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40
3월25일[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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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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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kHQv1llxLr8 (김정현 요셉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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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제나 자신의 근본을 잊지 않았던 마리아!>
여러분들 혹시 누군가로부터 그냥 사랑이 아니라 총애(寵愛), 그러니까 각별한 사랑을 받아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런데 가브리엘 천사의 메시지에 따르면 나자렛의 마리아는 하느님으로부터 총애를 받았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다른 누구도 아닌 하느님으로부터 총애를 받다니, 마리아는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고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으로부터 총애를 받은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녀가 지니고 있었던 한결같은 겸손의 덕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우리 하느님은 참 묘하신 분이십니다. ‘내가 누군 줄 알아? 내가 하루에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는 줄 알아? 내가 사순시기를 맞아 얼마나 많은 보속과 참회, 자선을 행하는지 알아?’ 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서는 추상같은 불벼락을 내리십니다.
“너희 이 위선자들아! 독사의 족속들아, 회칠한 무덤들아!”
그러나 언제나 자신의 근본을 잊지 않았던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 자신이 탄생하실 메시아께서 머무르실 거처요 궁방으로 간택 받았지만, 스스로를 향해 언제나 주님의 비천한 종일뿐이라는 신원 의식을 마음 깊이 간직했던 마리아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사코 자신을 낮추는 마리아를 절대로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그녀를 총애하시고 애지중지하십니다. 그녀를 높이 높이 들어 올리십니다. 그녀에게 화려한 옷을 입혀주시고 찬란한 왕관을 씌워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사도들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인류의 어머니로 격상시키십니다. 놀랍게도 거기에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마침내 마리아를 하늘의 어머니, 하늘의 여왕으로 임명하십니다.
그런 놀라운 변화의 첫 출발은 마리아의 지극한 겸손이었습니다. 그녀의 용기 있는 순명이었습니다. 겨자씨만큼 작은 신앙, 그러나 무럭무럭 성장해나간 신앙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복음 1장 3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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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VtwcOJnbN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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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은?>
부모가 자녀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 무엇일까요? 자녀를 공부시키는 일일까요? 자녀에게 밥을 주는 일일까요? 자녀의 병을 치료해주는 일일까요? 그런 것 만으로는 인간 다운 사람으로 성장할 수 없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자녀에게 자신의 ‘자존감’을 물려주는 일입니다.
여기에 어머니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자라야 했던 한 불운했던 한 사람을 소개 시켜드립니다. 바로 세기의 스캔들로 유명한 에드워드 8세입니다. 에드워드 8세는 1894년 6월 23일 윌리엄 5세와 메리 왕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충분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특히, 어머니 메리 왕비로부터 낮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메리 왕비는 누나 프레드리카를 에드워드 8세보다 더 사랑하였고, 에드워드 8세는 이런 대우로 인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에드워드 8세는 그의 취향과 생활 방식으로 인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는 많은 파티를 열고, 여성들과의 사적인 만남을 즐겼으며, 스포츠와 항해를 즐겼습니다. 그는 특별히 유부녀들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월리스 심슨이라는 미국 여성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역시 유부녀였습니다. 월리스 심슨은 이미 이전에 두 번의 결혼을 한 여성이고 외모도 예쁜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마치 엄마처럼 에드워드를 좌지우지하였습니다.
에드워드는 자신을 아이처럼 여기는 월리스에 깊이 빠졌습니다. 꼬집혀서 울면서도 개 흉내를 내라면 그렇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월리스는 에드워드에게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사업적인 관계로 만났던 것입니다. 그녀는 이전 남편을 사랑하고 있었고 에드워드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아버지인 윌리엄 5세의 왕위 계승자로 지위를 높였지만, 월리스와의 결혼을 위해 1936년 12월 11일에 왕위를 포기합니다. 월리스는 전 세계의 악녀로 미움을 받았고 왕위까지 포기한 에드워드에게 도망치지 못하고 평생을 그의 엄마처럼 옆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에드워드는 죽기까지 자신을 아이 취급하는 월리스를 엄마로 여기며 재미 없는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합니다.
이것이 부모로부터 자존감을 물려받지 못한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부모는 에드워드에게 사랑 외에는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가치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도, 타인도 불행한 삶을 살게 만들었습니다.
