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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삼미 슈퍼스타즈 |
2.청보 핀토스 |
3.태평양 돌핀스 |
4.현대 유니콘스 |
5.SK 와이번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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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1985년 전반기 (기간 = 3년 반) |
1985년후반기~1987년 (기간 = 2년 반) |
1988년 ~1995년 (기간 = 8년) |
1996년 ~1999년 (기간 = 4년) |
200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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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 창단 및 매각 비화
*팀이름을 누르면 자세한 이야기가 쫘~악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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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천 최초의 구단 三美 슈퍼스타즈 | |
*구단 선정 |
1981년 프로 야구 출범 준비 과정중 6개로 나뉜 각 지역의 연고 구단 선정 원칙은 "재무구조가 튼튼한 대기업중 그 기업 총수의 출신도별로 연고지를 정한다" 였다. 경기도,강원도, 이북5도를 연고로 하는 인천팀의 연고 구단으로 제일 먼저 지목을 받은 기업은 현대였다. 정주영회장이 강원도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측은 정회장이 88올림픽을 유치한 직후여서 올림픽에 전념을 다 하겠다고 야구단 창단을 거부한다. *짠물 생각 - 그때나 지금이나 정말 맘에 안들어... 두 번째 기업은 한국 화장품 이었다.당시 대한 야구협회장을 맡으며 실업팀을 운영하던 임광정회장은 연고지를 서울로 해줄 것과 기존 한국화장품 선수들을 그대고 유지시켜 줘야 한다고 우겨서 결국 실패.. 세 번째 기업 대한항공은 처음에는 호의적이었으나 유류파동으로 인한 회사의 적자를 이유로 결국 포기 하고 만다. 이때는 다른 지역의 연고 기업은 거의 확정됀 상태였는데, 충청도 지역을 맡기로 한 두산이 현대 의 불참을 알고는 대전 대신 인천으로 연고로 옮기 겠다고 요구를 한다. 하지만 대전 지역을 대신할 기업이 마땅치 않아 3년후에 서울로 연고지를 옮겨주기로 하고 대전지역을 두산에 맡긴다. 1982년 11월에는 인천을 제외하고 다른 지역은 모두 구단 선정이 완료돼, 인천만 골치덩어리로 남게된다.
결국 준비 위원들은 11월 25일에 정식 모임을 갖기로 하고 만일 그때까지 인천지역을 맡을 기업이 나타나지 않으면 인천은 빼 버리기로 한다. 그런데 인천 때문에 프로야구의 출범이 어려움을 겪는다고 소식이 나가자 삼미의 김현철 회장이란 사람이 준비위원에게 전화를 걸어와 인천 지역을 맡겠다고 한것이다. 그 시간은 25일 정식 모임 6시간전인 11시여서 더 극적인 것이였다. *영웅등장 준비 위원들도 처음엔 이름도 잘 들어 보지 못한 삼미 그룹이 참여 의사를 밝혀와 당황하기도 했다. 삼미는 서울에 있는 삼일 빌딩의 소유주로 삼미 철강,삼미 목재,삼미 해운등을 운영하는 기업이었다. 특히 인천에 자리잡고 있는 삼미해운으로 인해 인천에 연고가 있는 기업이기도 했다. 삼미는 대대적인 PR을 요구하는 소비재를 생산하는 기업이 아니였으나 김현철 회장의 뜻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오른쪽 두 번째가 김현철회장 김회장은 경기중을 졸업하고 미국 워싱턴 대학에 재학중일 때 MLB야구에 심취하기도 한 인물로 당시 나이가 31살밖에 안됀 젊은 회장이었다. 오죽했으면 25일 정식모임에 찾아온 김회장을 아무도 못알아봤을까...? *많은 사람들이 삼미가 인천을 자발적으로 맡고 나선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김현철 회장은 두산 박용곤 회장과 대학 선후배 사이로 두산이 인천을 맡으려다 밀리자 김회장에게 이를 권유해 일이 성사 된 것이라 한다. 이렇게 돼서 1981년 12월 11일 프로 야구 창립총회가 열려 프로야구의 출범을 알린다. *이렇게 인천 프로야구는 출발부터 우여곡절을 겪으며 시작을 알렸다. |
*창단 |
1982.2.5 인천 상공회의소 강단에서 삼미 슈퍼스타즈의 창단식을 갖고 삼미호의 출항을 만방에 알린다.
