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동 연구소
벽돌담을 뒤덮은 싱그러운 담쟁이 잎사귀들,
덕분에 신축건물인데도 고풍스러운 티가 물씬 풍긴다.
나무 그늘 벤치에 흩어져 있는 화이트칼라 풍의 남자들 30여명,
"일우건설의 하 정숩니다.
좌장 격인 이 선생에게 목례 하는 나,
"반갑습니다. 기자단 여러분의 입주를 환영합니다.
현관을 들어서자 생나무 벽이 뿜는 피톤 치트 향이 감돈다.
수줍게 서있는 이젤의『입주 환영.』
2층 자료실,
낮은 서가사이로 띄엄띄엄 열람석, 응접세트
"안녕하세요. 지리자료실장 김 청잡니다.
일행을 맞는 30대 여성,
시원스런 말투만큼 체구도 당당한 여장부.
"아, 환영사 걸어주신 분. 감사했습니다.
사교적인 외신부 진현구
"이곳은 일우건설 자료실인데 회사 부속시설이라 지리자료가 위주입니다.
2층 사무실의 책상과 응접세트. IBM 볼타자기.
30명 남짓한 기자들이 쓰기에 넉넉해 보인다.
3층 회의실을 본 기자들이 갸웃 한다.
영상설비, 마이크에 리시버까지, 국제회의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여기가 매일 사용하실 구내식당입니다.
식탁에는 맥주와 음료가 깔려있다.
내내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이 선생.
짐짓 모른 체 하는 나와 김 청자.
트레이 식판을 채운 사람들이 모두 앉자 식사가 시작되었다.
"여긴 원래 무슨 건물이지요?" 진 현구의 조심스런 질문.
"일우건설의 연수원 겸 자료실입니다.
"규모가 상당하군요.
"해외 공사가 많다보니 아무래도....
겉도는 대화, 어색한 분위기.
자료실을 둘러보는 이선생,
역사책, 풍속과 풍물, 사진첩, 여행기와 탐험기.
벽에 죽 걸린 지도들,
막상 현대지도는 한 장뿐. 그것도 흔치 않은 북극권 지도.
극동, 알라스카, 카나다 그리고 미 북부가 북극을 에워싼...
"아틀라스 협회가 준 선물이예요.
어느 새 김 청자가 다가와 있었다.
"제휴계약 기념이죠.
"옛 지도들 속에 현대 지도는 달랑 이것 한 장뿐인데...
이 지역에 어떤 의미라도...?
"마지막 미개척지라던 데 요즘 관심지역이래요. 이 지도는 UN기의 배경이죠.
UN기라면 지구본에 월계관만 알았지 어느 지역인지 유심히 본적은 없다.
새삼 들여다보는 이 선생.
생소한 바깥 세계의 냄새.
기자단의 농장입주 두 달째.
어느덧 아침저녁으로 냉기가 스미는 초가을.
늘 조용한 농장은 기자들의 오아시스였다.
이따금씩 삼겹살 바베큐로 술자리도 열린다.
두 달은 서로의 서먹서먹함을 날리기에 충분한 기간이었고
두주불사형 주당이 많은 기자들과 김 청자는 죽이 맞았다.
단풍이 물들어가는 10월의 어느 날,
불쑥 나타난 나는 자료실부터 찾았다.
미리 보낸 양주병들을 열람실 책상에 늘어놓은 김 청자
감상 중이다.
"사장님, 홈 바 차릴 거예요?
"아, 그건 그쪽 재량. 쌓아두던 마시던 알아서 해요.
"이걸 전부 저 주시는 거예요?
"그럼,
"꼴 보기 싫으니 한꺼번에 마시고 그만?
"뭐 그러시든지...
헤벌쭉 하더니 조수 아가씨와 냉장고를 뒤지기 시작한다.
나는 슬며시 빠져나왔다.
수북한 재떨이, 어지러운 책상에서 집필 중인 이 선생, 진 현구, 유 이근
"애연가시라 들었습니다.
씨가 상자를 이 선생 책상에 올려놓았다.
하바나 급 씨가.