이와 대조적인 이야기도 있습니다. 에드워드 8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알버트 조지 6세와 왕비 엘리자베스의 이야기입니다. 영화 ‘킹스 스피치’에도 나온 이야기인데 국왕이 되었지만, 말더듬증이 있었습니다. 형 에드워드처럼 알버트는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왕따였고 말더듬증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알버트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알버트의 말더듬증을 이길 수 있는 해결책을 알고 있는 말더듬증 치료사 라이온셀 로그를 찾아가 그의 말더듬증 원인을 찾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모든 영국 국민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왕이 되게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자존감입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지만 자존감도 가진 사람만이 줄 수 있습니다. 자존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 자신의 가치 평가입니다. 곧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주는 일만큼 큰 일이 없습니다. 이 믿음이 결국 스스로의 병을 고치고 건강한 사람이 되게 하고 공부를 열심히 할 마음을 품게 하고 자신도 자녀를 탄생 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자신이 가진 자존감을 선물합니다. 자존감은 자기가 누구냐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주는 것만큼 큰 일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브리엘 대천사는 성모 마리아께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것이란 믿음을 주십니다. 하느님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실 것이란 믿음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이 믿음은 하느님의 권능을 지닌 천사만이 줄 수 있습니다. 천사는 말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하느님께서 하실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 인간도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하느님의 권능을 입은 새로운 가브리엘 대천사, 혹은 성모 마리아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든 인간이 하느님을 잉태하여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전하는 일일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이제 당신이 하느님을 잉태하고 그 자존감을 주시기 위해 엘리사벳을 방문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웃을 만나러 가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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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예수님께서는 12 제자를 선발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발 기준에 ‘충성도’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시자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습니다. 심지어 어떤 제자는 옷을 벗고 알몸으로 도망갔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 넘겼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위라고 칭찬하셨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고난의 현장에 남자 제자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베로니카는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렸습니다. 예루살렘 여인들은 울며 예수님 고난의 길에 함께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여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드리고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던 것도 마리아입니다.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찾아갔던 것도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것도 마리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참된 평화를 주셨습니다. 마리아에게 첫 번째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알렸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이 마리아를 ‘막달라 마리아’라고 부릅니다. 위대한 마리아라는 뜻입니다. 오늘의 교회에도 위대한 마리아들이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위대한 마리아의 원형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바다의 별, 우리의 어머니, 천상의 모후, 정의의 어머니’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생애는 ‘고통의 바다.’였습니다. 어린 아들을 성전에 봉헌했을 때 시메온으로부터 가슴이 찢어지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 어린 아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했습니다. 어린 아들을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는 길에 잃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미쳤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보았고, 죽은 아들을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성모님은 그런 고통 중에서 하느님의 뜻을 보았고,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였습니다. 성모님은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며 자신의 몸이 구원 사업의 도구가 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성모님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잔치의 즐거움이 계속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 또한 성모님의 그런 마음을 아시고, 아직 때가 되지 않았지만 혼인잔치를 더 풍요롭게 하셨습니다. 성모님은 혼인잔치에 손님으로만 간 것이 아니라, 그 잔치에 부족함이 없는지를 살피시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성모님의 그런 마음을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웃의 아픔을 헤아리는 마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마음, 자신의 고통 보다는 사도들을 추스르고 교회를 걱정하는 마음, 바로 그것이 성모님의 마음입니다. 성모님처럼 해야 할 일을 분별하여,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열린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 또한 ‘위대한 마리아’의 삶과 신앙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신앙인은 아무런 고통이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고통 중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깨닫는 사람들입니다. 고통 중에 세상을 원망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은 그런 고통 속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고통 중에서 인내를 배우고, 인내는 겸손을 알게 하고, 겸손함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게 합니다. “천주의 성모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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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6-38: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이다. 하느님께서 마리아의 응답을 통해 사람이 되시는 위대한 사실을 오늘 복음은 전해주고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다는 것은 곧 인간의 차원이 하느님의 차원으로 들어 올려졌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하느님과 같이 되게 하려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이다. 하느님의 뜻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은 이제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룰 수 있게 하였고, 그 마리아의 자세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범이 된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가 이어지고 있다. 복음에서는 가브리엘 천사가 등장하는데,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힘이라는 뜻이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28절) 이런 인사는 남자가 들은 것이 아니라 오직 마리아에게만 주어진 인사였다. 주님께서는 그냥 마리아를 보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의 새로운 신비를 통해 마리아에게로 내려오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28절) 주님께서는 그냥 마리아를 보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의 신비를 통해 마리아에게로 내려오시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천사를 바라보던 그 자리에서 하늘의 심판관을 몸에 받아 모시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느님께서는 한 처녀를 당신의 어머니로 만드셨고, 당신 여종을 어머니로 삼으셨다. 온 세상도 하느님을 품지 못하지만, 하느님은 온전히 그 품에 오시어 사람이 되셨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31절) 천사는 마리아에게 하느님께서 그녀 안에서 행하시는 거룩한 신비를 드러내 줄 아기에 대하여 말한다. 마리아는 처녀로서 어머니가 될 것이다. 그 아기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 되실 분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의미한다. 그분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세상을 다시 창조하실 분이시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34절) 예수님의 탄생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 이 물음은 동정 잉태라는 신비에 대한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천사는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내려오시어 잉태하리라고 한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35절) 마리아가 열매를 맺게 하신 분은 물 위를 감돌며 창조를 이루시는 성령이시다(창세 1,2 참조).