마스코트는 악의 무리에게서 지구를 지키는 "슈퍼맨" - 이 얼마나 대단 하고 웅대한가? 더욱 더 놀라운 것은 다른 팀과 달리 여자 마스코트도 있었다는 것. 바로 "원더 우먼" 일명 원더 빤스로도 불리곤 했다. '슈퍼스타즈'란 팀명은 김현철 회장이 미국 유학시절 미식축구에 심취해 있었는데 거기서 '슈퍼스타즈'란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그럼 삼미의 원년 멤버들을 알아 보자. *구단주:김현철 *단장:이혁근 *감독 :박현식 *코치:이선덕.이춘근 *투수:인호봉.이동주.박경호.김동철.이하룡.한상연.김재현.감사용.오문현 *포수:금광옥.김진철.최영환 *내야수:김구길.김경남.이철성.송경섭.조흥운.장정기.허운.이찬선.한인철. 김무관 *외야수:양승관.문주모.김호인.이경수.박준영 *짠물 생각 -이중에서 생각나는 선수 누가 있나요? 전 양승관.금광옥.조흥운선수 정도밖에 생강이 안나네요. 허운.김호인씨는 심판됐고 양승관.금광옥.김무관씨는 코치가 됐네요. <삼미의 원년 선수들>
허운 인호봉 조흥운 장정기 김호인 김재현
금광옥 김무관 감사용 오문현 양승관 |
*매각 |
1985.5.1삼미는 청보 그룹에 팀 매각을 발표한다. 매각의 원인은 84년 6월부터 삼미그룹의 주력회사인 삼미 해운의 적자 누적등 경영난과 성적부진 때문 이었다. 1차로 삼미 해운을 처리한 삼미그룹은 84년 그룹의 상징이었던 삼일빌딩을 상업은행에 290억에 매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82~84년 동안에 45억1천만원의 적자를 낸 야구단을 유지 할 수는 없었다. 많은 홍보를 필요로 하는 소비재 분야의 계열사가 전혀 없는 삼미 그룹의 성격상 야구단이 창출하는 효과를 전혀 누리지 못한데다 85시즌 개막과 함께 이어진 연패에 넌덜머리가 나 매각을 서두르게 된다. 이때 세운 기록이 18연패로 불멸의 최다연패기록이 된다. *짠물 생각-내가 기억하는데 그시절 TV광고에 삼미 그룹의 이미지 광고가 계속 나왔다. 삼미철강.해운등과 함께 슈퍼스타즈의 경기 모습도 들어 있었다. 타자가 공을 치는 모습이었는데 선수는 금광옥이었다. 어릴쩍 나는 그 광고를 보면서 맨날 꼴찌만 하는 야구팀이 광고에 나오는게 디게 웃끼다고 생각 했다. <= 옆의 사진을 누르면 그 광고를 다시 볼 수 있다. 감동~ 84년말부터 김현철 회장은 원매자를 알아 본다. 럭키금성(현 LG).한국화약(현 한화).한국화장품.농심등 그동안 프로야구에 관심을 보인 구단에 의향을 타진 했으나 70~80억원을 요구한 삼미에 반해 삼미의 어려운 사정을 아는 기업들은 40~50억원의 헐값을 요구해 계약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시 제7구단 창단권을 따낸뒤 가입금 30억원을 놓고 KBO와 실랑이를 벌이던 한국화약은 차라리 인천팀을 인수해 버리고 대전 지역 창단을 포기 할 것도 검토 했으나 그 역시 가격차이를 좁히지 못해 실패. 청보로 낙찰 되기전 가장 근사치로 접근한 곳은 럭키금성이었다.4월 중순 까지만 해도 양측은 거의 합의점에 이르렀으나 럭키금성이 다시 감가상각비의 명목을 들어 4억원을 더 깍자고 제의해 삼미의 감정을 건드려 무산 됐다.*LG 숭악시런 놈들... 그러다 청보가 갑자기 등장한 것은 두기업 오너의 학연이 크게 작용했다. 청보 김정우회장과 삼미 김현철회장은 경기고 선후배 사이로 평소 가까이 지내다 김현철의 사정을 알고 선뜻 구단을 인수 하기로 한 것이다. 매각 조건은 70억원 이었으나 현금이 아니라 삼미의 부채를 청보가 떠 맡는 것 이었다. *매각 대금은 70억원으로 발표 됐으나 실제로는 60억원 이었다고 한다.
