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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와 목사독점주의
성경에는 전혀 근거를 찾아볼 수 없으면서도 오늘날 세계 각국의 기독교에 만연하고 통용되고 있는 제도가 바로 목사제도입니다.
1) 성경 어디에서도 목사라는 말은 원래 찾아볼 수 없으나, 목사라는 제도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에베소서 4장11절에 원래 목자라는 은사(소질과 재능 혹은 역할에 해당하는 단어)를 목사라는 단어로 변곡시킨 다음 그 명칭 하에 교회의 거의 모든 권한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교회를 조종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2) 성경에서 말하는 지도자의 선임방법과 자격요건은 교묘히 피해가는 한편, 그들만 교회의 강단에서 설교할 수 있고 ( 혹은 그들의 감독 하에), 그들만 축도할 수 있으며, 그들만 성례(침례와 성만찬)를 주관 집례 할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자격요건을 갖춘 사람이 교회를 다스리는 것을 막게 할 수 있는 사탄의 계교입니다! 대신 성경적 자격요건은 못 갖춘 사람들이 엉뚱한 교리들을 제조하여 가르칩니다.
성경적 교회 사역자들의 자격요건과 그들의 치리에 관하여는 딤전 3:1-13, 디도서 1:5-9 살후 3:8-12, 딤전 5:17-21 등에 소상히 나와 있습니다.
3) 이것은 성경에 나타난 오직 두 가지 직책 곧 장로들과 집사들의 자격요건들을 교묘히 피해가는 한편 그런 자격요건이 없는 사람들로서 교회를 독점시키게 하기 위하여 신학교라는 매개체를 만들어서, 그곳을 나오면 갑자기 성령이 충만해지며, 일반인들과는 전혀 다른 거룩한 사람들로 변화되는 양, 착각을 갖도록 예복도 입히고 안수도 주어서 갑자기 거룩한 사람들로 둔갑시킵니다. 그리하여 그들, 목사들을 통하여 성경에서 벗어난 가르침을 마음껏 구사하게 하며 사탄의 조종을 받게하기 위한 통로로 소위 목사들을 사용하는 것이 사탄의 고등 전술입니다.
그러므로 아래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항변들에 대하여 몇 가지를 분석하고 그에 대한 답변들을 담은 글을 올립니다.
목사제도 주장자들은 신학교의 근거가 성경에 있다며 그 근거로 사도행전 19장에 나오는 두란노 서원과 구약의 선지자 생도들을 근거로 듭니다. 그러므로 그 부분의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1) 두란노 서원 – 학당
사도행전 19장
8 그가(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달간 대화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들을 믿게하며 담대히 말하니라.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전도함)
9 어떤이들이 완고하여 믿지않으면서, 무리앞에서 이 도를 악담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떠나( 세상과 분리), 그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 에클레시아- 교회행위), 날마다 어떤 투란노의 학당에서 토론하였더라( 전도와 교회 활동- 초신자 훈련) 10 이것이 두 해동안 일어났으니 모든 아시아 거주하는 자들이,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주 예수의 말씀을 듣게 되었더라( 전도 사역)
1) 두란노 학당이란, 그리스와 터키의 서해안 지역 도시국가들의 전제군주, 독재자들이 세운 학교들을 말합니다. 두란노는 영어의 티라니( Tyranny) 에 해당되며 그뜻은 폭군, 폭정을 뜻합니다.
2) 두란노 학당은 바울이나 어느 그리스도인들이 세운 학교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독재자도, 폭군도 아니었습니다!
3) 바울은 그 학당에 들어가 주로 전도하였으며 그 결과 아시아의 모든 거주자들이 주 예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전도한 것입니다!
4) 오늘날로 말하면 바울 같은 사람이 카톨릭에 들어가서 전도하였더니 대부분은 반대하였으나 그들 중 몇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데리고 나와서 초신자들을 양육하는데 그들 중에 두 명이 국립대생이었습니다. 그들이 국립대 안에 그리스도인학생회를 구성하면서 그들이 “바울”을 초청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바울”이 전도하였더니 그 청중들이 계속 지인들을 불러와서 계속 정기적으로 성경 전도 모임을 갖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서울시내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국립대라는 장소를 빌려서 전도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보고 바울이 신학교를 국립대안에 세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모임(교회)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동등하게 모이는 모임으로서 그 자체 내부 성도들의 양육과 성장을 성도들의 교제를 통해서 이루어 가는 곳입니다. 또한 교회는 전도의 기지요, 바탕으로서 마땅히 기회가 주어지는대로 전도할 수 있는 중심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모든 성도 양육과 전도와 하나님께 대한 경배의 중심체인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신학교의 근거를 누구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두란노 학당 출신이 목사되었다는 말을 읽어보셨습니까? 아니면 장로되었다는 말이라도 읽어보셨습니까?