마리아가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써 아들이신 말씀을 잉태하시게 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말씀을 잉태하고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이웃에게 낳아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말씀을 잉태한다는 것은, 마리아와 같이 자신의 인간적인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버려야 한다. 나 자신을 온전히 버리지 못하면 주님을 올바로 따를 수 없다. 하느님의 말씀을 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매 순간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자신을 끊고 자신을 버리는 고통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우리는 마리아와 같이 말씀을 잉태하고 그 말씀을 낳아줄 수 있을 것이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마리아는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하와의 불복종을 되돌려 놓는다. 그리하여 한 천사였던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첫 번째 처녀의 타락이 다른 천사의 말을 받아들인 이 처녀 마리아의 믿음으로 극복되고 있다. 마리아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평범한 한 시골 처녀였다.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이고 평범한 삶을 사는 인간이었다. 그 마리아가 그렇게 하느님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고백하고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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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1)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사순 시기의 한창 때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신다는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하느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마리아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이름이면서 성경에서 여자 이름으로 많이 언급되기도 합니다. 마리아는 구약 성경의 미리암에서 유래한 것으로 짐작합니다. 미리암의 뜻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이름을 ‘미르’와 ‘얌’의 결합으로 생각합니다. 얌은 히브리 말로 호수나 바다를 뜻합니다. 미르는 쓴맛 또는 (향기가 좋지만 쓴맛을 내는) 몰약이나 물방울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어느 하나로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바다라는 말과 합쳐져서 바닷물(방울)이나 바닷물의 쓴맛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우리가 흔히 성모님을 나타내는 칭호로 사용하는 ‘바다의 별’도 마리아라는 이름과 맞닿아 있습니다.
마리아께서는 복음서에서 아주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자 교회의 어머니이시며 예수님의 활동에 함께하신 동반자이시면서 구원의 중개자이시기도 합니다. 마리아께서는 천사의 말씀을 “곰곰이” 되새기시며 하느님의 뜻을 찾으시고,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씀으로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이십니다.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불가능해 보이는 동정녀의 잉태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느님 말씀에 모든 것을 의탁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마리아께서는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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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선포는 메시아의 탄생을 나타내는, 예수님의 탄생을 가리키는 유명한 예언입니다. 이제 이 예언은 나자렛에 사는 한 처녀, 마리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는 예언의 성취이자 구원을 향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천사의 인사말은 예수님 탄생의 의미를 잘 드러냅니다. 기쁨의 실현이자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사건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힘이 되는 약속은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예언자들을 파견하거나 그들이 전쟁에 나설 때에도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 강한 힘이었습니다.
이제 천사는 마리아를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려 주고 그 기쁨을 전합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마리아의 협력을 통하여 이루십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마리아의 응답은 개인의 응답일 뿐만 아니라 믿음을 간직한 공동체의 희망을 담은 표현입니다.
마리아와 함께 모든 믿는 이들은 하느님께 부름을 받은 셈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말씀이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에 합당한 응답은 우리의 신앙과 삶을 통하여 표현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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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루카가 전하는 예수님의 탄생 예고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1,5-25 참조) 다음에 자리하는데, 이러한 순서는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파견된 이입니다.(7,18-35 참조)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두 단계로 나누어 선포됩니다. 먼저,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아기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하여 예고합니다.(1,30-33 참조) 그 아기의 이름은 ‘예수’이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 곧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며, 다윗의 후손으로 그의 왕권을 누릴 것입니다.