“허.. 고맙습니다만 이 귀한 걸
아이처럼 기뻐한다. 포장을 뜯자
미사일 모양의 미끈한 알미늄 통들이 가지런히 반짝인다.
통 끝을 비틀어 열자 나오는 한 뼘 길이의 굵직한 씨가.
"야아-
코에 대고 향을 잠시 음미하는 이 선생,
카트를 밀며 기운차게 들이닥치는 김 청자.
카트에 실린 양주와 안주거리
"아니..? 초 가을에 웬 산타클로스?
"홈 바 개업했어요.
느닷없는 양주에 벙 찐 기자들. 하지만 누구도 영문을 묻지 않는다.
일단 마시고 사연은 나중에...
뭐 몰라도 상관없다는 주당이 바로 그들이다. 왕초는 이 선생.
치즈와 두툼한 앵커리지 육포를 곁들여 마시기 시작하는 일동.
예상치 않았던 즉석파티는 이내 분위기가 고조된다.
"안 그래도 해장생각이 간절했는데..."
과묵한 이 선생의 공치사. 이건 꽤 흡족하단 말이다.
"이러다 월선각 가시겠습니다."
빙긋한 유 이근이 툭 던진다.
"..... ?"
"고속도로 어록이죠. 정상 음주는 행선각, 과음은 월선각.
“아..., 주행선, 추월선 얘기네.
씩 웃더니 응구첩대 하는 김 청자.
" 운전 조심하세요. 해장술에 취하면 애비도 몰라 본대요.
온더락 위스키를 한 잔 걸친 유 이근,
치즈를 씹으며 나와 김 청자와 눈을 맞춘다.
장난기가 철철 넘치는 시선
"요즘 고속도로사고가 늘어가요. 특히 서울 수원 사이의 비행장 구간..
간호원이 탄 앰블런스가 '찌뽀- 찌뽀'"달리는 장면, 자주 보죠.
실실 웃는 진현구, 뭔가 아는 눈치.
"그 뒤를 바짝 따라가는 경찰차는 장단 맞춰 찌짜-찌짜.
근데 그 구간은 오산/ 성남간 비행 코스라 헬리콥터가 자주 출몰하죠.
때마침 그 위를 지나던 헬리콥터,
음흉스레 '바가바가 바가바가'
박장대소 하던 이 선생,
사래가 들어 캑캑 대다 화장실로 사라지자 청자가 나선다.
"조선왕조 실록의 한 장면입니다,
경복궁 향원정은 예로부터 연꽃 경치가 일품인데
요즘도 7월이면 절정을 이루지요.
뜸을 들이며 꼬냑을 찔끔 한다. 지난 두 달 새 쌓인 내공이 엿보인다.
"숙종 18년, 쌍으로 핀 연꽃이 참 탐스럽더래요.
이를 보신 상께서 이르시기를
짐이 18년간, 숱한 연을 보아왔지만,
이런 쌍연은 처음 보도다.
일제히 뒤집어지는 일동.
들어서던 이 선생,
웃는 사람들을 보더니 분한 얼굴이다.
"없는 새 무슨 얘기했어? 무효니까 다시 해.
“김 실장, 주당 가입자격을 심사했는데,
휴지로 눈가를 살짝 누른 진 현구.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입니다."
"그래? 진 기자가 합격이라면 상당한 실력이신데,
나폴레옹 꼬냑을 딴다.
"의욕이 조금 과하신 거 아닙니까?
머리를 흔드는 유 이근 .
"아니, 마시려는 게 아니고,
접시에 몇 방울 떨어뜨리더니 자른 씨가 끝을 살짝 적신다.
"씨가 맛을 더 좋게 하는 비방이야..
피워 물더니 뻐끔 댄다.
자욱하게 퍼져나가는 이국의 향기,
따라해 보는 기자들.
"갑자기 웬 홈바지요?
몇 모금 빨아보다 독하다며 꺼버린 이근.
“느닷없이 양주가 한 다스나 생겼어요.
나를 가리킨다.
"호오, 한 다스 씩이나....
그럼 당연히 재고검사부터 해야지.
패거리들은 자료실로 우루루 몰려갔다.
"음, 진짜... 홈 바 맞네.