오늘날 성경을 주로 공부하게 하는 어떤 교육기관(성경학교)이 있어서 어차피 자녀들이 다른 교육을 받을 바에는 성경 공부를 하도록 할 수도 있겠으나 그 출신자들이 목사라는 직책을 업고 나와 교회안에서 검증되고 세워져야 할 사람들을 대체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디도서 1장과 디모데전서 3장의 교회 리더쉽에 관한 명령을 대체시킬 어떤 학교도 성경적으로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두란노 학당 출신들은 디모데 전서 3장 1절-7절과 디도서 1장 5-9절에 설명된 자격요건을 갖추지 않았어도 그냥 목사나 장로로 임명하였다는 어떤 언급이나 암시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두란노 학당은 당시의 왕립대학으로서 그 안에서 바울이 전도했던 전도마당이었습니다! 신학교가 아니었습니다!
(2) 선지자의 생도들
열왕기 하 2장
7절 그리고 선지자들의 아들들 중 오십 명이 가서 반대편에서 멀리 서서 바라보았는데 그들 두 사람이 요르단 옆에 섰더라.
15 반대편 여리고에서 바라보던 선지자들의 아들들이 그를 보며 이르기를, 엘리야의 영이 엘리사 위에 머물렀다, 하고 가서 그를 만나 그 앞에서 땅에 엎드리더라
열왕기 하 4장
1 그리고 선지자들의 아들들의 아내들 가운데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의 종 내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두려워한 줄을 당신이 아시나이다. 그런데 그 채권자가 이르러 내 두 아들을 취하여 노예로 삼고자 왔나이다, 하매
그런데 이 대목을 한글 개역 성경은 선지자의 생도들로 번역하였다가 오늘날은 개역개정에서 선지자의 제자들로 번역하였습니다. 제자라는 말은 누군가가 선생이고 어디엔가 사제관계가 있었던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성경 원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단순히 선지자의 아들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신학교를 만들어내기 위해 혹은 그러한 신학사조에 맞게 고의로 성경을 변개하였음이 분명합니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 원어들은 브네이 느비임으로서 느비임은 선지자들이라는 말이고, 브네이는 아들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브네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자손들 혹은 아들들로 말하며, 브네이 레비는 레비인들의 아들들을 말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킹제임스 성경이 Sons of Prophets로 번역한 것이 옳습니다! 한글 성경은 선지자들의 아들들( 흠정역은 대언자들의 아들들)로 번역함이 옳은 것입니다.
왜 선지자의 아들들이 엘리사에게 모였을까요? 그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가르치는 바가 없으나 다음의 말씀들을 읽어보면 짐작하게 하는 바가 나옵니다.
열왕기 상 18장
13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여호와의 선지자들 중에서 백 명을 취하여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그들에게 빵과 물을 먹인 일 즉 내가 행한 일을 내 주께서 듣지 아니하였나이까?
이세벨이 많은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선지자들의 가족들은 풍비박산되어 흩어지기도 하고 자녀들을 돌볼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야와 엘리사는 그 선지자들의 아들들을 돌보는 한편 공동체 생활을 하였을 수 있습니다.
19장
10 그가 이르되, 내가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을 위하여 심히 질투하였나이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당신의 언약을 버리고 당신의 제단들을 헐며 칼로 당신의 선지자들을 죽였기 때문이오며 나만 곧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구하여 그것을 제거하려 하나이다,
인간의 보기에는 아합과 이세벨이 모든 진정한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만큼 참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심했던 것입니다. 그런 시대에 엘리야, 엘리사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아 주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그렇게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아주고 있습니까? 참고로 형제모임의 죠지 뮐러는 고아원 운동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목사제도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렇듯이 선지자의 생도라는 말은 의도적으로 목사제도나 신학교를 도출해내기 위해 선지자의 아들들을 교묘히 변개시킨 번역에 불과한 것이며 구약시대 어디에서도 신학교나 신학대학의 근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3) 선지자의 무리들
사무엘상 10장
10 그들이 저쪽에 있는 언덕에 이를 때에, 보라, 선지자들의 무리가 그를 맞이하고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매 그가 그들 가운데서 예언을 하니라.
