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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여름, 스위스 로잔에서는 복음주의 진영이 주도하는 세계선교 대회(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 150개국, 2,473명 참여)가 열렸다. 부근 도시 제네바에는 에큐메니컬 진영이 주도하는 세계교회협의회(WCC) 국제 본부가 있었다. 호수 건너편에 있는 로잔에서 세계선교 대회를 개최한 것은 제네바 본부에 뭔가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1989년 여름, 필리핀 마닐라에서는 2차 로잔대회(170개국, 3,000여 명 참여)가 열렸다. 마닐라는 1980년대 중반에 시민들이 독재정권을 몰아내 민주화를 이뤘던 도시였다. 1차 대회 때 발표한 로잔언약 정신을 계승하는 마닐라선언이 나왔다. 그리고 2010년 가을,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의 인종차별 저항 및 종식의 역사로 유명한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화해’(reconciliation)를 주제로 3차 로잔대회(198개국, 4,200여 명 참여)가 열렸다. 불혹을 막 넘긴 나는 한국 참가자 자격으로 그곳에 있었다. 우리나라 화해 사례를 듣고 싶다는 영국인 리더의 질문에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짧은 영어를 탓하고 싶지만 정말 당황스러웠다.
케이프타운 대회가 끝나갈 무렵, ‘4차 로잔대회는 어디서 열리려나’ 생각하다가 서울을 떠올렸다. 남과 북이 화해의 숙제를 안고 있는 한반도, 국제 대회를 넉넉히 유치할 수 있을 듯했던 한국교회. 남북이 평화롭게 교류하는 안전한 한반도를 만들기 위해 기여할 수 있다면 서울 로잔대회는 괜찮은 그림 같았다. 10년은 지나야 열릴 테니, 나도 그땐 무슨 말이든 유창하겠거니 생각했다.
케이프타운에 다녀온 지 12년째 되던 작년 가을, 2024년 한국에서 로잔대회를 연다는 소식을 들었다. 결국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그런데 상황이 안 좋다. 지금은 교회를 떠나고 신앙생활도 멈춘 사람들도 주변에 많다. 남북 지도자가 판문점 경계를 손잡고 오가던 꿈같은 순간도 지나갔다. 모든 것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동북아시아 정세마저 요동친다. 거기다 장년이 된 나는 아직도 영어와 화해할 조짐이 없으니. 나눌거리도, 소통 수단도 마땅치 않은 시절이다.
로잔 문서들의 의미
1차 로잔대회는 언약 문서를 남겼다. 로잔 선교대회가 기원으로 삼는 1910년 에든버러 세계선교 대회(World Missionary Conference)가 ‘이 세대 안에 세계 복음화를!’이라는 비전에 몰입하느라 복음화 운동을 보호하고 지속할 신학적 기초를 갖지 못했다는 반성이 있었기 때문에1) 합의를 문서화하는 데 공을 들인 셈이다.
1960년대 당시는 복음전도 운동이 점차 활기를 띠었지만, 동시에 전통적인 서구 중심 선교 방식을 반성해야 한다는 요구가 강하게 나오던 때였다. 로잔언약이 특별한 주목을 받게 된 데는 복음전도 중심의 선교 시급성을 천명하면서도 사회참여를 복음전도와 같은 수준의 의무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표현은 로잔언약(covenant) 15개 항목 중 다섯 번째 항목에 나온다.
종종 전도(Evangelism)와 사회 참여(Social Concern)가 서로 상반된 것으로 잘못 생각한 데 대하여 뉘우친다. 사람 간의 화해(Reconciliation)가 곧 하나님과의 화해가 아니고, 사회적 참여(Social Action)가 전도일 수 없으며, 정치적 해방(Political Liberation)이 곧 구원은 아닐지라도, 복음전도와 사회-정치 참여(Socio-political involvement)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두 가지 의무(Christian Duty)임을 인정(affirm)한다.2)
본디 개인전도와 사회참여는 19세기까지 복음주의 선교운동에서 구분할 필요가 없는 개념이었다. 영적 부흥이 일어나면 흑인 노예 해방운동이나 노동운동으로도 이어지곤 했다. 그러나 20세기 전반부에 두 선교 방식은 분리되었고, 각자 상대방을 의심했다. 이 분리를 해결하겠다는 복음주의 진영의 의지 표명이 1974년 로잔에서 비로소 이뤄졌다. 로잔대회는 근본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면서, 동시에 WCC 산하 세계전도와선교위원회(CWME)가 주최한 1973년 방콕대회에서 정치·경제적 자유와 구원을 동일시하는 경향에도 반대했다.