*매각 협상을 끝 마치고 난 뒤 삼미의 김현철 회장(사진)은 하염없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고 한다. 얼마나 아쉬웠으면... 이렇게 삼미는 1982년 2월 5일 구단을 설립한지 1,233일만에 역사의 저 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
2.조랑말 청보 핀토스 | |
*창단 |
1985.5.1 청보의 야구단 인수 발표 - 너무나 생소한 기업이여서 팬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절 TV 광고 생각 나세요? 최 재성이 나와서 위아래 청으로 입고 나와서 청바지 선전하던거.
*위의 두 사진을 누르면 당시 최고 스타 까치 최재성의 광고를 볼 수 있다.
<= 어렵게 당시 최재성이 출연한 피토스 청바지 동영상을 구했다. 사진을 눌러 보시라~ 오~ 놀랍고도 새로워라~
청보 핀토스는 인천 야구장에서 창단식을 갇고 "프로야구에 새 바람을"이란 케치 프레이를 내걸고 85년 후기리그 부터 험난한 야구판에 뛰어든다.
*야구단을 시작 할 당시 청보는 라면 사업에도 뛰어 든다. 그래서 관중들에게 영라면이랑 사발면도 나눠 줬다. 하지만 맛이 없었다. 그랬으니까 망했겠지...
<= 옆의 그림을 보시라! 무슨 장면일까? 야구장에 써커스단이 나타났나? 핀토스라는 이름에 걸맞게 투수 교체시 말을 타고 투수가 등장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쇼킹한가? 역시 인천 답다.
*당시 청보의 라면 광고를 보고 싶다면 아래 그림을 클릭하기 바람. 정말 귀한 동영상이다. <가수 최성수가 선전한 알짜배기> <코미디언 이주일이 선전한 열라면> |
*매각 |
출범 당시 50대 기업에도 들지 못하던 청보는 야구단 출범당시 갓 시작한 라면 사업이 실패하고 주력업체인 풍한산업도 당시 면방직 업계의 불황으로 휘청 거린다. 연간 7~10억원의 적자를 보는 야구단의 운영은 벅찰 수밖에 없었다. 1987시즌부터 외한은행의 자금관리를 받아온 청보는 시즌초부터 구단 매각 작업에 나선다. 대상 기업은 한진.현대.대우.럭키금성.선경(현 SK).기아.태평양화학등이었는데 실질적으로 깊게 관여한 기업은 기아산업(당시 기아 프라이드)이었으나 결국은 실패 하고 만다. *만약 기아가 맡았으면 결국 기아도 망했었으니까 어짜피 또 구단이 바뀔 수밖에 없었네.쯧쯧 7월부터 태평양화학과 3개월간의 협상끝에 시즌 종료 직후인 10월 6일 50억원에 팀을 매각한다. 매각대금 50억원은 5년거치 5년 분활 상환의 조건으로, 또 현금이 아닌 부채를 떠 넘기는 것으로 한다 . 삼미에서 구단을 살 때보다 10억이나 밑진 것이다. 10월 6일 청보의 김정우 구단주는 KBO에서 구단 매각 승인이 나오자 삼미의 김회장과 마찬가지로 아쉬움의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전신 삼미에 이어 청보 또한 2년 반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우리 곁에 머물다 아쉬운 퇴장을 알린다. |
3.투수 왕국 태평양 돌핀스 | |
*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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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10.21 태평양화학은 청보로부터 구단을 인수 받는다. 빙그레의 창단전인 1984년에 이북 5도를 대표하는 제 7구단 창단을 희망했던 태평양화학은 창업주 서성환 회장이 황해도 출신으로 경기도에서 성장해 실향민이 많은 인천의 지연관계를 잘살려 새바람을 일으키리라는 기대를 모았다. 박정삼 단장.강태정 감독등 청보의 프런트와 선수단을 그대로 인수 한다. 