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독 데이빗 린치가 향수 광고를 제작한다. 기괴한 상상과 내밀한 공포로 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아름다운 색채와 이미지로 독특한 화면을 구성해내는 그가 연출할 광고는 ‘Lady Dior’ 백 광고 캠페인이다. 영화 ‘라비엥로즈’의 감독 올리비에다한과 여배우 마리온꼬띠야르가 출연했던 블랙과 레드의 선명한 대비가 매혹적이었던 광고를 기억한다면, 몽환적 환상과 색채 구성에 능란한 데이빗 린치 버전의 ‘Lady Dior’ 영상이 기대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영화적 상상력이 주는 매력 사실 데이빗 린치, 그리고 패션하우스의 향수와의 만남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1998년 캘빈클라인의 향수 ‘Obsession’ 광고를 제작하며 패션계와 인연을 맺었다. 스콧피츠제랄드, 어니스트헤밍웨이, D.H. 로렌스의 책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그의 ‘옵세션’ 시리즈 광고는 흑백의 비밀스럽고 감각적인 영상으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며 향수 광고를 한 차원 끌어 올렸고 자신만의 광고 미학을 이끌었다.
이후 2002년에는 조르지오아르마니의 향수 ‘Gio’와 입셍로랑 ‘Opium’ 커머셜을, 1993년에는 랑콤의 향수 ‘Tresor’, 1994년에는 칼라거펠트의 향수 ‘Sun, Moon Star' 등 유명 브랜드의 향수 광고를 연이어 제작하며 영화적 상상력을 향수 광고 세계로 이끌었고 얼마 전에는 슈즈 디자이너 크리스챤르부탱과 제휴, 사진전을 진행했을 뿐 아니라 구찌 시그너쳐 향수 광고를 통해 패션 광고에도 특유의 감성을 발휘한 바 있다.
잘 계산된 밀도 있는 화면 속에서 유혹과 두려움과 비밀을 때론 속삭이듯 때론 사로잡듯 풀어놓는 그의 영상이 향수가 갖고 있는 은밀한 매력과 매혹적인 시너지를 일궈내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하다. (데이빗 린치는 그에 앞서 ‘Lady Dior’ 광고를 제작했던 올리비에다한 감독처럼 마리온꼬띠야르와 함께 ‘Lady Dior’ 필름 광고를 진행할 예정이어서 같은 여주인공을 내세워, 각기 다른 영상 미학을 갖고 있는 두 사람이 제작한 ‘Lady Dior’의 분위기를 느껴보는 재미도 쏠쏠할 듯하다. ) 흥미로운 점은 영화 감독과 패션하우스의 만남이 단발적 이벤트가 아니라 지속적인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 ‘트랜스포머’의 성공으로 할리우드 영화계의 블루칩으로 자리한 마이클베이는 최근 섹시한 란제리 업체 ‘빅토리아시크릿‘과 손잡고 커머셜 광고를 제작했고 ‘아메리칸뷰티’의 감독 샘맨데스는 시리즈로 진행되는 입셍로랑 향수 ‘빠리지엔’의 ‘Away we go’, ‘The Soloist’ 편을 지휘하는가 하면, 각기 다른 색깔의 No. 5 향수 광고를 만들어낸 바즈루어만과 장주네, 젊고 모던한 샤넬의 향수 ’코코마드모아젤‘의 영상을 이끌어낸 조라이트, 귀엽고 사랑스런 향수 ‘미스디올’의 산뜻한 영상을 제작한 소피아코풀라, 숨 막힐 듯 매혹적이었던 디올의 ‘미드나잇포이즌’ 영상을 완성한 왕가위 등은 그들의 영화만큼이나 매력적인 영상미를 통해 때론 아련하고, 때론 경쾌하고 , 때론 지독할 정도로 관능적이고 유혹적인 컬러와 이미지를 구현해 낸다.
마치 짧은 영화 한편이 순식간에 가슴을 훑고 지나간 것만큼 강렬한 이미지의 영상은 해당 제품이 그저 ’상품‘이 아니라 누군가의 강렬한 욕망과 아픔을 고스란히 전달하며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데-바로 이점이 스토리와 화면 구성에 강한 영화감독이 패션 광고의 러브콜을 받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즉 영상으로 말하는데 익숙한 영화감독-사람의 감각 중 가장 예민한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는데 뛰어난 그들의 렌즈를 통해 빚어진 세상이 보는 이의 마음을 열고, 나아가 지갑을 열게 만드는 달콤한 최면이자 마법인 셈이다.