다양한 양주에 감탄하는 유 이근.
"이런 건 좀 모자란 듯해야 맛있는 법인데 이거야...
흐뭇한 이 선생이 두 손을 합쳐 내게 들어보인다.
"그 동안 페어뱅크스에 있었지요.
거기 원주민들, 우리랑 모습이 꼭 같더라구요.
"저 지역에....
북극해 지도를 가리키는 이 선생.
"미국 쪽에서 관심이 많다고요?
"예, 앵커리지에서 스워드까지 200km 도로공사의 다리를 한국이 수주했고
한국행 철광전용부두도 건설 중입니다.
"알라스카에 한국 전용부두?
"네, 주 정부가 적극적입니다.
곳곳에 Air Cross of the World 간판이 있어요.
블라디 항로를 열어 환태평양의 중심이 된다나요.
"우리만 자고 있구먼.
철 늦은 매미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다 불쑥 말했다.
“만약, 만약에 말입니다.
보다 자원이 풍부하고 가까운 곳이 있다면 어떨까요?
느닷없는 내 말에 진 현구가 대꾸했다.
"당연히 인기겠지요. 어디 생각하시는 데라도?
"동부 시베리압니다.
뚜벅 던졌다.
"그야 그렇겠지만 여건이...
흐리는 말 꼬리에는 비난성 여운이 담겨 있었다.
"여건이 안 되지요. 아직은...
나는 머리를 주억였다.
하지만 언젠가 호전된다면, 그래서 그때 시작한다면...
한 명, 한 명씩 시선을 맞춘다.
"과연 우리에게 기회가 돌아오기나 할까요?
나는 손으로 알라스카 지도를 짚었다.
"이 지역부터,
손가락은 만주로 이동했다.
"여기까지는 지구의 자원창고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흑룡강에서 베링해까지 4천km에 이르는 교통진공 지대.
이 지역에 철도나 도로가 열린다면,
냉수로 입술을 축인다.
"자원은 진가를 드러내 새로운 개척지로 각광받을 것입니다.
다음 날,
브리핑 자료를 든 김 청자가 기자들 앞에 섰다.
“가칭, 베링 프로젝트 설명입니다. 막 두근거리네요.
정말 긴장해 있다.
평소 활달한 모습만 보던 사람들에게 그 태도는 곧
지금 말하려는 사안의 비중이 그만큼 무겁다는 의미로 비쳐졌다.
“말씀 드릴 사업은 대륙간, 즉 알라스카와 시베리아를 잇는 철도 건설입니다.
대략 30년 짜리 공사지요.
음--, 여기저기서 감탄이 흘러나온다.
“프로젝트의 핵심은 베링 해협입니다.
OHP 화면의 해협 단면도.
중앙의 섬 두 개 사이를 경계로 적색, 청색 구분.
“붉은 쪽이 쏘련, 청색은 미국, 폭 85km,
양쪽에서 중앙의 섬까지는 터널, 두 섬 사이는 현수교라는 구상입니다.
터널을 국경으로 삼기는 아무래도 무리라 다리로 했구요.
유빙의 위협이 큰 해역이라 교각이 없는 현수교로 구상했습니다.
조명을 꺼 어두운 회의실, 화면에 몰입한 사람들.
“기점 블라디에서 동쪽 끝 추코트 반도까지가 시베리아 간선.
해협을 지나 페어뱅크스까지 총 6천km.이고
오호츠크 해안을 따라 남단의 오제르노프스키까지는 캄챠카 지선입니다.
영상을 짚어가는 김 청자,
자신만만한 표정.
“미국은 캄차카와 동부시베리아를 알라스카의 이웃 동네로 여깁니다.
그래서 관심이 많아요. 이건 ATLAS측 이야깁니다.
오래 전부터 알라스카, 하바 항로에 눈독을 들여 온 미국측은 육로가 열린다면 반길 겁니다.
원유만으로도 동기는 충분한데 덤으로 자원까지 풍부한 지역이니까요.
그녀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린다.
“문제는 이 지역 대부분이 영구동토대라는 겁니다.
