽃씨를 뿌렸어요. 사랑하는 윤수옥 사랑의 수산나 들꽃 님! 하늘 정원에서 사랑하는 님과 영원한 복락을 누리며 길이 평안하소서.

* 화양연화(花樣年華):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 삶이 꽃이 되는 순간

** 추성부: 중국 송나라 문인 구양수가 가을바람 소리를 지은 장문의 서정시

[관구총무참사]

윤수옥 사랑의 수산나 들꽃 님!
영원한 복락을 누리며 길이 평안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