다음은, 태어날 아기가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합니다.(1,35-36 참조) 예수님의 잉태는 성령께서 마리아 위에 내려오시고 그분의 힘이 마리아를 덮음으로써 일어났습니다.
‘내려오다’와 ‘덮다’와 같은 동사는 하느님의 영과 능력의 신비로운 개입을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창조적 능력을 지니신 성령의 개입으로 태어날 아기의 신적 정체성이 구체적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예고에 대한 마리아의 반응은 신앙의 모범을 보여 줍니다. 그는 천사를 통하여 전달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세례자 요한의 잉태 소식을 들은 즈카르야의 반응(1,18 참조)과 대조됩니다.
우리는 마리아에게서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이해하고 응답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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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성경에서 하느님께 사명을 부여받는 이들은 하느님의 보증으로 종종 듣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판관기 6장 12절 / 역대기 22장 11절.16절)입니다.
주님께 파견되는 이, 주님의 사명을 맡은 이들에게 주님께서 함께 계시리라는 약속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천사는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고 말하며, 마리아에게 성령이 내려와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그녀를 덮어, 그녀가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을 낳게 될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큰 은총을 받았으므로 기뻐하라고, 또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 선택받은 이, 하느님의 총애를 입은 이는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하시기에 자신이 받은 임무를 반드시 완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임무를 완수하는 것은 그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직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의 순종으로 엄청난 일이 이루어집니다. 교회는 마리아가 천사의 말을 받아들인 순간 그 태중에 예수님께서 잉태되셨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아가 하느님께 철저히 순종한 그 순간 온 세상의 구원자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 마리아가 들은 인사말, 곧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는 단순히 마리아만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말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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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순명할 수 있기를 기도 합니다>
일상적으로 합리적인 말을 하면 알아듣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고집불통도 있습니다만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말을 하면 그에 따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상식에 어긋나고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느님의 뜻으로 믿고 따르는 때도 있습니다. 신앙의 선조인 아브라함은 일가친척을 떠나 낯선 곳으로 향했고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는 역할을 했던 모세도 처음에는 할 수 없다고 했지만, 하느님의 도구로 충실했습니다. 기드온은 하느님을 믿고 불과 삼백 명으로 십오만 병사에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요셉은 임신한 약혼자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라는 꿈의 현시를 받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1,30).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이해되지 않는 이 말씀에 결국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바로 이것을 순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구원의 역사는 순명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것에 따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순명이라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인간의 협력과 동의로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세상은 바로 마리아의 믿음과 믿음에 따르는 순명으로 인하여 구세주의 탄생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의 풍습을 생각하면 약혼한 처녀가 부모도 모르고 약혼자도 모르게 임신하여 배가 불러온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처지가 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응답은 죽음을 각오한 대답이었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순명은 인간이 바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바칠 것을 다 바친 것입니다. 우리도 성모님의 마음을 닮아 하느님의 뜻 앞에서는 미루지 않는 결단을 내려 협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루카1,37) 하지만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결코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복종 없이 천명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이현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자유의지를 가진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걸작품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있는 자리가 어디이든 주님의 뜻에 기꺼이 순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 자리에 하느님께서 분명히 역사하십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당신이 쉼을 원하시면 저는 사랑으로 쉬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일하라고 명을 내리시면 저는 일을 하면서 죽고 싶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일상 안에서 언제든 주님의 말씀에 순명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해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순간순간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연장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연장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도구, 연장이 되는 기쁨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1,35). 하였습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 내려오시고 높으신 분의 힘이 우리를 덮어 죽기까지 주님의 말씀에 순명 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어머니,
그 누가 십자가 없이 천국을 바라리오.
어머님
인간으로 볼 때 당신처럼 불행한 사람이
인류 역사상 또 있겠습니까?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
천상의 이 말을 듣고나서
당신의 역사는 얼마나 파란이 많았습니까?
남편 요셉에 대한 걱정,
말구유에서 아들의 해산,
이집트로 피난,
마침내 십자가 곁에서
외아들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당신에게 그보다 더한 십자가가 있었겠습니까?
성총을 충만히 받는다는 것이란
반드시 지상의 행복이나 평화를 받는 것이 아님을
저는 깨달았습니다.
육신의 안락은 물론
정신적 안락을 의미하는 것도 아님을 알았습니다.
