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이사 55,10-11; 마태 6,7-15 / 사순 제1주간 화요일; 2024.2.2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대하여 기도의 자세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7-8).
사실 자연종교를 신봉하는 다른 민족 사람들도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별로 효험이 없는 ‘빈말’인 이유는 기도하는 바를 이루어 주실 하느님과 통공을 이루지 않고 마치 허공을 향해서 말하듯이 일방적으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9일이든 백일이든 아무리 되풀이해서 자신의 소원을 말하더라도 정작 기도를 들어 주실 분이 없는 빈말 기도는 기도의 성취를 운(運)에 내어 맡기는 도박과 같은 것입니다. 기도가 성취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인간 이성이 추구하고 또 납득할 수 있는 과학적 사고방식의 기본은 인과율(因果律)입니다. 이 인과율에 따라서 이 세상과 우리 자신의 생명을 창조하신 하느님이 만물의 원인이시고 우리는 그분 창조의 결과물일진대, 하느님과 소통하며 그분께 기도를 바쳐야 올바른 기도입니다.
우리가 미사에서 독서와 복음으로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에 주목하는 이유나,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찬례에서 그분의 현존을 느끼는 이유는 말씀과 성찬이 모두 하느님께서 이루신 역사적 업적에 대한 증언이거나 이를 기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과 신약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은 오랜 세월 동안을 거치면서 수도 없이 많은 기록자들이 오로지 같은 성령의 감도를 받아 쓰여진 것입니다. 문자가 발명되고 문명이 일어난 이후에 쓰여진 인간의 기록물 중에서 성경보다 정확하고 진실한 기록은 없습니다. 성찬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성사이므로 그 품위가 종교적으로 최상위에 올려져 있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한결같이 봉헌되어온 이 성찬은 성체성사로서 한 치의 변경도 없이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그대로 계승되어 왔기 때문에, 그분을 기억하고 그분의 업적을 기념하는 거룩한 기준이요 기점이 되어 왔습니다. 이 말씀과 성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 의식에로 현존하여 내려오십니다. 이것이 성령의 작용 또는 성령의 이끄심이라고 합니다. 이를 두고 이사야는 자연현상에 빗대어 매우 인상적인 표현으로 설명하였습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고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0-11).
여기서 이사야가 비유로 말하는 바, 하느님의 말씀이 돋아나게 할 ‘싹’과 인간에게 양식으로 주어질 ‘열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하느님의 이름이 빛나게 마련이고 하느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에, 당신을 따라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이 섭리를 먼저 전제하고 나서 생활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하는 노동도, 우리가 서로 맺는 인간관계도 이 기준에 따라서 행할 것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에는 하느님께서 행하신 업적의 역사성이 기반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도하신 업적의 결과이며, 그것도 무상으로 주신 선물인가 하면, 우리가 달라고 청하지 않았어도 먼저 주신 은총입니다. 이러한 창조의 주도성(主導性)과 선물의 무상성(無償性) 그리고 은총의 선행성(先行性)이 하느님께서 행하신 업적의 특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인생은 물론 인류의 역사,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의 질서와 문명이 모두 이 전제 하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인간의 몫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실제로 이루신 업적에 바탕하여, 그리고 그분의 영과 소통하는 가운데 그분께 기도바치는 것이 올바른 기도의 자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올바른 자세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몸소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의 가르침대로 교회가 이어온 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이 세상과 우리 생명의 원인이신 하느님의 창조 업적에 대하여 흠숭과 감사를 드리는 기도를 바친 다음에 결과적으로 그에 부응하지 못했던 우리의 죄를 뉘우치는 속죄와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자 다짐하는 청원의 기도를 바치는 것이 올바른 기도 방식입니다. 이것이 ‘주의 기도’라고 불리우는 기도의 정석(定石)입니다.
