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감리교회 고 로제타 홀(1865~1951) 의료선교사는 25세 젊은 나이에 내한해
43년간 의사로서 가난한 여성, 어린이, 장애인 환자를 치료했다.
특히 1928년에는 현재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설립했으며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의 전신인 동대문부인병원 설립에 기여하는 등
여성 의료인 양성과 사회적 약자 치료에 헌신한 공로가 인정됐다.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 한국 첫 “맹아학교”(1898년)
-1898년 “평양 어린이 전문병원“에서 맹인교육(盲人敎育) 시작
-첫 학생 오봉래, 점자 습득 후 첫 맹인 교사로
-1903년 “평양 정의 여학교”로 이전, 장애인들도 함께 수업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 받음(2024. 4. 5.)
*Dr, Rossetta Sherwood Hall 선교사(1865-1951)-평양 맹아학교를 설립하여
근대 맹인교육을 시작하였음
*Dr, Rosetta S. Hall 선교사 *평양기홀병원(좌측), 맹아학교(우측;어린이병원)
한국 기독교의 최초 장애인 특수학교는 맹인학교로
1898년 평양에서
로져타 셔우드 홀(Dr, Mrs Rosetta Sherwood Hall) 선교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로제타 홀 박사는 의료선교사로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과 임신 7개월의 몸으로 1894년 12월에 해산키 위해 미국 방문하였다.
그녀의 남편인 윌리엄 제임스 홀(Dr, Wm.J. Hall) 선교사는 콜레라 전염병을 진료하다
1894년 11월 24일에 별세한 것이다.
한강 변 마포 양화진에 남편을 묻고, 이때 자신의 조수였던 박에스더 부부를 데리고 미국으로 갔으며,
후에 박에스더는 한국 최초 여의사가 되었다.
로제타 셔우드 홀 박사는 남편이 못다 이룬 복음선교의 사명을 이어나가는 것만이
그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이라 믿고 다시 한국 선교를 준비하며
특히 맹인 사역을 준비하였다.
* 남편 Dr W.J. Hall의 삶(Dr R.S. 홀 저 1897)-사진;로제타 홀 박사와 자녀들
로져타 셔우드 홀 선교사의 머리에는
한국의 맹인들을 위해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으며,
맹인교육에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프랑스 파리의 맹인 교사인 루이스(Louis Braille) 선생이 개발하여
1829년에 출판한 점자책을 입수하였다.
또한 1860년 뉴욕 맹인교육 학원 원장인
윌리엄 웨이트(William B. Wait) 선생이 개발한 점자도 연구하였다.
Dr R.S. 홀 선교사는 웨이트 원장을 찾아가 점자 구조를 배웠다.
여기서 홀 박사는 “뉴욕 포인트” 점자가 한국에 적당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Dr R.S. 홀 선교사는 1897년 다시 내한하여, 1898년에 그가 원하던 평양으로 파송 받았다.
홀 박사는 아들과 1895년 1월 18일에 태어난 딸 에리스 마거리트와 함께
1898년 5월 1일 평양에 도착하였으나
어린 딸 머거리트는 이질에 걸려 5월 21일에 별세하였다.
홀 박사는 양화진 남편의 묘지 곁에 어린 딸을 안장하고
아픔을 딛고 일어서어 더 힘써 선교사역에 열중할 것을 하나님께 약속하였다.
*오봉래-1900년부터 최초 점자를 베운 맹아 여학생에서 맹아 여선생
홀 박사는 1898년 딸 마거릿(E. Margaret)를 묻은 후
남편의 조사(Helper) 오석영의 맹인 딸 오봉래 어린이를 받아들이고
평양 부인병원 어린이 병동(Children's Ward)에서 “맹인교육”을 시작하였고,
마거릿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어린이 전문병원을 세우기로 하였다.
1899년, 1년 후 이 병원은 “에리스 마거릿 기념병원"(The Edith Margaret Wards)으로
한국 최초 어린이 전문병원이며, 2층 건물에 물탱크 시설도 갖춘 병원이었다.
*초학 언문 점자 교과서-홀 선교사가 만든
최초의 한글 점자 교과서(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 예고된 ‘로제타 홀 한글점자 교재’, 대구대 점자도서관 소장)
Dr, 로제타 셔우드 홀 박사는 바로 이 병원에서 맹인교육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그는 우선 “뉴욕 점자”를 한국말에 맞게 개조하여 조선어 점자교재를 만들었다.
또한 존스 선교사 부인(Mrs, George H. Jones)이 쓴
“기도서”와 “십계명”도 점자로 만들었다.