어쩌면 그 반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총을 구하는 것은 오히려 지상에서 고통의
십자가를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원죄없이 잉태한 당신이
여인 중에 총복을 받으신 당신이
누구보다 가혹한 십자가를 져야 했고
누구보다 처참한 고통을 받았거늘
그 누가 십자가 없이 천국을 바라리오!
- 배문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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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영화를 보면 주연 배우만 있지 않습니다. 만약 주연 배우 1명만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면 재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영화에는 조연도 필요하고, ‘지나가는 행인 1’과 같은 엑스트라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화의 내용이 풍성해집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주연의 역할도 또 조연의 역할도, 엑스트라의 역할도 모두 필요합니다. 물론 나의 세계 안에서는 자신이 늘 주연이지만, 함께 사는 세상 안에서는 어떤 역할이든 모두 소중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늘 주연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자기 뜻과 다르면 틀렸다면서 잘못된 사람으로 취급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하느님께 불평불만을 하고 화풀이하듯이 하느님을 떠나겠다는 말까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선 최고의 연출자이신 하느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영화에서도 감독의 뜻을 제대로 알아야 배우들이 제대로 연기할 수 있습니다. 감독의 뜻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 그 영화에 함께할 수 없습니다. 감독의 뜻은 전혀 알지 못하면서 자기 뜻대로만 하겠다면, 그 영화는 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감독은 아무리 그 배우가 최고의 배우라고 한들, 그 영화에서 배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삶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고, 따라야 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합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 뜻에 맞춰서 흘러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소설가 이디스 워튼은 빛을 퍼뜨릴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말했습니다. 촛불이 되거나, 그것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주연급의 촛불도 빛을 퍼뜨릴 수 있지만, 조연급의 거울도 빛을 퍼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 안에서 어떤 삶이든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며 그 뜻을 따를 때, 커다란 작품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탄생 예고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천사의 말에 성모님께서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믿음에 찬 순명, 그 순명으로 큰 시련을 겪으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모님께서는 순명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성모님께서는 단 한 번도 주연의 삶을 사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이 어떤지만을 살펴보시고 그 뜻을 향해 나아가실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이 세상에 구원의 빛이 퍼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자기 역할을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주연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철저하게 순명하는 조연이 더 하느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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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만남>
루카 1,26-38 (예수님의 탄생 예고)
그때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만남>
그분
나에게
한 걸음
이어 한 걸음
나
그분께
한 걸음
이어 한 걸음
멀리
있는 듯
어느새
서로 스미어
그분 이미
내 안에
나 이미
그분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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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받아들이고, 모셔 들이자!>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요즘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불현듯 어둠의 감정이 스며들곤 합니다. 그중 하나가 과거를 생각하면 과거의 죄와 잘못이 가슴을 후벼파고,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과 걱정이 가슴에 스며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말로만 듣던 나이 현상이 제게도 생긴 겁니다.
그리고 요즘 제가 프란치스코의 권고를 <온라인신학원>에서 강의하고 있는데 지난주 순종에 관한 강의를 할 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순종이란 나의 행복을 하느님 뜻에 맡기는 것이라고.
그리고 어제 미사 중에는 이런 기도를 마음속으로 또 했습니다. 제게 어떤 것이 주어져도 당신의 뜻과 섭리에 감사하게 하소서!
그동안 미래 불안이 엄습할 때마다 어떤 것이 제게 닥치더라도 주님께는 그것을 잘 받아들일 수 있게 해달라고 빌고 제게는 잘 받아들이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곤 했는데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정도를 넘어 감사하게 해달라는 거였지요.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그래서 내게 주시는 것은 다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그리고 하느님 뜻에 나의 미래와 행복을 맡겨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시고, 마리아 품에 잉태되셨습니다.
오늘 성모님께서는 당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하면서도 주님께서 당신에게서 태어나실 것이라는 예고를 받아들이셨습니다.
매우 두려우셨고 불안하셨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하느님을 더 믿으셨고 그분께 매달리셨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 미사 감사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성령의 힘에 감싸여 탄생하시리라는 천사의 알림을 동정 마리아께서는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고 새로운 인류의 맏이이신 외아드님을 성령으로 잉태하시어 당신의 흠 없는 태중에 모셔 들이셨나이다.”