태평양의 구단 명칭은 "태평양 돌핀스"라고 지어 졌다. 그런데 돌핀스라고 지어지기 전에 태평양은 원래 다른 이름을 정했엇다.무엇일까? 바로 "태평양 아모레"-아무리 화장품 회사라고 하지만 너무 심했다. 결국은 공모를 통해 "태평양 돌핀스"로 확정됐다. *짠물 생각 - 난 아직까지도 인천팀의 명칭들 중에 돌핀스가 제일 좋다. 인천 하고 딱 맞았는데... "돌핀스 돌핀스 무적함대 돌핀스..." 지금도 그때의 응원가가 떠오른다. 그때가 정말 좋았는데... "패기와 정렬의 돌핀스 돌핀스~ "이런 노래도 있었는데... |
*매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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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2월 태평양 돌핀스가 선경(현 SK)에 매각된다는 소문이 난다. 1991년말 태평양 증권을 선경에 매각할 때 야구단도 매각 대상에 올랐으나 선경측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90년대 들어 시장 개방으로 인한 태평양의 시장 점유율 하락과 야구단 성적의 하락이 맞물려 결국은 구단 매각을 결정한다. 그러다 1995년 8월31일 스포츠서울에 "현대 태평양 인수"란 1면 기사가 난다.
다음날 현대는 태평양 인수 기자회견을 갖았다. 인천 팬들은 8년이나 정을 준 태평양의 매각을 아쉬워 하면서도 지금까지와는 달리 재계 1,2위를 다투는 현대의 등장을 반긴다. *어느 골수팬 아저씨의 말을 빌리자면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이젠 더 이상 구단의 경영악화로 인한 구단 매각의 아픔을 겪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인천팬들중 나중에 현대가 인천을 헌신짝 차 버리듯 떠나갈 것을 예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아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그리곤 아낌없는 사랑을 쏟아 부었다.하지만 4년후 팬들에게 돌아온 것은 믿었던 현대에게서의 배신 뿐이었다. *짠물 생각 - 8월31일 오전 난 동인천 길병원에서 손목 물리치료를 받던중 옆의 환자와 물리치료사의 대화를 통해 태평양의 매각 소식을 처음 접했다.하지만 농담인줄 알았다.아직 시즌중이었고 전년도에 준우승까지 했는데 팀을 팔리는 없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하지 만 공부를 하러 화도진 도서관에 가다가 도서관앞 슈퍼앞의 신문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 태평양 인수" 참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걸 느꼈다. 그동안 얼마나 열렬히 응원 했던 팀인데... 그날 난 도저히 공부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은 야구장으로 달려 갔다.내 기억으로 12연패에 빠져 있다 바로 전날 겨우 1승을 해 연패의 늪에서 빠져 나온 다음날이었다. 낮 게임이었던 그날의 야구장은 뭔가가 뒤숭숭한 느낌이었다. 관중석에서도 앞으로 바뀌게 될 현대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부잣집으로 팔려 가니 좋겠다는둥.... 물론 그날 게임도 졌다.야구장에 갈땐 태평양 선수들에게 "현대 파이팅"하고 외치려고 했는데 왠지 그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이제와 생각하니 그때 소리 안지르길 잘했다.