얼음덩이 대지는 여름이면 개펄로 변합니다. 걷기는 묽고 헤엄치기는 된’ 개펄.
따라서 구조물들은 가라앉기 마련입니다. 바로 이점이 이 지역 토목공사가 난공사인 이유지요.
“누가 감히,
누군가가 문득 물었다.
“북한을 통과하는 철도를 제안할 수 있을까요?
김 청자는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빙긋 했다.
“그게 어려울 경우 연결은 블라디까지만 합니다.
한국과의 연결은 저희 역시 바라지만 그게 필수조건은 아니니까요.
한국 중심의 발상이 아닌 사업.
한국 중심의 사고로는 얼른 이해되지 않는 게 당연했다.
“여러 나라를 지나는 만큼 정치 문제가 얽히기 쉽지요.
그래서 특정국이 운영 주체가 되면 분쟁 소지가 커집니다.
따라서 운영주체는 컨소시엄 형태를 생각 중입니다.
철도부지는 미국의 파나마 Case를 검토 중이구요.
여러 모로 능력에 넘치는 부분이 많아 고민하던 차에
선생님들을 모시게 되어 든든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 동안 일우 건설 측이 보여준 과도한 호의의 배경을 기자들은 비로소 납득했다.
하지만 여전히 미심쩍은 대목은 많았다.
우선 일개 기업에서 거론하기에는 너무 방대한 사업규모,
자금이나 기술 확보도 결코 만만찮을 것이다.
이들의 동기는? 목표는? 능력은?
당혹한 기자들은 담배를 꺼내거나 종이컵을 만지작거렸다.
불이 켜지자 질문이 쏟아졌다.
“사법 추진주체는 어딥니까?
“민간입니다. 자료실 멤버를 중심으로 연구소 설립을 추진 중인데
그 연구소를 프로젝트 주체로 발전시킨다는 구상입니다.
“소요자금 규모는 어느 정도로 보십니까?
“250억불 정도. 1/3은 사업단과 관련국 출자, 나머지는 차관을 생각 중입니다.
“사업단 재원이 그 정도로 튼튼한가요?
“재단에서 부담하지만 실제로는 하사장 개인이나 진배 없습니다.
재단자산이 모두 하 사장 출연이니까.
30만평 넘는 이 농장도 재단 자산인데 싯가 3천억 정도로 압니다.
투자는 장기에 걸쳐 집행될 터이니 더 높은 가격도 기대할 수도 있겠지요.
또 일우 건설이 맡을 공사도 현물출자니까 자금 문제는 비교적 낙관하고 있습니다.
기자들은 정수의 재산규모에 놀랐다.
“두서없는 설명이었지만 이걸로 마칩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겠습니다.
잔잔한 감동이 흐르는 침묵이 있었다.
이윽고 몇 사람이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이매 30명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우렁찬 박수가 회의실을 휩쓸었다.
“이건 식민지 개척이잖아.
“가슴이 시원해. 내용이야 차츰 알아보면 될 일이고 아주 좋았어.
“그나저나 이거 사기당한 거 아냐, 하 사장을 무식한 노가다라더니, 식은 땀 나게 만드누만.
다들 무난한 얘기만 하고 있었다.
변죽만 울리는 우회적 화법에 익숙해진 청자 역시 듣는 분들 센스가 빨라
설명이 쉬웠다는 비단 같은 말만 했다.
회의실은 비단장수들의 공치사로 시끌벅적 했다.
다음 날 베링코스 탐사계획서가 배포되었다.
향후 5년에 걸쳐 철도부설 코스를 탐사한다는 설명과 함께
극동연구소 근무자 모집 안내문도 있었다.
“드디어 첫 제안이군.
“사건인데요. 금세기 10대 뉴스 급
“30년 공사잖아요. 2세기에 걸친 공사.
“우리끼리 얘기를 한번 나눠보는 게 어떨까요?
“그럽시다. 회의실로 갑시다. 국제 정치하고 외신부 사람들 빠지지 마시고,
모인 숫자는 어제와 비슷했다.
진 현구는 회의적이다.
“섶을 지고 불로 가는 겁니다. 안 그래도 건수가 없어 안달하는 판인데...
