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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사(鳳停寺.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901[봉정사길 222])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 고운사 소속 사찰.
봉정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의상(義湘, 625~702)은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속성은 김(金)이다.
신라 십성의 한 사람으로 당나라에 건너가 화엄을 공부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부석사(浮石寺)를 세우고 화엄종을 강론하여 우리나라 화엄종의 창시자가 되었다.
전국 열 군데에 화엄종 사찰을 세웠으며, 저서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등이 있다.
의상의 제자인 능인(能仁) 또한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동문인 표훈과 함께 금강산에 표훈사(表訓寺)를 창건하였다.
봉정사는 672년 의상 또는 능인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능인 창건설에 대하여 능인이 도력(道力)으로 종이로 만든 봉황을 날렸는데, 이 종이 봉황이 앉은 곳에 절을 짓고 ‘봉황이 앉은 자리’라 해서 봉정사(鳳停寺)라 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1363년(공민왕 12) 극락전을 중수한 이후, 1625년(인조 3)과 1809년(순조 9), 1864년(철종 14), 1972년 등 몇 차례의 중수가 있었다. 특히 1972년 극락전 해체 보수 때, 1363년(공민왕 12) 극락전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극락전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임이 확인되었다.
정자인 명옥대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강학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1665년(현종 6) 건립하였다.
봉정사는 법공양을 주요 활동으로 하고 있다.
봉정사는 안동에서는 규모가 가장 큰 사찰이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고려시대 목조 건물로 잘 알려진 극락전을 비롯해 대웅전·화엄강당·고금당 등의 문화재와 문루인 만세루, 대장경판이 보관된 경판고, 범종각·산령각·무량해회 등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부속 암자로 영산암과 지조암이 있으며, 일주문 가기 전 사찰 입구에 명옥대가 있다.
봉정사에는 국보 제15호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최근에 보물 제55호에서 국보 제311호로 승격된 대웅전, 보물 제448호인 화엄강당,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2호인 봉정사 삼층석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5호인 봉정사 만세루,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26호인 봉정사 영산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04호인 봉정사 동종 등의 문화재가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안동 봉정사 대웅전(安東 鳳停寺 大雄殿. 국보)
봉정사(鳳停寺)는 672년(신라 문무왕 12) 능인대사(能仁大師)에 의하여 창건되었다는 전설이 전하는데,<극락전 중수상량문>등 발견된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보면 7세기 후반 능인대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심 법당인 대웅전에는 석가모니삼존상이 모셔져 있다. 1962년 해체·수리 때 발견한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전기 건물로 추정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밖으로 뻗친 재료의 꾸밈없는 모양이 고려말·조선초 건축양식을 잘 갖추고 있고 앞쪽에 쪽마루를 설치한 것이 특이하다.
건물 안쪽에는 단청이 잘 남아 있어 이 시대 문양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건실하고 힘찬 짜임새를 잘 갖추고 있어 조선 전기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안동 봉정사 극락전(安東 鳳停寺 極樂殿. 국보)
봉정사(鳳停寺)는 672년(신라 문무왕 12) 능인대사(能仁大師)에 의하여 창건되었다는 전설이 전하는데,<극락전 중수상량문>등 발견된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보면 7세기 후반 능인대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극락전은 원래 대장전이라고 불렀으나 뒤에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1972년 보수공사 때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지붕을 크게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담긴 상량문을 발견하였는데, 우리 전통 목조건물은 신축후 지붕을 크게 수리하기까지 통상적으로 100~150년이 지나야 하므로 건립연대를 1200년대 초로 추정할 수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보고 있다.
앞면 3칸·옆면 4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기둥은 배흘림 형태이며, 처마 내밀기를 길게하기 위해 기둥위에 올린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 가운데에는 불상을 모셔놓고 그 위로 불상을 더욱 엄숙하게 꾸미는 화려한 닫집을 만들었다. 또한 불상을 모신 불단의 옆면에는 고려 중기 도자기 무늬와 같은 덩굴무늬를 새겨 놓았다.
봉정사 극락전은 통일신라시대 건축양식을 본받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안동 봉정사 영산회 괘불도(安東 鳳停寺 靈山會 掛佛圖. 보물)
이 그림의 화면구성은 기본적으로 경상도 지역 영산회괘불화 도상과 유사하나 좌우 8구의 협시보살을 비교적 크게 배치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중앙에 커다랗게 표현된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8보살과 10대 제자가 둘러싸고 있는 간단한 구도를 취하고 화면에 도상들을 부각시켜 꽉차게 묘사하였다.
입상의 본존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과 권속들이 둘러싼 이와 같은 형식은 18세기 경상북도에서 유행하던 것인데, 다른 작품에 비하여 보살이 본존의 어깨부분까지 올라오는 등 크게 묘사된 것이 특징이다. 불보살상의 상호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양감 있게 표현하였으며, 육신선과 옷의 처리는 비교적 굵은 선묘로 힘 있고 유연하게 처리한 것이 돋보인다.