<받아들이심>과 <모셔 들이심>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성모 마리아처럼 우리도 오늘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주님을 모셔 들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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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 사랑과 겸손, 경청과 순종, 찬미와 감사 -
가톨릭 교회의 전례가 참 고맙고 절묘합니다. 이 또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교회의 전례를 통해서 참으로 디테일에 강한 하느님의 사랑이 잘 드러납니다. 사랑할 때 아름답습니다. 전례의 아름다움은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광야의 사순시기, 올해 사순 제4주간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기쁨의 축제들로 가득합니다.
기쁨의 장미주일에 이어 월요일은 성 요셉 대축일, 화요일은 사부 성 베네딕도 별세 축일, 그리고 오늘 토요일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특히 매해 광야의 사순시기에 맞이하게 되는 성 요셉 대축일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의 선물이 참 고맙습니다. 벌써 만개滿開하기 시작한 온갖 봄꽃들이 대축일을 경축하며 이미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선물하기 시작했습니다.
매해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강론을 준비하며 늘 영문 주석을 읽을 때 마다 주석 앞부분 말씀이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인도의 시성, 기탄잘리의 시인, 우리나라를 “동방의 등불”이라 격찬했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1861-1941)가 한 말입니다.
“모든 아기의 탄생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희망의 표지이다.”
그러니 모든 아기의 탄생은, 특히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통해 태어나게 될 그리스도 예수님은 얼마나 큰 축복의 선물인지 깨닫습니다. 그대로 제1독서 이사야서의 예언의 실현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라는 뜻의 “임마누엘” 이름은 얼마나 멋지고 은혜로운지요! 비단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가 또 하나의 임마누엘입니다. 하느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타고르의 말씀과 오버랩되어 얼마전 읽은 기사 내용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세계 최저 출산율 0.78 시대! 가임기 여성 한명이 평생 동안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아이의 숫자가 0.78명이라는 것이다. 외국인 유입이 없이 인구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합계 출산율이 2.1명을 넘어야 한다. OECD 가입 국가 중 합계 출산율이 1명 밑으로 떨어진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모든 아기의 탄생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희망의 표지인데 웬지 불길한 느낌을 주는 한국의 현실입니다. 아이들 보기 참 힘든 시절입니다. 저의 1970년대 초등학교 교사시절 80-90명의 참 다양한 한반 아이들이 함께 즐거이 뛰놀던 모습이 이제는 아득한 꿈처럼 생각됩니다.
불암사 개 선재가 아침 일찍 수도원을 방문하여 수도원 동생 개들 다섯을 만날 때 반갑게 뛰노는 모습이 역시 함께 뛰어 노는 아이들의 기쁨을 연상케 하니 더욱 아이들이 그리운 시절입니다. 예전 학교나 마을은 언제든 아이들 노는 소리로 왁자지껄했습니다. 이젠 학교 운동장도 마을도 아이들 소리 들어보기 힘든 텅 빈 침묵의 무덤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마침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던 조선을 위해 1929년에 동아일보에 기고했던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동방의 등불”이란 시가 좋아 오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선물로 나누고 싶습니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에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 벌리는 곳,
무한히 퍼져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당으로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다시 깨어나소서.”
참 고무적이고 위로가 되는 시요 우리를 참으로 분발케 하는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다시 깨어나” 오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에 주님께서 주시는 가르침을 배우고 싶습니다.
첫째, 하느님과 사랑과 겸손을 배웁니다.
참으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복음입니다. 하느님 친히 주도권을 잡으시고 그 존엄하신 분이 이름도 없는 나자렛 고을의 마리아를 당신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찾아 나서는 겸손이 감동입니다. 말그대로 사랑의 겸손입니다.
참으로 눈밝으신 사랑의 하느님이시기에 그 촌구석에 있는 마리아를 눈여겨 보신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 누구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좌절할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눈여겨 주목하시다 때가 되면 개입하셔서 큰 도움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를 찾아냈을 때 하느님의 기쁨은 얼마나 컸겠는지요! 바로 다음 인사말이 이를 입증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감격에 벅찬 하느님의 환호소리처럼 들립니다. 바로 이 말씀은 제가 고백성사시 보속 처방전으로 자주 써드리는 말씀입니다. 언젠가 이 처방을 받았을 때 “보속補贖이 아니라 보물寶物입니다!” 환호하던 어느 수녀님이 기뻐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연거퍼 하느님의 사랑을 전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참으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 그리고 하느님의 총애를 받는 것은 믿는 이들 누구나의 깊은 영적 소망일 것입니다.
둘째, 마리아의 경청과 순종을 배웁니다.
