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30여년전 처음으로 유럽으로 해외여행을 떠나면서 달력이나 사진에서나 볼수있던 파리의 몽마르트언덕과 베르사유궁전, 스위스 만년설에 뒤덮인 융프라우, 이탈리아의 베니스 모습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확인할 수 있음에 몇날을 꿈속에서 그리던 기억들,
이렇듯 여행은 상상속의 꿈들이 현실이 되는 미지의 체험이고, 저 넓은 세상을 내안의 기억과 추억속으로 담아내는 배움과 지혜의 터전이다.
우리나라 오천만 인구중 일년에 삼천만이 해외여행을 한다고 하니 이제 해외여행은 일과 휴식을 필요로 하는 일상에서 선택이 아닌 생활의 필수로 다가왔다.
혹자는 국내도 여행지 많은데 굳이 "외화낭비해가며 해외로 나가느냐?"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해외여행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콜럼부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고 리빙스턴이 아프리카 탐험을 통해 세상을 개척하듯 정저지와(底井底之蛙, 우물안 개구리)가 되어서는 미래를 기약할수 없다.
특히 이 글을 읽는 젊은이들에게 많은 해외여행을 권장하고 싶다. 해외여행이야말로 산지식을 얻는 값진 투자이며 미래의 성공적인 삶의 대가로 보답해줄 것이라 확신한다.
미국, 유럽의 많은 나라가 선진대국이 된 것도,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주역인 삼성과 현대가 세계의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한 것도, 모두 개방화시대의 해외 개척과 여행을 통해서 얻어진 값진 선물이며, 비극적인 예로 북한을 보더라도 공산독재로 패쇄적인 국가가 되어 불쌍한 나라가 된 것도 역시 정지지와(底井底之蛙, 우물안 개구리)를 고집한 이유입니다.
앙코르와트의 제대로 된 관광을 위해서는 앙코르와트가 세워지게 된 배경, 즉 크메르제국의 역사를 이해함으로써 유적의 참된 의미를 세울수 있겠다.
물론 가이드가 있다면 나름 설명이 곁들여지겠지만 사전적 지식이 없다면 그저 고대 크메르제국의 석공들에 의해 정교하게 다듬어진 돌조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 앙코르와트의 크메르제국 역사에 대한 이해
앙코르 와트는 캄보디아 시엠립주의 앙코르에 위치한 종교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맡은 사원으로 12세기초 수르야바르만 2세에 의해 옛 크메르 제국의 도성으로서 창건되었으며, 초기에는 힌두교 사원으로 힌두교의 3대 신 중 하나인 비슈누신에게 봉헌되었으나 이후 불교 사원으로도 이용되었다.
11세기 크메르는 현재의 캄보디아보다 7배나 넓은 영토를 거느리는 동남아 최대 강국으로 중국의 역사서 "송사 진랍전"에는 크메르 제국에 대해 “영토가 7000리이며 전투에 사용하는 코끼리가 20만 마리나 된다”는 기록이 있다.
앙코르(Angkor)는 산스크리트어 나가라에서 파생된 도읍이라는 의미의 노코르(Nokor)의 방언이고, 와트(Wat)는 크메르어로 사원이라는 뜻이니 앙코르와트는 "사원의 도읍" 이라는 뜻으로 해석할수 있으며, 앙코르 와트라는 이름은 16세기 이후 부터 사용되었다고 한다.
ㅡ 크메르제국(khmer empire) 역사의 개요 ※ 기간 : 7세기~15세기(802년 ~1,431년) ※ 크메르제국 건국 : 자야바르만 1.2세 ※ 전성기 : 수리야바르만 2세(1,113~1,150) ※ 앙코르와트를 축조한 왕 : 수리야바르만 2세 ※ 언어 : 크메르어. 산스크리트어 ※ 종교 : 힌두교,대승불교,상좌불교 ※ 멸망 : 1,431년 태국의 아유타왕족의 침공으로 수도인 앙코르가 점령된후 멸망하고 수도를 톤레삽호수의 남쪽인 지금의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으로 이전함
● 간단한 캄보디아어 배워보기
어느 나라를 여행하든 간단한 언어를 알고가면 현지인들도 더욱 반갑게 대할것이다. 요즘은 어플이 잘 되어있으니 구글번역기.콤마.Language translater 등을 이용하면 크메르어 번역이 가능하고 특히 동남아국가 중 캄보디아는 비교적 젊은층들에겐 영어소통이 가능한 경우가 많다.
프랑스인 박물학자 앙리 무오(Henri Mouhot)는 오랜 기간 이 곳에 머물며 그는 앙코르 유적의 석조 건축군과 미술에 관해 꼼꼼하게 기록했고, 데생과 채색화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탓에 앙코르의 유적지를 세밀하게 그린 그림마저도 남겼다. 1861. 11. 10일 라오스의 루앙 프라방 교외에서 과로로 쓰러져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죽은 후 1862년 그의 편지가 영국 왕립지리학회에서 낭독되고, 그의 일기는 1863년 뚜르드몽드(Le Tour du Monde)지에 9회에 걸쳐 게재됨으로써 이 위대한 유적지는 서양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다.
겸손한 학자인 무오는 선배인 뷔요신부의 행적을 인용하는 등 결코 자신이 전인미답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출판업자들도 '발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듯 무오가 앙코르 유적을 '발견'했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지게 되었고, 무오는 죽기 전 이 경이로운 유적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들 앙코르 사원 중의 하나로 솔로몬의 성전이나 미켈란젤로의 건축물에 필적하는 서구의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사이에 갖다 놓아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 사원은 그리스나 로마 문명이 우리에게 남겨 놓은 그 어떤 건축물보다 장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