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와 뒤안 툇마루 / 서정주
외할머니네 집 뒤안에는 장판지 두 장만큼한 먹오딧빛 툇마루가 깔려 있습니다.이 툇마루는 외할머니의 손때와 그네 딸들의 손때로 날이 날마다 칠해져 온 것이라 하니 내 어머니의 처녀 때의 손때도 꽤나 많이는 묻어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은 하도나 많이 문질러서 인제는 이미 때가 아니라, 한 개의 거울로 번질번질 닦이어져 어린 내 얼굴을 들이비칩니다.
그래, 나는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되게 들어 따로 어디 갈 곳이 없이 된 날은, 이 외할머니네 때 거울 툇마루를 찾아와, 외할머니가 장독대 옆 뽕나무에서 따다 주는 오디 열매를 약으로 먹어 숨을 바로 합니다.외할머니의 얼굴과 내 얼굴이 나란히 비치어 있는 이 툇마루에까지는 어머니도 그네 꾸지람을 가지고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감상 박병두 시인·수원영화예술협회장
서정주는 노년에 이르러 전통을 소재로 한 시들을 많이 남겼다. 그는 전통적인 신화나 설화 등에서 소재를 차용하였다. 즉 널리 알려졌거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시의 소재로 삼아 자신의 정서와 결합시킨 것이다. 이 시 역시 그런 특성을 엿볼 수 있다.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는 아름다운 우리말이 시어로 사용되어서 읽는 재미도 있다. 또 시인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누구나 공감할 만한 옛 풍경을 담은 이야기를 하였으므로 보편적 정서도 있는 시이다. <외할머니의 뒤안 툇마루>는 어린 시절의 풍경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아기자기한 이야기가 아름다운 시어와 결합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출처] 경기신문 (https://www.kg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