쏘련 통과철도 운운 하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일이 벌어질걸요.
“글쎄, 나도 좀 꺼림칙해. 이거 사잣밥 아닌지...
찬 물을 쓴 듯 조용해진다.
“하 사장과는,
유 이근이 발언했다.
“대학선배 김 찬오 교수를 통해 연결되었습니다.
베스트셀러 여행기로 인품이 잘 알려진 분이지요.
그런 분이 후배를 옭을 만큼 타락했다 보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하 사장의 호의 또한 왜곡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여러 사람이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럼 소위 베링 프로젝트라는 걸 어떻게 봐야 되겠습니까? 현실성 있다 보십니까?
“그런 점을 짚어보자고 모인 거 아니겠어요.
다짜고짜 결론으로 치닫지 말고 조목조목 짚어봅시다. 우선 기술적 설명부터...
회의는 장시간에 걸쳐 진행되었지만 극단론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 날의 난상토론을 통해 상황을 이해하고 입장도 정리할 수 있었다.
프로젝트 설명회
회의실의 U자형 대형 테이블에 기자단, 자료실 멤버들이 죽 앉아 있다.
"그러면 프로젝트 배경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잠시 회상하는 표정이 되었다.
"언젠가 사우디 건설부 장관이 중장기 건설계획 설명회를 한다기에 제네바로 갔습니다.
스위스의 컨설팅사에서 안내문을 보냈더군요.
참가비 250불에 식사비별도. 80명 남짓 참석했으니 2만불 정도 수입이 있었겠지요.
주최 측 준비래야 사우디 장관밖에 없었으니...
어쩐지 당한 기분이더라구요.
담담히 풀어가자 기자들 역시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자세를 편하게 고치며 담배도 피워 문다.
"열 명씩 업종, 나라별로 섞어 앉힙디다. 왼쪽에 필립스, 오른쪽은 롤스로이스 직원.
이 양반들, 제가 일본인 아닌가 확인하더니 이내 일본 성토로 들어가요.
요지는 공정하지 않다. 비겁하다 이건데
아, 대단해요. 노골적 적개심에 놀랐습니다.
요즘 한국을 제2의 일본, Japan of Japan 등등 으로 부르면
그걸 칭찬으로 듣는 분들 많지요?
전 말립니다. 거 무서운 얘기거던요. 울고 싶은 데 뺨 때려주는 격이랄까,
일본 대신 나한테 화풀이하라 광고하는 격입니다, 어리석은 짓입니다.
일본 경제권을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도 저렇게 되겠구나 싶었지요.
그런데 갈수록 깊어져가요. 그 요인 중 하나는 북한입니다.
주철업 하시는 어떤 분의 사례를 들겠습니다.
우리나라 수입 코크스는 마루베니 상사가 공급합니다. 품질은 C등급,
등급은 같은 무게에서 나오는 화력에 따라 매겨지지요.
규모가 커지고 역량을 쌓은 이분은 재품고급화를 원했습니다.
큐폴라를 200도 더 올려야 했지요. 해서 수입창구인 한국상사에 상위급 코크스를 발주했습니다.
그런데 안 된다는 겁니다. 본사방침일 뿐 그 이상은 모른다 했지요.
그래서 본사로 연락했더니 회신하기를,
`우리는 각 지역 공업수준을 배려해 공급한다.
이는 비싼 코크스 낭비를 방조해 고객 부담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운운`
결국 너희 주제에 무슨 B급? 계속 싸구려나 만들라는 얘기였지요.
열을 받은 이 친구가 다른 업체를 수배하려 들자 중개상사가 말리더랍니다.
일본업계의 생리상 안 될 얘기라는 거였지요.
‘oo 지역 코크스는 마루베니가 공급한다.’
는 합의가 이루어진 이상 다른 업체는 나설 수 없다는 겁니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하면 마루베니는 해당사에 전면전을 선포합니다.
원인이 된 상품은 물론 해당사의 전 품목을 공격하는 겁니다.
엄청난 출혈이 생기는 일이지요. 이러니 누가 감히 위반하겠습니까?
결국 일본외의 공급선을 물색했습니다.