11 그때에 있었으니, 예전에 그를 알던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보니, 보라, 그가 선지자들 가운데서 예언을 하므로 이에 백성이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에게 임한 이 일이 도대체 무엇이냐? 사울도 선지자들 가운데 있느냐? 하고
어떤 목사제도 주장자는 이것이 바로 신학교의 원시적 형태이며 그 근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이 말씀교제하고 함께 모여 있으면 그것이 바로 신학교의 근거가 됩니까? 그것이 바로 다른 성경에서 장로(=감독)들의 자격요건이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대신하여 신학교 졸업자들로 교회를 독점하게 하며 강단과 축도, 성례를 독점적으로 실행케하라는 말씀의 근거로 주장될 수 있겠습니까?
(4) 목사만이 침례 베풀수 있는가?
오늘날 목사제도 주장자들은 목사들만이 세례 베풀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세례는 성경에 근거도 없으며 침례가 옳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에서는 장로가 세례베푸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사도행전 8장
35 필립이 자기의 입을 열어 이 성경으로부터 시작하여 그에게 예수의 기쁜소식을 전하니라. 36 그들이 길을 따라 갈때에, 어떤 물에 이르니, 내시가 말하기를, “보라, 물이라. 무엇이 내가 침례받는 것을 막나이까? ” 37 필립이 이르기를, “ 당신이 온 마음으로부터 믿으면, 당신이 합당하니이다.” 하니, 그가 대답하여 이르기를, “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것을 믿나이다.” 38 그가 병거(마차)가 서도록 명하고, 필립과 내시가 물속으로 둘이서 내려가, 저가 그를 침례하니라. 39 그러나 그들이 물속으로부터 올라왔을 때에, 주의 영이 필립을 취하여 가시니, 그 내시(신하)가 저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으나, 그가 자기의 길을 기뻐하며 갔더라.
한글성경등 많은 현대역들은 37절을 빼버렸습니다. 그것이 유아세례에 방해되기 때문입니다! 유아세례는 믿음의 고백없이도 받을 수 있으며 그리하여 수십억의 안믿는 자들을 교회로 들여오기 위한 사탄의 고등술책입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항쟁했습니다.
필립은 집사였는데 침례 베풀지 않았습니까?
스테판은 집사로서 사도행전 7장에서 위대한 설교를 하지 않았습니까? 목사만이 설교할 수 있습니까? 오늘날 스테판처럼 위대한 설교를 할 수 있는 목사가 몇이나 있을까요? 아니 누가 있을까요?
(5) 디모데 전서 3장
1 미쁘도다 그 말이여, 누가 감독직을 간절히 바라면, 그는 선한 일을 열망한다 함이라. 2 그러므로 감독은 반드시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절제하며, 신중하며(건전하며), 고상하며, 나그네들에게 친절하며, 잘 가르치며, 3 술 취하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익을 탐내지 아니하고, 대신 온유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4 자기의 집을 잘 다스리며, 자녀들을 모든 진지함으로 순종케하며, 5 (만일 누가 자기의 집을 다스릴 줄을 알지 못하면, 어떻게 그가 하나님의 모임을 돌보리요?) 6 새로 심어지지(회심하지) 않아서, 교만하여져 마귀의 정죄에 그가 빠지지 않도록 할지니라. 7 또한,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그가 빠지지 않도록, 그는 마땅히 외인들로부터 선한 증거를 가져야 하느니라.
오늘날 교회의 감독직을 바라는 사람은 선한 일을 열망하면 (사모하면)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는 반드시 신학교 가기를 열망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신학교 가기로 대체시켰습니다! 과거에는 대학 입학 예비고사에 불합격해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신학교 였습니다. 오늘날도 수능 성적이 그리 높지 않아도 갈수 있는 곳이 신학교로 알고 있습니다.
절제하며, 신중하며(건전하며), 고상하며, 나그네들에게 친절하며 나그네들에게 친절한 삶을 살지 않았더라도 신학교 성적만 좋으면 됩니다. 때로는 신학교에서 커닝으로라도 성적만 좋으면 됩니다. 졸업식장에서 계란 좀 투척해도 됩니다!
5 (만일 누가 자기의 집을 다스릴 줄을 알지 못하면, 어떻게 그가 하나님의 모임을 돌보리요?)
자기 집 다스려본 경험없어도 교회는 다스릴 수 있습니다. 왜요? 약관 25세의 나이에 신학교 나오면 할 수 있는 벼슬이 바로 목사벼슬이기 때문입니다!
(6) 디도서 1장
5 이를 인하여 내가 너를 크레테에 남겨둔 것은, 내가 네게 지시한 바와 같이, 네가 부족한 일들을 바로잡고 성읍마다 장로들을 세우도록 하려함이니, 6 만일 누가 흠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고, 방탕하다거나 불복종한다는 비난이 없는, 믿는 자녀들을 가졌으면 가하니라. 7 왜냐하면 감독은 마땅히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며, 쉽게 화내지 않으며, 술취하지 않으며, 구타하지 않으며, 더러운 이를 탐내지 않으며, 나그네에게 친절하며, 선을 좋아하며, 냉철하게 생각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자제하며, 9가르침을 좇아 믿음의 말씀을 견고히 붙들어, 그가 능히 건전한 가르침으로 권면할 수 있어야 하고 거역하는 자들을 훈계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니라.