주님 천사의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마음에 담아두고 생각하는 마리아의 침묵과 경청의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마음의 귀를, 마음의 눈을 활짝 열고 주님께 온전히 집중하는 모습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도 혼자 일방적으로는 일을 못하십니다. 상대방 인간의 협력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십니다. 이어지는 마리아의 경청의 겸손한 믿음에 마음이 놓이신 주님은 당신 속내를 다 드러내십니다. 이 또한 모험입니다만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한없이 사랑하시고 신뢰하신 것입니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이어 하느님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당신 속내를 완전히 다 밝히십니다. 그처럼 마리아를 사랑하고 신뢰하셨던 것입니다. 시종일관 겸손히 침묵중에 경청하던 마리아의 “예스(YES)”의 순종의 응답입니다. 말그대로 사랑의 순종, 믿음의 순종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한번으로 끝난 믿음의 순종이 아닙니다. 시종여일, 늘 아드님과 함께 하시며 믿음의 순종으로 일관하신 영원한 “예스맨(YES-MAM))”성모님이십니다. 참으로 위대한 믿음은 끝까지 순종하며 책임을 다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아드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실 마지막 순간까지 온전히 함께 하시며 책임을 다하신 마리아 성모님이셨습니다.
부전자전이란 말도 있지만 저는 모전자전이라는 말마디가 더 적절하다 생각됩니다. 제2독서 히브리서 아드님의 고백은 그대로 마리아 성모님의 고백을 닮았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 삶의 존재이유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러 온 우리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나에게 주님의 뜻은 무엇이며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랑의 순종, 믿음의 순종을 다한 삶이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셋째, 우리의 찬미와 감사의 응답입니다.
우리는 오늘 하느님으로부터 사랑과 겸손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마리아 성모님으로부터 경청과 순종의 믿음을 배웠습니다. 이에 대한 우리의 당연스럽고 자연스런 응답이 찬미와 감사입니다. 찬미와 감사와 더불어 저절로 주님의 사랑과 겸손을, 마리아 성모님으로부터 경청과 순종을 배우게 됩니다. 알렐루야 찬미로 살다가, 아멘 감사로 마치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아름답겠는지요!
삶은 선물입니다.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예수님이요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아니 우리 하나하나 역시 임마누엘 하느님의 귀한 선물입니다. 그러니 한결같이 주님의 사랑과 겸손, 마리아 성모님의 경청과 순종을 배우고, 찬미와 감사의 응답의 삶에 충실하도록 합시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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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1,31)
<우리도 도구가 되자!>
오늘 복음(루카1,26-38)은 '예수님의 탄생 예고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이 사실을 기념하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의 삶 속으로 보내주십니다. 그 이유는 오늘 2독서(히브10,4-10)가 전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를 죽음에서 구해주시기 위함입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이 '뜻' 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브10,7.10)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도구'가 필요했습니다. '그 결정적 도구,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도구가 되신 분'이 바로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갈릴래아 지방의 나자렛 처녀인 '마리아'입니다.
하느님의 소식을 전하는 가브리엘 천사가 '하느님의 소식(영보.領報)'을 마리아에게 전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릴 것이다."(루카1,30-32)
마리아는 이 엄청난 소식을 받아들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에 적극 동참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이신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주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가 되신 마리아처럼, '하느님 구원 계획에 도구요 협조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의 이 부르심, 이 뜻에 우리도 마리아처럼 순종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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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eHZgI43eiX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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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루카 1, 31)
겨울 다음에는
봄이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삶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우리들 삶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삶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새 역사가
마리아로부터
시작됩니다.
모든 것은
이렇게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새로워 집니다.
누군가의 순명으로
우리모두
영롱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말씀하여 줄
마리아의 믿음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행복한
일입니다.
하느님을 품어야
말씀을 품어야
빛날 수 있는
우리의 시간입니다.
주님 탄생 예고는
가장 아름다운
희망의 소식입니다.
희망의 완성은
하느님의
탄생입니다.
이 모든 것과
맞바꿀
하느님의 진리가
있습니다.
받아들여야 할 것과
나누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하느님의 사랑임을
절실히
알게 됩니다.
간절하고
간곡한
하느님의
희망이
마리아를
찾아 오시듯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오늘의 말씀이
내일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음을 믿습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일 때까지
삶은 뜨거울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에게로
사람은
하느님께로
마음을
열어야 하는
마음의 잉태입니다.
잉태 예고가
새 희망의
시작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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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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