<=95년 태평양의 홈게임 표
태평양 구단의 매각 대금은 470억원 이었다. 이중 400억은 현찰 지급이었고 70억은 태평양이 청보 인수시 떠 맡은 50억의 부채를 현대가 8년 거치후96년부터 7년간 분활 상환 하기로 했는데 50억의 이자 20억이 붙어 70억이 된것이다. 따지고 보면 태평양은 그동안 부채를 한푼도 갚지 않고 그 부채를 현대에게 넘겨 준 것으로 구단 매입매각에 관한 한 한푼도 들이지 않고 8년동안 야구단을 잘 갖고 놀다 400억을 받고 팔아 버린 것이다. *태평양이 현대에 매각 됐을 때 일각에서는 현대 대신 부평의 대우 자동차를 소유한 대우가 태평양을 인수 했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우도 쌍방울을 인수 하려다 실패 했스니까. 하지만 대우가 태평양을 인수 했었도 얼마안가 모기업의 부도에 따른 팀 매각을 추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천 대우 제우스 농구단이 그랬던 것처럼. |
4.배신자 현대 유니콘스 | |
*창단 |
프로야구 원년에 인천을 연고로한 팀창단 제안을 제일 먼저 받았지만 모멸차게 왜면했던 현대는 그 후로 야구단을 가진 기업들이 엄청난 홍보 효과를 누리는 것을 보곤 배가 아프기 시작한다. 그래서 호시탐탐 프로야구 진출을 노린다. 1989년 현대는 MBC청룡을 인수할 기회가 있었으나 돈을 아끼려다 실패한다. 그러다 1994년부턴 쌍방울의 인수도 모색해 보지만 여의치 않았다. 새로운 팀 창단도 추진 했으나 기존의 다른 팀들의 반대로 무산 되고 만다. 결국 화가 난 현대는 야구판의 질서를 깨는 사건을 터뜨리는데 바로 아마추어 야구단 현대 피닉스를 창단 한 것이다.1994년 11월 현대 피닉스를 창단한 현대는 엄청난 자금력을 동원해 프로팀들과 선수 스카웃트 전쟁을 벌여 신인들의 몸갑을 천정부지로 올려놓아 야구판의 질서를 깨 버린다. 돈이면 뭐든지 다 된다는 식의 운영으로 프로와 아마야구 사이에 스카우트파동을 일으킨 것이다. 이도 저도 안되자 결국은 태평양과 인수협상에 나서 95년9월 태평양을 인수하게 된다. 95. 9. 1 태평양 인수 95.10.30 KBO구단주 회의서 구단 매각 승인 96. 3.11 현대 유니콘스 창단식
마스코트는 응모를 통해 유니콘스로 정해진다. 한마디로 뿔 달린 말이다. *아마도 그 말의 뿔은 엉덩이에 났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인천 야구를 기만한 현대가 4년간의 인천 생활을 시작한다. *이때만 해도 우린 몰랐다.현대 아니 일명 돈대의 시커먼 속을... |
*배신 |
*2000년 1월초 (신년 벽두) 일간 스포츠에 '현대 연고지 서울로 이전'이런 1면 톱기사가 실린다. 1999년말 그동안 계속 되어온 쌍방울 구단의 매각협상이 실패해 더 이상 쌍방울을 인수할 기업이 나타나지 않차 쌍방울 구단은 심각한 해체 위기에 놓이게 된다. 8개 구단으로 유지돼온 프로야구가 7개 구단으로 줄어들 위기에 놓이자 KBO에선 쌍방울 야구단을 인수 할 만한 기업을 알아 보지만 IMF경재 위기에 빠져 있던 기업들은 인수를 껄인다. 그당시 야구단을 운영할 수 있는 기업은 정보통신 산업의 비약적인 발전에 힘입어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SK그룹만이 적임자라고 판단한 KBO는 SK구단에 쌍방울 구단 인수를 타진하지만 SK는 이를 거부한다. 이에 급박해진 KBO는 정치권의 힘을 빌리기로 한다. 결국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직접 SK 와의 접촉에 나서 강력한 권유로 SK손길승 회장에 이어 그룹오너인 최태원회장의 승낙을 받아네 프로 야구 진출을 이끌어 낸다. 하지만 SK는 쌍방울구단 인수가 아닌 새로운팀을 창단 하겠다고 포부를 밝힌다. SK의 자발적인 참여가 아닌 정치적인 힘에 의한 참여였다. SK의 참여가 결정된 이상 첫번째 문제는 연고지였다.시장이 좁은 전북지역을 떠나 수도권을 연고지로 하기로 하였는데 KBO에선 현대의 연고지인 수원을 SK에게 주기로 한다. SK그룹의 창업지가 수원이었기 때문 이었다. 