하지만 큰 제철소들은 자급자족 체제라 공급처가 거의 없었지요.
겨우 나선 곳은 동구권과 중공이라 직거래가 안 되고.
어렵사리 추진시켰는데 알고 보니 그 중개상 역시 마루베니 하부조직이었습니다!
이런 떠그랄 일이 있습니까?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킨다. 오르락 내리락하는 울대뼈.
"그때 생각난 게 탐험사였습니다.
유럽은 동방 교역을 위해 실크로드, 희망봉 코스, 태평양 항로를 열었지요.
그런데 너무 멀어요.
보다 가까운 코스를 찾아 16세기 이래 3백년간을 헤맸지요.
이윽고 북극해, 베링해를 지나는 북동항로,
북미해안을 지나는 북서항로가 착착 열렸습니다.
이렇게 되자 영국은 급해졌습니다.
북동 항로는 러시아, 북서항로는 미국 영해. 기존 항로는 경쟁력이 없고...
고민 끝에 수에즈 운하라는 대안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항로를 단숨에 절반으로 단축 시켰지요."
교통과 자원전쟁 이야기는 청중을 몰입시켰다.
"옛 사람들은 이처럼 긴 호흡으로 해냈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눈을 맞추며 죽 둘러보았다.
"유럽은 금융과 상업이라면 자신 있지만 제조업만은 일본을 당할 수 없다 한탄합니다.
미국 역시 그렇구요. 모두 극동의 협력을 바랍니다.
다만 일본은 싫답니다.
그러니 이들과 맺어질 방법을 찾으면 될 텐데 그게 뭘까? 고민해 봤습니다.
그 결과, 일본의 경제여건보다 구조적인 비교우위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대륙 교통망을 궁리해 냈습니다.
시베리아 랜드 브릿지, SLB, 파나마 운하.
자료조사를 통해 얘기가 엮어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최종적으로 나온 구상이 미주와 유라시아를 잇는 대륙 철도였습니다.
이 구상이 성공하면 극동의 중심은 일본에서 베링으로 이동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나는 기자들을 응시했다.
"이 프로젝트의 실현에는 반세기 가까이 걸릴 겁니다.
또한 성패는 초기기획의 충실도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들을 연구소로 모시고 싶습니다.
나는 일어났다. 그리고 허리를 깊이 숙였다.
"부디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우는 전 직장에 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과분한 평가, 감사 말씀부터 드립니다.
진 현구가 신중하게 운을 떼었다.
"프로젝트 대상지역이 대부분 적성국이니
추진과정에서 이들과의 교류는 불가피하리라 봅니다. 이 경우 애로를 어떻게 극복하실지?
정곡을 찌른 질문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질문은 물론 배경까지 충분히 알겠습니다.
꺼내기 거북하셨을 줄로 생각되는 말씀, 터놓고 해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나는 목례를 보낸 후 이어갔다.
"선생님들의 특수한 입장 때문에 이 자리를 망서려왔습니다.
하지만 우물쭈물하다 놓치기에는 너무도 귀한 기회라 우선 저지른다는 기분으로
꺼내게 되었습니다.
우선은 그 부분을 우회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알라스카 탐사와 사용공법 선택을 위한 실험에만도 5-6년이 필요 합니다.
쏘련 지역은 외국 조사기관이나 용역사에 맡길 생각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선정과 운영이 연구소의 주요업무가 될 겁니다.
다음,
현실성이 있느냐에 대해서는 한 마디로 답변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공이 산을 옮겼다고,
일단 씨를 뿌리면 자라기 마련이고 시베리아나 알라스카 땅이 어디 갈 것도 아니니
자식 아니면 손자 대에는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진 기자는 이 선생과 시선을 맞추며 싱긋 했다.
답변은 명쾌할 뿐 아니라 우려를 충분히 불식시킬 만큼 합리적이었다.
의문이 해소된 그들은 가벼운 기분으로 토의를 시작했다.
끝날 무렵, 그들 대부분은 입소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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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흥미진진~~고맙게 읽고 있습니다.Chart,OHP에 많이 의존했던 시절 기억이 엊그제 같이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