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리 - (2001) 꽃 한 송이 주지 못했네 04. 백양나무
백양나무
- 한보리 시, 작곡 낭송
오늘은 가을 들길을 걷는다.
맑은 바람에 나를 드러내놓고
코끝이 찡해져올 때까지 너를 숨 쉬고 싶다.
저 길 끝까지 오직 너만을 생각하며 걷기로 한다.
붉어져가는 산자락을 돌아 바람 적은 모퉁이에 이르면
거기 기다랗게 너의 손가락을 닮은 백양나무 군락
마른 풀 내음 가득하다.
나무들은 지금 이별을 위해 서둘러 스스로 붉어져있고
낙엽은 그저 소리 없이 울던 너의 눈물처럼 뚝뚝 지고 있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란
늘 좀약처럼 쓰라린 그래서 가슴으로는 시리다가 흐르는
그리고 어차피 내가 감내해야 하는 형벌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사랑을 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는 듯이
바람이 불면 오래 손 흔들어주는 미루나무의 쓸쓸한 인사
삶의 모퉁이 그쯤에서 하얗고 가느리던 손가락은 닳아 뭉툭해지고
어쩌면 몸뻬바지에 수건을 두르고 커다란 시장바구니 옆에서
다소 높은 음 갈라진 목소리로 몇 닢의 자투리 돈으로 흥정하고 있을 지도 모를
피곤한 몸을 한바탕 거실에 아무렇게 던져두고 있을 너를 생각하는 것은
적어도 내겐 슬픈 일이다.
이런 쓸쓸한 것들을 생각하며 마른 풀을 뜯어 모아 불을 놓는다.
슬픔 같은 거 애초에 없는 듯 늘 화사하게 웃던 너
그것이 나를 더 가슴 아프게 하던 것이었지만
나는 지금 너를 오래된 포사디즘 인물처럼
빛바랜 기억으로 남겨두고 싶어 한다.
네가 없어도 가을은 여지없이 찾아왔고
잔인하게도 한 치의 얘기도 남김없이
내 삶의 구석구석에 배어있는 너의 체취와 나의 습과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래왔듯이
허둥대며 너의 흔적을 지우고 있는 나를 확인한다.
낙엽과 삭정이를 주셔 모아 얹어놓고 붉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본다.
그 푸른 연기가 참 쓸쓸하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연기를 보며 무모했던 사랑과
어차피 가두어두지 못할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또 온 하루를 어깨 들썩이며 울던 너의 울음이 얼마나 쓸쓸한 일이었던가 생각해본다.
옷 사이로 스며드는 연기
너의 사랑이 내 삶을 물들였듯이 그렇게 몸에 배이겠지.
그렇게 배여서는 저녁 내내 너의 상념 안에 젓게 하고
자꾸 뒤척이게 하다가는 결국 베개를 적시겠지.
부피도 없이 달려드는 매운 연기에 너를 느낀다.
허망한 일이다.
서둘러서 허망한 그 생각들을 거두려 연기를 피해본다.
사랑한다고 말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하고
못 이룬 그 사랑을 지우는 일은 참 징그러운 일이다.
쓸데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너의 이름을 되놰본다.
문득 방아깨비 한 마리가 부르릉거리며 건너편 억새밭머리로 잦아든다.
마른 삭정이 하나 내 결심처럼 분질러서 불에 던져 넣고
하얀 백양나무 가지를 바라본다.
세상 어디선가 백양나무 같은 자태로 서있을 너를
그리고 나 같은 사람쯤 까맣게 잊고 있을 너를
나는 축복한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첫댓글 다소 감정적인 詩지만, 이런 가슴시린 사랑을 해본 사람도 계실 듯...
잊어버렸던 옛 추억을
되찾아주는 낭송의 시입니다.
아직도 마음만은 살아 있음을 느낌입니다.
잠시 머물다가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