그래서 맨 먼저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대상이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라는 호칭기도를 가르쳐주셨는데, 이는 자녀의 기도를 아버지가 외면하지 않듯이 우리가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시리라는 믿음으로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마태 11,24) 이라고 장담하셨습니다. 이는 기도를 바치는 데 있어서도 합당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의 공리(公理)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들은 하느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것들을 청하는데 매달리기보다,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가 이루는 데에 필요한 것을 청하라는 것이며, 그리하면 정작 우리에게 필요하고 우리가 바라는 것들은 하느님께서 알아서 선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마태 6, 25.32-33).
그리고 주의 기도 전반부에 들어있는 하느님의 이름과 그 나라 그리고 그 뜻에 대한 기도는 형식상 청원 기도처럼 보이지만 내용상으로는 흠숭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기도하기 전에 이미, 그리고 사람들이 저지르는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이름은 거룩히 빛나고 계시고, 그 나라가 와 있으며, 그 뜻대로 인류의 역사와 우리의 인생이 흘러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크게 보고 길게 보고 또 깊이 보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의 기도 전반부 흠숭 기도는 그 놀라운 현실을 알아보고 그 업적에 대해 찬미를 드리며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찬송하라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주의 기도 후반부의 청원 기도 역시 일용할 양식을 함께 나누지 못하고 있는 바를 속죄하면서 나눔을 다짐하고, 서로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바를 속죄하면서 서로 용서할 것을 다짐하는 기도입니다. 나눔과 용서를 거절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청하면서, 불가항력적인 악에 빠지더라도 구해달라는 기도는 부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주의 기도’에 담겨 있는 기도의 정석을 가르쳐주시고 나서도 여러 차례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만, 그 가르침의 압권은 이 말씀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요한 14,12)이다. 이렇게 장담하신 이유는 우리가 기도를 하면 갑자기 우리의 능력이 커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도함으로써 이루어지는 하느님과의 통공을 통해서 우리의 혼이 하느님의 영에 이끌리게 되고,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심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극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받아들여서 하느님과 이루는 통공이 기도의 요체입니다.
“족장들과 예언자들의 시대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와 초대 교회의 시대에는 더욱 힘 있게 아시아에서 활동하셨던 성령께서는, 지금은 이 대륙의 민족과 문화와 종교들 사이에서 신앙에 대한 그들의 증언을 강화시키시면서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아시아 교회, 18항). 특히 창조의 주도성(主導性)과 선물의 무상성(無償性) 그리고 은총의 선행성(先行性) 등 하느님께서 행하신 업적에 바탕해서 구세주로 오셔서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을 통하여 기도를 바치는 구도적 정신전통을 실천함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는 아시아 대륙에도 만연되어 있는 세속화 풍조와 무신론 사조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효과적이고 합리적인 선교 자세입니다. 이 풍조와 사조에 물든 현대인들은 인과율에 입각하지 않고 세상과 생명이 자연발생적으로 우연히 생겨났다고 여기는 비과학적 전제를 신봉하고 있어서 기도하지 않는 세태를 주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기도하는 바가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할 때에도 올바른 자세와 합리적 방식 그리고 온전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막연히 무턱대고 정성만 기울일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느님께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방식대로 기도하는 신앙인은 하느님과 통공을 이루는 가운데 고도로 자율적이며 능동적으로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자 노력하면서, 그 성취 열매에 대해서는 하느님께 내어 맡기는 자유로운 인간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은총은 “관상적인 활동인 동시에 활동적인 관상인 선교에 각별히 유효합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관상 중에 하느님께 대한 깊은 체험을 하는 선교사는 영적인 영향력이나 선교적 성공을 크게 거두게 될 것입니다. 개인과 민족들 전체가 신적인 것에 갈증을 느끼고 있는 대종교들의 고향인 아시아에서, 교회는 긴박한 인간적 사회적 관심사에 투신할 때에도 영적으로 깊은 기도하는 교회가 되도록 부름 받은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기도와 관상으로 이루어진 참된 선교 영성이 필요합니다”(아시아 교회, 23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