이런소식을 들은 기회주의자 현대는 자신들의 연고지 일부를 빼았기는 대신 서울로 연고지를 옮기겠다고 나선다 .*정말 숭악시런 놈들이다. SK또한 시장이 좁은 수원대신 큰 시장인 서울을 연고지로 하겠다고 박박 우겨댄다. SK와 현대는 서로 서울을 연고지로 하기위해 박터지게 싸웠지만 KBO박용오 총재는 현대의 손을 들어준다. SK는 구단 인수가 아닌 새로운 창단이기 때문에 안된다는 거였다. 이과정에서 현대의 라이벌 삼성과 서울주인 LG는 결사반대를 외친다.LG는 끝까지 자신의 집을 두 번씩이나 나눠주기가 싫었던 것이다.이에 화가 난 SK는 프로야구 참여를 백지화 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하였지만 수포로 돌아간다. 2000.3.15 현대의 서울이전은 경기장이 확보대는 2001년 후반기이후로 한다고 결정지어 지고 SK는 지금까지 결정적이었던 수원이 아닌 인천을 연고지로 하겠다고 해 인천으로 연고지가 확정된다. 결국 18년간이나 인천 팬들과 기쁨과 슬픔을 같이하며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꿑꿑이 이어오던 인천프로야구의 맥을 잔인하게 끈어 버리고 현대는 떠나 버렸다. 인천팬들의 만류와 분노를 나몰라라 내팽게쳐 버린체... 이당시 한팬이 쓴 글을 보자 "현대는 인천을 빨리 떠나라.대신 SK를 환영한다.서울로 떠날 때 인천출신 스타들은 놓고 가라" 이정도는 빙산의 일각으로 인천팬들의 현대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했다. 여기서 현대의 만행은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사용하던 인천구장을 떠나 수원구장을 사용하게된 현대는 인천의 새로운 주인이 된 SK에게 인천 야구장을 같이 사용하자고 한 것 이다.수원구장은 시설도 낡고 야구열기가 차갑기로 유명한데다 라이벌 삼성이 완전히 터를 잡고 있는 곳 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철면피 만도 못한 짓이었다.이에 SK는 당연히 이를 거부 해 버린다.인천이 싫다고 떠날땐 언제고 자신들이 아쉬울땐 알랑방구를 끼다니.현대는 그런족속들의 집단인 것이다. 그럼 현대의 인간 같지 않은 짓은 여기서 끝난 것일까? 물론 아니다. 그러기에는 현대라는 집단은 너무나도 파렴치 하기 때문이다. 2001년엔 더욱더 놀라운 짓을 벌인다.인천팬들이 염원하던 최신식 시설 문학구장의 완공이 가시화 되자 현대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짓을 또한번 저지른다. 인천 시청에 새로 개장하는 문학구장을 현대도 홈으로 사용하게 해달라고 한것이다. 여기까지 와선 도저히 욕을 안하곤 그냥 넘어 갈 수가 없다. "이런 개************ 놈들" 현대가 떠나려 할 때 제대로 힘한번 못써보고 바보처럼당하기만 한 인천시와 인천시민을 우습게 보고 또다시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이번엔 인천시에서도 이를 거부해 버렸다. 결국 망신만 당하고 만 것이다. 그럼 왜 처음 서울로 갈땐 좋아서 뒤도 안돌아 보고 떠난 현대가 왜이리 추잡한 짓을 계속 하는 것일까? 그건 바로 돈 때문이다.모기업의 자금난으로 인해 돈이 없는 것이다.현대가 돈이 없어서 그렇게 추잡스러워 질줄 누가 알았겠는가. 2001년 후반기부터 사용하기로 한 목동 야구장의 보수공사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인데다 서울 상암동에 전용구장을 짖겠다고 뻥까지 쳐 버렸지만 도저히 이를 추진할 능력이 남아 있질 않은 것이다.이젠 구단 운영자금 까지 모자라 선수들을 일본이나 타팀에 팔아서 그돈으로 구단을 유지하기에 이른다. 팀을 매각하려고 하지만 그럴 만한 기업이 없고 유일한 희망이었던 형네 기아자동차(현대구단주 정몽헌의 형인 정몽구가 기아를 소유함)와의 협상에서도 터무니 없는 금액을 불러 퇴짜 맞은데다 아예 기아는 해태를인수해 버린다. 