이 교재를 그의 첫 학생인 오봉래 양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교육 진도가 느리고 지루했지만,
한글 점자 법을 익힌 후에는 진도가 빨라졌고,
오봉래 양은 일 년 만에 준비한 모든 교재를 읽을 수 있었다.
또한 점자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고 말하는 것을 자신이 직접 점자 교습하기에 이르렀다.
1898년 그녀가 편찬한 현재 최초의 점자책은
대구대학교 점자도서관 2층에 전시되어 귀중한 자료로 보관되고 있다.
““Annual Report of the Womon's Foreingn Missionary Society of M.E.C 1885-1940, WFMS)-
미 감리교 해외 여성 선교사회 보고서 (WFMS, 189801899)-"맹인교육이 보고되고 있다."
“미 감리교 해외 여 선교회 보고서“(Annual Report of the Womon's Foreingn Missionary Society of M.E.C 1885-1940, WFMS)에도 기록되어 있다. 즉,
”우리의 매일학교에서 평양의 맹인 어린이들을 모아서 가르치는 것과
한 방을 만들어 공부하며 생활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 작은 맹인 소녀가 일기를 익혔고,
곧 다른 맹인을 가르치는데 보조할 수 있도록 준비되었다."라고 보고하고 있다.(WFMS1899, p92)
1900년도 보고서에는 맹인학교가 진척되고 성장되고 있음을 보고하였고(WFMS, p82),
1905년 보고서에는 교사로 ”학생 교사와 미스 로빈(Miss Robins)이 나를 돕고 있다"라고 보고하고 있다.(WFMS1905, p190)
이러한 일을 본 한국인들이 홍 박사에게 찾아와 자신들이 알고 있는
다른 맹인들도 맡아 가르쳐달라고 간청하였다.
맹인학교 학생 수는 점차 증가하게 되었고, 먼저 배운 오봉래 양은 특수교사가 되어 맹인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1898년에 시작된 “맹아학교”(12월)는 1903년에 평양 여학교인 “정의 여학교”(1899년)로 옮겼고,
1908년 맹인교육 전문가인 록웰(Mr. Rockwer)에 넘겨주었다.
Dr R.S. Hall 선교사는 한국 여성의학 교육의 선구자일 뿐만 아니라 한국의 특수학교인 맹인과 농아(聾啞)를 위한 교육을 시작한 분으로 정상인 학생들과 함께 교육시켜 차별 없이 평등교육을 시킨 분이다.
Dr 로저 타. S. 홀(1865-1951, 許乙) 선교사는 1890년 한국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여,
Dr W.J. Hall 선교사와 결혼하고(1892년) 평양으로 파송 받아
1935년 은퇴하기까지 43년 동안 사역하였으며,
귀국하여 1951년 4월 별세한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남편 제임스 홀 선교사와 딸 마거릿과 함께 안장되었고,
장남 셔우드 홀(Dr, Sherwood Hall, 賀樂;1893-1991) 박사도 양화진에 묻혀(별세 1991년)
전 가족이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 땅에 묻혔다.
*양화진 외국인 묘지- 홀 가족 묘비와 아들 셔우드 홀 선생 공적비!
Dr R.S. 홀 의료선교사(사역 기간 1890-1935)는 정동 부인 병원을 시작으로
“동대문 부인 병원”(현 梨花女大學病院)으로 확장 이전하여,
한국 첫 “간호사 양성학교”(1903년, Supt. of Nurses' Tranining School를 세웠으며,
“경성여자의학교”(1928년, The Seoul Woman's Medical College)를 설립하여,
고려대학 의대 부속 “우석병원(友石病院)”으로 운영되어 오다가
오늘날 고려대학교 의과대학(高麗大學敎 醫科大學), 고려대학병원(高麗大學病院)의 모체가 되었다.
Dr R.S. 홀 선교사는 남편과 딸을 잃은 슬픔을 딛고서
더욱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충성하였다.
여성 의료 사역과 여성 의료진 양성,
개척선교에 헌신한 열정적인 삶을 우리는 가슴 깊이 간직하고 민족 사랑과 구원에 헌신해야 할 것이다.
"장애인복지·여성의료인 양성 기여"…국내 최초 여성의사 박에스더 '스승'
이화여대의료원 제공.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왼쪽) 부부가 로제타 홀(가운데) 가족과 함께 촬영한 사진.
앞줄은 로제타의 아들 셔우드(왼쪽)와 딸 에디스 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