로잔대회 현장에서는 40대 초반의 남미 복음주의 지도자들인 르네 파디야(Rene Padilla)와 사무엘 에스코바르(Samuel Escobar) 등이 주제 발표자로 나설 수 있었다. 파디야는 ‘복음을 왜 미국식 삶의 방식과 동일시하는가?’ 질문하면서, ‘윤리와 복음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에스코바르 역시 ‘기독교를 서구의 공식 이념으로 만드는 것은 위험하다’며, ‘구체적 가난을 영적 메시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들이 주도하는 500명 규모 급진적 제자도 그룹3)은 ‘전도와 참여를 구분하는 것은 악마적인 일’이라 단언하는 서한 〈로잔에 대한 응답(A Response to Lausanne)〉을 로잔대회 안에서 공개 발표하기도 했다. 존 스토트는 이들의 입장을 인정해주었다. 존 스토트가 세계 복음주의권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평가받게 된 것도 이들의 도전을 잘 받아냈기 때문이다.4)
“이제 우리는 우리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로 시작하는 3·1독립선언서와 같은 뜨거움은 없지만, 로잔언약은 적어도 20세기 개신교 복음주의 운동 여정 속에서 가장 돋보이는 역사적 합의였다. 한국 신학계에 로잔 관련 논문이 4백여 편이 올라와있다는 사실만 봐도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나도 2000년과 2001년에 〈복음과상황〉에 절실한 마음으로 기고했던 ‘복음주의 언약 다시 읽기’ 연재를 살펴보았다. 한마디로, 로잔언약은 20세기 복음주의 진영이 되찾아야 할 총체적 선교 정신을 약속해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고 30대의 내가 말하고 있었다. 로잔대회 참가자 다수는 도널드 맥가브란, 랄프 윈터 등이 제시한 ‘미전도종족’(Unreached People) 27억 명을 복음화해야 한다는 선교 주장에 더 깊은 인상을 받고 돌아갔다고 한다.5)
로잔언약이 지닌 총체성 정신은 2차 로잔대회의 마닐라선언(manifesto)에 더욱 반영되었다. 선언 21개 항 중 마지막 항목에서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Whole World)에 온전한 복음(Whole Gospel)을 전하라고 온 교회(Whole Church)를 부르고 계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신실하고 긴급하게 그리고 희생적으로 복음을 선포할 것을 결의한다”라고 적혀있다. 앞 문장은 총체적 선교에 힘을 싣고, 뒤 문장은 복음 선포에 힘을 실어 균형을 맞춘 형태를 띠었다. 물론, 로잔대회를 통해 총체적 선교 정신이 표현됐다고 해서 이 문서들을 ‘총체적 선교 문서’라고 간주하기는 힘들다. 중요한 것은 총체적 선교 개념이 복음주의권에서 수용되기 시작되었다는 점을 평가하는 데 있다.
‘케이프타운서약’, 로잔언약의 창의적 계승
그런데 3차 로잔대회가 채택한 케이프타운서약(commitment)에서 새로운 접근이 등장한다. 1부 10개 항목 중 마지막인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the Mission of God)를 사랑한다’에서는 로잔언약 5항을 설명하면서 ‘미가선언문’(The Micah Declaration on Integral Mission)을 인용하여 이렇게 달았다. ‘총체적 선교사역’(integral mission)에서 선포(our proclamation)는 사회적 결과(social consequences)를 낳고, 사회참여(social involvement)는 복음적 결과(evangelistic consequences)로 이어진다.6) 이는 존 스토트 사역 후계자로 알려진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사상이 반영된 것이다. 그가 쓴 《하나님의 선교》에 이 관점이 좀 더 자세히 설명되어있다. 복음전도는 우선적 가치(priority)가 아닌 궁극적 가치(ultimacy)를 갖는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총체적 선교에서 전도 우선성을 주장하면 사회참여는 언제나 부차적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7)
그에게 ‘하나님의 선교’란 하나님의 속성이자, 피조계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행동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해야 한다. 이는 교회가 선교의 내용과 영역을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전통적인 ‘교회의 선교’ 논의를 넘어서는 주장이기도 하다. 복음전도가 모든 사역의 궁극적 목표가 된다는 복음주의 전도 입장을 견지하면서, 선교사역의 총체적이고 다양한 접근을 개방하는 효과를 낸다. 마치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수학 난제를 풀어낸 천재 소년의 등장처럼 보였다.
총체적 선교는 항상 전도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고 회개와 믿음과 순종을 요청하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 이것을 포함하지 않는 선교는 ‘과제를 다하지 못한 것’이고 ‘결함이 있는 것’이라고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강조했다.8) 그는 복음전도의 위치를 우선성이 아닌 궁극성 개념으로 위상을 변경하여 3차로잔대회 주제인 ‘화해’를 자기 영역에서 구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케이프타운 대회장 도서 판매대에는 《하나님의 선교》 책만 한가득이었다. 팀 켈러, 존 파이퍼, 니키 검블, 오스 기니스 등 수많은 유명 저자가 참여한 만큼, 그들이 쓴 책도 골고루 전시될 줄 알았는데, 다소 이상한 방식이다 싶었다. 지금에야 누군가의 절실한 의도가 있지 않았겠나 싶다.