색채는 주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천공에는 백색 화문을 흩뜨리고, 황색과 분홍색, 녹색 채운을 활용하여 화사함을 더하고 있다. 아울러 보살상의 하반신 수식 장식에는 금박으로 처리하여 포인트를 주고 있다. 이 작품은 18세기 괘불탱 중에서 이른 시기에 조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화풍도 뛰어난 작품이다.(출처 : 문화재청)
안동 봉정사 고금당(安東 鳳停寺 古金堂. 보물)
천등산 기슭에 있는 봉정사는 신문왕 2년(682) 의상대사가 지었다고 한다. 부석사를 세운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종이로 만든 봉황새를 날려 보냈는데, 그 새가 내려앉은 자리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이름지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 건물은 극락전 앞에 동향(東向)으로 서 있으며 원래 불상을 모시는 부속 건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지금은 승려가 기거하는 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1969년 해체·복원공사 당시 발견한 기록에 광해군 8년(1616)에 고쳐 지은 것을 알 수 있을 뿐 확실하게 언제 세웠는지 알 수 없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복원 전에는 북쪽 지붕 모양도 달랐고 방 앞쪽에 쪽마루가 있었으며 칸마다 외짝문이 달려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앞면 3칸에 2짝 여닫이문을 달았고 옆면과 뒷면은 벽으로 막아 놓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비록 건물은 작지만 다양한 건축기법을 사용하여 구조가 꼼꼼히 짜인 건축물로 주목 받고 있는 문화유산이다.(출처 : 문화재청)
봉정사동종(鳳停寺銅鍾.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조선 순조 13년(1813)에 만들어진 것으로 크기는 높이 67㎝, 음통 높이 22㎝, 종입구 지름 55㎝이다. 종은 전체적으로 어깨 부분은 완만한 곡선을 이루다가 중간 부분부터 종 입구까지는 거의 직선으로 처리되었다.
종 머리에는 종을 매다는 용뉴와 음통이 있는데, 용뉴는 용의 머리를 조각하였으나 약식화되었고 조선시대 종에는 생략된 소리의 울림을 좋게 하는 음통은 모양만 갖추었을 뿐 구멍은 막혀 있다. 종은 전체적으로 가로로 선을 돌려 세부분으로 나뉘었다. 가장 윗부분에는 서있는 모습의 보살상을 2구 조각하여 대칭적으로 배치하고 그 사이에 네모난 유곽이 자리하고 있다. 유곽안에는 9개의 유두가 있다. 종의 가운데 부분에는 범자(梵字)가 새겨진 동그란 원을 4개 배치하였고 그 나머지 여백에는 종의 내력을 적은 글이 새겨져 있다.
이 종은 비록 약식화되고 형식화되었으나 신라시대, 고려시대의 양식을 갖추고 있어 19세기에 만들어진 종으로서 신라, 고려 시대의 종 모습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된다.(출처 : 문화재청)
안동 봉정사 화엄강당(安東 鳳停寺 華嚴講堂. 보물)
봉정사(鳳停寺)는 672년(신라 문무왕 12) 능인대사(能仁大師)에 의하여 창건되었다는 전설이 전하는데,<극락전 중수상량문>등 발견된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보면 7세기 후반 능인대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화엄강당은 스님들이 불교의 기초 교학을 배우는 곳이다.『양법당중수기』등의 기록에 따르면 같은 경내에 있는 극락전과 대웅전을 17세기에 고쳐 지었을 때 화엄강당도 함께 고쳤을 것으로 추정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이 부재들이 다른 기법과 섞여 절충형식을 보이고 있는 점이 특징인데 대웅전보다 간결한 형태의 장식성을 사용하였다. 또한 강당으로 사용되는 건물이기 때문에 기둥은 낮지만 공포를 크게 잡아 겉모습의 균형을 살리고 있다. 2칸은 방이고 1칸은 부엌으로 되어 있으며 부엌과 방 사이에는 벽장을 설치하였다.
차분하고 안정감 있게 지은 건물로 우리나라 전통 건축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문화유산이다.(출처 : 문화재청)
봉정사만세루(鳳停寺萬歲樓.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봉정사 대웅전 앞에 있는 2층의 누각형태를 한 누문이다. 봉정사는 신라 신문왕 2년(682)에 의상대사가 세운 절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도력으로 만든 종이 봉황을 부석사에서 날리자 이곳에 내려 앉아 봉정사라 불렀다고 한다.
만세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앞면에서 보면 2층이나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뒷면은 단층으로 처리하였다. 아래층 가운데 칸에 출입문을 두었으며, 위층은 네모난 우물 정(井)자 모양의 우물마루 바닥에 평난간으로 둘러져 있다.
봉정사의 입구에 해당하는 누문으로 원래는 덕휘루로 불리웠으나 언제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 숙종 6년(1680)에 건립된 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된 만세루는 17세기 후반의 건실하면서도 당당한 건축수법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출처 : 문화재청)
봉정사삼층석탑(鳳停寺三層石塔.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봉정사 극락전의 영역에 자리하고 있는 3층 석탑이다.
2층 기단(基壇)을 쌓아 탑의 토대를 마련하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과 머리장식을 얹은 일반적인 모습이다. 아래·위층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새겼다. 기단에 비해 폭이 좁아진 탑신부는 각 층의 몸돌 크기가 위로 갈수록 적당하게 줄어들면서도, 폭의 변화는 적다. 지붕돌도 높이에 비해 폭이 좁고 두툼하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일부만 남아있다.
각 부분에 형식화가 심하고, 지붕돌이 두툼한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