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 연휴다.
큰아들 가브리엘은 투석환자를 돌봐야 해서 연휴와 무관하게 출근이다.
그럴 땐 우리 집이 끼니를 챙기는 장소다.
며느리랑 손자들이 함께 출동한다.
전날부터 시장에 가서 아들 가족을 위한 고기를 사고 조리를 했다.
소고기파인 며느리를 위해 갈비찜이랑 손자를 위한 오징어볶음,
샐러드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토마토와 자몽 등을 준비해서 쟁여두었다.
2월 마지막 날 큰손자 안젤로가 욕조에서 미끄러지며 턱 아래가 찢어졌다.
연휴라 굳이 성형외과를 찾을 필요없이 시아버지인 남편에게 연락을 했다.
깜짝 놀란 우리 부부는 마취때 아파할 손자가 걱정이 되어 둘 다 병원으로 출동했다.
손자는 놀라울 정도로 참을성이 있었다.
상처를 잘 꿰매고 아들부부에게 저녁을 사먹이고 나니
안젤로가
"나 할머니집에서 잘거야."
며느리도
"어차피 내일은 할머니집에 갈거니까 그래도 되겠다. "
상처가 생기면 두려워서 엄마품을 더 찾을텐데 할머니집이라니~~
왠지 손자에게 인정받은 느낌같아 기분이 좋았다.
나는 한자교육을 강력주장하는 할머니다.
토박이말 54%, 한자어막을 방 35%, 외래어 2%가 공식 우리 말 비율이다.
요즘엔 외래어의 비율이 더 늘긴 했겠지만....
한자어는 뜻글자이고 혼용이 가능하니 국어 교육엔 필수라고 믿는다.
2주일 전 아들집에 가니 손오공이 주인공인 "마법 한자문"을 사다 뒀었다.
만화책을 읽어줬더니 별로 재미없었는지 딴청을 피웠다.
손자에게 한자 공격 게임을 가르치고 시작했다.
"안젤로! 할머니는 한자를 엄마아빠보다 더 많이 알아."
며느리의 인정으로 손자와 나는
"비 쏟아져라 비 雨!"
"눈 내려라 눈 雪!"
"막아라 막을 防!"
"활을 쏴라 쏠 射!"
"피하라 피할 避!"
소리소리 지르며 한자 게임을 해왔다.
그러고 나니 손자는 마법 한자문 책을 수시로 읽고 무기를 쌓아서
"눈 부셔라 빛光! 불태워라 불꽃 炎! 쏘아라 활 弓!......"
손자는 목이 터져라 공격을 하고 나는 한자어로 방어를 한다.
신나게 놀고 나서 거실에 텐트를 쳤다.
손자와 나는 오늘 밤 그곳에서 추억을 만들 예정이었다.
"할머니! 내가 깨어 있는 동안에는 내 곁에 계시고
내가 잠들면 할머니 방에 가서 자도 돼요.
엄마나 아빠도 그렇게 하거든요."
낯선 집인데도 의젓해서 결국 그날 밤은 안젤로는 텐트속에서 혼자 잤고
아침에 일어나서 텐트속을 들여다 보니 혼자 앉아 있었다,
"안젤로 안아파?"
"네! "
"어제 할아버지가 안젤로 꿰매줘서 깜짝 놀랐지?
할아버지는 외과의사라서 그랬어."
"마취할 때는 아팠는데 그 다음엔 안아팠어."
"그랬구나."
8바늘이나 꿰맨 아이의 상처를 사진으로 보여주었다.
"안젤로! 넌 정말 용감한 아이야.
어제 엄청 울 줄 알았는데 잘 참아서 예쁘게 상처를 치료했어."
상처를 찍어 둔 사진을 보여주고 한 주일 후엔 실을 뽑을 거라는 것도 알려주었다.
아들과 며느리와 둘째 손자가 와서 아침을 먹고
신이 난 안젤로는 다시 한자공격을 시작했다.
뜻도 모르는 둘째도 어눌한 말투로 따라 소리치고 아이들 돌보느라 지친 며느리는
텐트에서 뒹굴며 휴식 아닌 휴식을 취한다.
이제 말은 배웠고 쓰기를 알면 되겠다.
언젠가 할머니를 추억할 때 한자가 떠오르면 행복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