포옹하며 인사를 나누는 존 스토트(왼쪽)와 빌리 그레이엄. 두 사람은 로잔대회를 탄생시킨 복음주의권의 대표적인 지도자이다. (출처: 로잔운동 공식 홈페이지)
나는 케이프타운서약에 담긴 정신이 로잔언약을 가장 창의적으로 계승해냈다고 보지만, 전도의 우선성과 총체적 선교를 둘러싼 로잔운동 내부의 해석 논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 또한 로잔식 복음주의 선교운동이다. 보수적으로 보이는 복음주의 선교대회에서 이런 역동적 합의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복음주의자 특유의 자원주의 정신과 친교 정신과 관련된다고 보고 싶다. 복음주의자들은 복음주의의 전통적 공통점인 ‘회심’과 ‘선교적 행동’, ‘성경’과 ‘십자가 대속’에 대한 헌신이 느껴지면 모두 친구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의 한 자녀라는 의식에서 비롯된 인식일까? 빌리 그레이엄과 존 스토트는 그렇게 서로를 인정한 듯하다. 존 스토트에게 파디야와 에스코바르의 관계도 각별했다. 그들은 로잔대회가 열리기 얼마 전, 가난과 독재에 시달리던 중남미 지역을 존 스토트와 함께 여행했다. 서로 신뢰가 쌓였고, 존 스토트의 관점에도 변화가 생겼다.
나도 케이프타운에서 낯선 이들과 친교의 경험을 나누었다. 대회가 끝나갈 무렵, 색다른 만남의 시간이 주어졌다. 각자 원래 소속돼있던 단체의 모임을 열게 하겠다고 했다. 나도 IVF 모임을 찾아갔다. 수백 명이 서로 포옹하면서 얘기를 나눴다. 나도 일면식 있는 지도자들과 인사를 나눴다. 르네파디야, 사무엘 에스코바르, 린지 브라운 등등. 내 등을 톡톡 치며 인사를 걸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동아시아 간사 훈련을 함께 받았던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간사들이었다. 긴 얘기를 나눌 수 없었지만 마냥 반가웠다. 엄격한 위계가 있어 보이는 한국 대표단 모임과 너무 달랐다. 로잔은 선교단체, 교단 기관 대표자 모임이 아니라서 그런지 특별한 의전이 없었다. 기관 대표로 보이는 어른들이 식사 때마다 홀 바닥에 그냥 둘러앉아 샌드위치를 먹곤 했으니.
왜 다시 ‘로잔’인가?
내년에 4차 로잔 서울대회가 송도에서 열린다. 청년의 때에 1991년 〈복음과상황〉 창간호를 받아본 내 또래 이상의 독자들은 로잔언약을 분명히 기억할 것이다. 로잔언약은 1980년대 후반 총체적 복음주의 사회참여를 시도하는 이들에게 중요한 근거 문서였다. 보수적 복음주의 진영에 총체적 선교 가능성을 열어준 점은 정말 큰 성과였다. 덕분에 ‘권세들에게 순종하라’는 말씀 앞에 위축되지 않고, 복음주의 신앙을 갖고 부당한 권력에 저항할 수 있었다. 개인전도와 해외선교만이 아니라 사회선교 활동도 시작할 수 있었다. 누가 의심의 눈길을 보내면, 빌리 그레이엄과 존 스토트가 서명한 로잔언약을 가리켰다. 내 기억도 딱 거기서 멈춘다.
공교롭게도 케이프타운 대회가 마칠 즈음부터 시작된 우리 사회 내 갈등들 못지않게 복음주의 내부에서도 이슈별, 세대 간 갈등이 첨예해졌다. 대화도 멈췄다. 우리 가슴을 뛰게 했던 ‘복음주의’라는 단어가 어느새 진부한 느낌마저 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복음주의 운동도, 로잔도 조용히 잊혀가나 싶었다. 그런데 5천 명의 세계 복음주의자들이 4차 로잔대회를 치르기 위해 한국에 온다지 않는가? 고맙게도 복음주의 진영과 아직 연결돼있는 다음 세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로잔 복음주의 선교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한 차례 더 써보고자 한다.(계속)
■ 주
1) 조종남 편저, 《로잔 세계 복음화 운동의 역사와 정신》(IVP, 1990), 15쪽.
2) 앞의 책, 56쪽. 역자는 ‘concern’ ‘action’ ‘involvement’를 모두 ‘참여’로만 번역했으나, 각각 ‘관심’ ‘행동’ ‘개입’ 등으로 더 분명하게 번역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인정하다’로 번역된 ‘affirm’도 1차적 의미인 ‘단언하다’로 표현되었다면 원래 의미가 더 선명하게 전달되었으리라.
3) 이들은 1982년부터 ‘International Fellowship of Evangelical Mission Theology’(INFEMIT)이라는 단체로 활동한다.
4) 브라이언 스탠리, 이재근 옮김, 《복음주의 세계 확산》(CLC, 2014), 265쪽.
5) 앞의 책, 267쪽.
6) 로잔운동, 최형근 옮김, 《케이프타운 서약》(IVP, 2014), 61쪽.
7) 크리스토퍼 라이트, 정옥배·한화룡 옮김, 《하나님의 선교》, (IVP, 2010), 399쪽
8) 앞의 책, 4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