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의 부르튼 손(2024.9.21)
미송 송유창
아버님처럼 농사일 한번 해보고 싶어 귀촌한 지 3년째다. 헛간을 지날 때마다 벽에 걸린 말라빠진 코뚜레가 선친을 더 그립게 한다. 농사일 경험 없어 보들보들하던 내 손이 가을이 되면서 조금씩 트기 시작한다. 트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엄지와 인지, 중지 손톱 양 끝이 갈라지면서 좀처럼 붙지 않고 아프다. 낫질이나 화목을 조금 하고 나면 튼 곳이 더 파져서 밤잠을 설치게 한다. 시중에 나오는 핸드크림을 아무리 듬뿍 발라도 별 효과가 없다.
중위 때 모처럼 휴가를 얻어 아버님이 계시는 시골집에 왔다. 집안 아저씨가 중매를 서겠다며 여러 번 서울 근무지로 연락을 해와서 처녀 몇 사람과 맞선을 보기로 하였다. 아버님을 모시고 아저씨와 함께 부산역 앞 T 호텔로 갔다. 부산에서 꽤 괜찮은 집안에 학벌 좋은 신부감이라고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한 상대였다.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먼저 인사를 나누고 원탁 테이블에 양가는 둘러 앉았다. 차 나르는 아가씨가 아버님 앞에 커피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자, 아버님은 손을 내밀어 설탕을 집으셨다. 그 순간 처녀 측의 어머니가 아버님의 튼 손을 보고 움찔하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본 나는 오히려 태연하게 아버님 커피잔에 설탕을 넣어드렸다. 처녀 어머니의 더 다른 표정은 없었지만, 아버님 손의 가치를 몰라주는 처녀 측이 나는 무척 섭섭했다.
총각 아버지가 농사짓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이미 하였을 테고, ‘총각 보러 왔지, 아버지 보러왔나’ 하는 생각에 몹시 불편했다. 도회지에 살면서 농촌을 이해하는 처녀를 만났으면 하던 나는, 아버님이 농부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손이 있었기에 우리 5남매가 반듯하게 자랐으며, 나 또한 대한민국의 육군 장교가 되지 않았던가. 그날 맞선은 호텔 문을 나서면서 내가 일방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나머지 맞선 계획도 없었던 일로 했다. 사실 나의 결혼 조건은 나보다 아버님의 심중(心中)이 우선이라는 생각이었는데 수포가 되고 말았다. 그날 맞선은 아버님과 같이 선을 본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겉만 보고 속에 든 진면목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처녀 측의 실망 때문에 나는 몹시 큰 상처를 받았다.
아버님은 40여 년 넘게 농사를 지으셨으며, 그분의 손은 사시사철 성할 때가 없었다. 어릴 때 나는 ‘아버님의 손은 원래부터 그런가 보다’ 하고 자랐다. 손가락 마디엔 하얀 궂은살이 박혔으며, 튼 마디는 병아리 입만큼 벌어졌고 옆으로 튼 주름이 수없이 그어져 있었다. 그런 손으로 한겨울에도 쉬지 않고 나무를 하거나 이응을 엮고는 하셨다. 그런 아버님의 삶이 다른 사람이 보기엔 필시 보잘 것 없어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최선을 다한 삶이었다. 우리가 하루하루에 자신의 노력을 다하듯, 아버님 또한 그 시대에 어긋나지 않게 사셨던 분이다. 불가항력, 외면하지 못하는 시대 상황, 부조리, 끝없는 가난, 구사일생… 아버님은 일제강점기에 강제징용으로 파파뉴기니아 라바울 일본군 해군비행장 공사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다 겪었다. 미군의 폭격이 무시로 이어지는 전시 상황에서 오사카에서 석 달간 군용선을 타고 라바울까지 가셔야 했다. 생사를 다투는 전투 현장에서 수많은 한인 동료의 죽음을 지켜만 보다가, 2차대전이 끝날 무렵 고향으로 돌아온 건 구사일생이었다. 바삐온 같은 강한 의지가 없었다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삶이었다. 그래서 선조의 삶을 논함에 있어 감히 함부로 왈가왈부할 일이 아닌 것이다. 어느 시대 누구에게도 인생살이는 만만치가 않기 때문이다.
그날 맞선 사건은 내 결혼이 더 늦어지는 한 이유가 되었다. 이후 휴가를 자주 얻지 못한 나의 사정도 있었지만, 아버님은 그다음 해 가을에 인근 B대학 병원에서 췌장암 진단을 받으시고, 수술과 입원을 반복하시다 시골집에서 돌아가셨다. 나의 결혼도 못 보셨을 뿐만 아니라 손자·손녀의 얼굴도 모른 채 쉰여섯의 나이에 먼 곳으로 떠나셨다.
나이가 더할수록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은 겹겹이 쌓인다. 부부인연이 칠천 억겁이라는데, 부자간의 천륜은 또 얼마나 되는 것일까. 은하계 별똥이 지구에 떨어져 운석으로 나타나는 확률보다 더 희소할 것 같다. 그 천륜이 남태평양을 넘게 하고 생사를 초월하여 나를 태어나게 한 것이다. 부자간의 이런 소중함을 아버님 생전에 나는 왜 몰랐을까. 내 손이 트면서 비로소 아버님의 손을 기억하는 못난 자식이다. 만약 농사일을 흉내 내지 않았다면, 그 고통도 깨닫지 못하고 그냥 넘어갔을지 모른다. 더욱이 아버님의 손이 오늘 나를 있게 한 힘임에도 불구하고, 전방에서 근무한다는 이유로 임종 시 아버님의 튼 손 한 번 잡아 드리지 못하고 그냥 가시게 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