스토리와 이미지에 능숙…각인 효과 뛰어나 최근 국내 TV에도 방영되고 있는 2009 샤넬 No. 5 광고-오드리토투와 트래비스데이븐포트가 등장한 광고는 장주네 특유의 환상적인 색체이자 샤넬 No. 5의 컬러인-빛바랜 옐로우와 녹슨 세피아 컬러-속에 아련한 기억을 자극하는 스토리와 화면으로 애틋하고 절제된, 유혹에 흔들리는 여인의 마음이 절실하게 드러난다.
장주네가 아니라면 성숙한 향기가 매혹적인 샤넬 No, 5의 향을 이렇듯 감각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을까? ‘야간열차(train de Nuit)’를 배경으로 빌리할러데이의 절절한 노래 속에 성숙한 여인과 젊은 남성의 만남과 어긋남을 다룬 이 광고는 그 분위기만으로도 샤넬 No. 5의 성숙하고 유혹적인 향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반면 조라이트 감독이 지휘한 2007 ‘코코마드모아젤’ 광고는 젊고 자유분방하고, 중성적 매력이 물씬한 키에라나이틀리의 모습을 통해 경쾌하고 모던한 코코마드모아젤의 향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심장을 뚫을 듯한 푸른빛 영상 속에 퇴폐적일 만큼 매혹적인 에바그린의 이미지를 구현한 2007년 왕가위 작-디올 ‘미드나잇포이즌(Midnight Poison)’ 광고는 뱀파이어의 유혹만큼이나 지독하고 자극적이어서 ‘미드나잇포이즌’이란 향수의 이름과 절묘하게 매치된다. (영화 ‘트왈라잇(twilight)’의 푸른 빛 화면을 보면서 문득 ‘미드나잇포이즌’ 광고가 떠올랐는데 ‘트왈라잇'의 푸른빛이 음울하고 신비한 느낌이라면 ‘미드나잇포이즌’의 푸른빛은 날 선 칼날처럼, 생생하고 파괴적인 뜨거운 블루다.
우연일까? 뮤즈(Muse)의 곡 Space Dementia가 ‘미드나잇포이즌’ 광고의 섬뜩한 매력을 극대화시켰다면 ’트왈라잇‘에는 좀 더 경쾌한 그들의 곡, Supermassive blackhole이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 한편 트랜스포머를 통해 역동적이고 선명한 화면을 구축했던 마이클베이는 마리사밀러, 미란다커, 알레산드라애브로시오, 두첸크로스 등 빅토리아시크릿 모델들을 출연시켜 컬러풀하고 섹시한, 동시에 매우 미국적인 분위기의 광고 화면을 연출했다.
‘빅토리아시크릿 패션쇼’ 기간에 첫선을 보인 마이클베이의 작품은 성탄 시즌에 맞춘 캠페인으로 헤비메탈 뮤직과 헬리콥터, 총과 나이프, 란제리를 걸친 여성 등 미국적 상업성에 능숙한 마이클베이의 솜씨가 고스란히 반영된 오락 영화 분위기가 물씬하다. 일종의 시리즈 광고로 구성된 시네마 광고 트렌드 또한 영화 감독의 향수 광고 진출을 자극하는 요인 중의 하나다.
입셍로랑의 향수 빠리지엔이 대표적인 경우. 세월을 뛰어넘는 매력을 과시하는 케이트모스가 출연했던 ‘빠리지엔‘ 광고가 여성을 타깃으로 비밀스럽고 아찔한 관능미를 표현했다면, 영화 감독 샘맨데스가 지휘하고 로버트다우니주니어와 제이미폭스가 출연한 ‘Away We go’, ‘The Soloist’ 편은 다소 쓸쓸하고 관조적인 로드 무비 분위기를 자아낸다. 같은 향수라도 감독의 성향과 직관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는 영상의 미학이 다양한 성향을 가진 소비자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는 판단과 시리즈 광고를 통해 소비자들에게 빠리지엔 향수에 얽힌 스토리를 지속적으로 기다리고 접촉하게 만들어 빠리지엔 향수의 세상에 친근함을 갖게 되는 효과를 노린 것으로 보면 될 듯하다.
소비자의 감성을 파고드는 영상, 속삭임 사실 한정된 시간 속에 효과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잘 계산된 공간과 컬러,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단련된 감독들은 그 어느 때보다 번잡하고 다변화된 세상 속에 시선이 분산된 소비자들을 짧은 시간에, 가장 효과적으로 파고드는데 매우 효과적인 장치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소비자들, 특히 패션에 관심이 높은 소비자들은 구매를 자극하는 직설적인 광고의 화법보다는 환상과 궁금증을 자아내는 스토리가 있는 광고, 마음을 파고드는 영상과 시각적 자극에 매료되는 경향이 많아 영상과 스토리 전달에 익숙한 영화 감독은 패션계에 매우 소중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