바울이 여기서 장로 자격요건을 설명하다가 감독이라고 바꾸어 말한 것은 그 직책이 동일한 실체임을 말해줍니다.
오늘날 신학교가 이렇게 사람을 바꾸어줍니까?
더러운 이를 탐내지 않으며, 나그네에게 친절하며, 선을 좋아하며, 냉철하게 생각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자제하며,
(7) 사도행전 20장
17 그가 밀레토에서 에페소로 사람을 보내어 그 모임의 장로들을 부르니라.
…………….
28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스스로와 모든 양떼를 위하여 조심할지니, 그 안에서 성령께서 너희를 감독들로 세우셨고, 하나님의 모임을 목양하게 하셨으니, 그분은 그것을 자기의 피로 사셨느니라
위에서 에페소의 하나인 교회에서 장로들을 불렀는데, 바울은 말하기를 성령께서 그들을 감독들로 세우셨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즉 단수의 교회 안에 감독들이 여러 명 있었음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한 장로들을 감독들로 불렀음을 말해주지 않습니까?
이 사실은 다음에서도 확인되지요?
(8) 필립포서 1장
1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인, 파울과 티모데는 필립포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 안의 모든 성도들에게와, 더불어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필립포에는 교회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안에 복수의 감독들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이들은 감독이란 일정지역의 여러 교회들을 다스리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필립포지역에서도 벌써 여러명이 아닙니까?
목사는 왜 파울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집사보다 하찮은 직책이라 빼버렸습니까? 그럼 오늘날 목사들은 집사들에게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증거들이 오늘날의 목사제도를 전혀 성경적 근거가 없는 제도로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목사제도나 신학교는 성경에서 찾아볼수 없는 제도요 조직으로서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교회의 지도체제를 비웃고 회피하기 위해 인간들이 세워놓은 바빌론 종교 조직 체계입니다. 이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며 성경은 교회와 가정생활을 통해서 검증된 사람들로 지도자를 삼을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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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카페 초기에 올려졌던 글인데 못 읽으신 분들을 위해 다시 올립니다.
하토브님! 제도적인 문제 정책적인 문제 구조적인 문제가 초대교회로 부타 지금까지 늘 상존하여 있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도 그 제도를 선용하는것 악용하는것 의 차이 입니다. 저는 쉐카이 코리아가 목사나 장로 성토장이 되는것을 우려합니다. 저는 지금도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강단을 지키는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 들을 통하여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절대 부정할 수 없는 복음 전파의 역사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쉐카이 코리아가 목사 장로 성토장입니까?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것은 개혁주의가 아닙니다. 문제를 개선하는 것이 개혁주의 입니다.
쉐카이 코리아는 한국교회의 치부를 들어내어놓고 깔깔거리며 손가락 질이나 하는 카페가 아니라 진심으로 회개하며 한국교회의 문제를 안고 하나님앞에서 중보하는 진정한 개혁주의적인 카페가 되길 바랍니다.
이단 사이비들은 쉐카이 코리아의 한국교회를 향한 부정적인 모습을 악용하여 불신자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아멘 좋은 말씀입니다.
지금의 우리나라의 기독교의 문제는 믿음의 계보가 끊어져 있는 것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고 그 자녀들에게 천대까지 복을 주신다고 하신 말씀은 나에게 복음을 전해준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나도 그러한 믿음을 지키고 다음세대에까지 생명을 전하여 그것이 영원히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가 물질 만능 주의가 빠르게 전개되며 목회자나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의 뜻대로 살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살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야 하는데 하지 못하고 결국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18:20)
이 명령은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이고 형제 자매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많은 사람들은 형제를 만드는 것을 배운 것이 아니고 자기의 부하를 만드는 것을 배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서 자기 자신의 안위와 성공의 도구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제한한 것이고 믿음을 오해한 것입니다.
믿음은 삶과 하나입니다. 나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 나라의 기독교는 북한의 실정하고 비슷합니다.
북한이 70년대에는 모든 부분에서 우리나라보다 국민소득도 높고 잘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인 독재가 생산성을 떨어뜨리고 부패하고 획일적으로 만들어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것입니다.
북한 사람들을 보면 답답하지요. 조금 굽히고 이렇게 서로 협력하면 될텐데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