태평양을 470억에 인수했던 현대는 기아에 서울 연고권을 내세워 매각대금으로 900억을 요구했다고 한다.(이런 미친놈들) 원래 유니콘스를 인수하려고 마음을 먹었던 기아의 정몽구회장은 현대의 황당한 금액 제시에 정내미가 떨어져 가격이 싼 해태를 인수해 버린것이다. 보라! 배신자 현대의 말로를 . 여기서 우린 평범한 진리를 하나 깨 닫는다. "돈으로 흥한자 돈으로 망한다" *짠물 생각 - 현대가 인천을 버리고 서울로 가려할 때 분노와 허탈감에 빠져 아무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200년1월초 오전 신포동에 볼일을 보러 갔다가 신문 판매대의 '현대 연고지 서울로 이전'이란 1면 톱기사가 실린 일간스포츠를보고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것같은 느낌이었다. 제발 이기사가 오보이기만을 바랬다.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돌아 가질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현대의 서울 이전은 확실시 되고 있었다. 그당시 난 목이 상다히 아파서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만일 그당시 목이 안아팠다면 9시뉴스에 내가 나올 수도 있었다. 어떤 사람이 전철의 운행지연에 불만을 품고 부평역에 폭탄을 설치 했다고 협박전화를 해서 난리가 났던 것처럼 나도 현대 사무실에 협박전화를 하려 했지만 목이 너무 아파 포기해야만 했다.그리곤 돌아가는 추이를 가슴 졸여가며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그러던중 2월 28일 일간스포츠에 정말 반가운 기사가 났다. '현대 제 9구단 창단' 내용은 현대가 인천을 계속 연고지로 하면서 새로운 구단을 창단해 새구단의 연고지를 서울로 할 것이란 내용이었다. 이 기사를 보고 얼마나 좋았던지... KBS스포츠뉴스에서도 같은 내용을 방송했다.정말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인천팬들의 분노를 무마하려는 현대의 기만술일 뿐이었다.이제와 생각 해보니 현대는 새구단을 창단할 돈이 없었다.기존 구단도 유지하기가 벅차면서 분수도 모른체 서울로 가는 것만 좋아서 날뛰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가 인천을 떠나가면서 가져간 것은 인천선수들만이 아니었다. 18년간이나 이어온 인천구단의 역사까지 가져간 것이다. 삼미나 청보의 기록을 보려면 현대의 그것을 찾아보아야한다.현 인천팀 SK에 가서 찾아보면 절대 안나온다. 그래서 내가 이홈페이지를 만들 게 된 것이다. 오로지 인천 프로야구의 역사만을 위해서... 어떤 이들(현대 떨거지들)은 현대의 배신을 시장원리에 따른 것이라 하며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다.그러나 세상은 시장원리 대로만 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분들한테 묻고 싶다 '자신을 낳아 주고 18년 동안이나 애써 키원준 가난한 친부모대신 돈 많은 부자가 양자로 들어 오라고 하면 그부자한테 가겠는가?' 인간으로선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짓을 한 놈들이 바로 현대라는 집단이다. 현대가 떠난뒤 얼마나 많은 날들을 분노와 저주로 보내여야만 했던가! 지금 이글을 쓰면서도 치가 떨려 자판누르기가 힘이든다. |
-참고 자료:야구114의 한국프로야구사,홍일순의 프로야구 비화 ,이종남의 프로야구 확 뒤집어 보기, photoro.com, newsphotokorea ,스포츠서울의 한국프로야구,주간야구外
첫댓글 태평양 돌핀스의 돌고래는 아무래도 타격 스탠스가 안나오네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