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1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사도행전 11,21ㄴ-26; 13,1-3
마태오 10,7-13
나는 좋은 것만을 주는데 나쁜 것이 돌아온다고 느낄 때는?
오늘은 바르나바 사도 축일입니다.
바르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란 뜻을 지닙니다.
아마도 이름대로 이웃을 위로하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사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돌아온 것은 박해와 순교였습니다.
‘주는 것을 받는다.’라는 것은 하나의 흔들림 없는 세상의 법칙입니다.
내가 주는 대로 받는 것입니다. 내가 위로하면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내가 사랑을 베풀면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좋은 것을 주라고 파견받지만 박해와 모욕과 죽음을 받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이웃에게 좋은 것만을 주는데 내가 주지 않은 안 좋은 것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잘해 줘봐야 보람도 없다며 잘해주기를 멈춰야 할까요?
그러나 주는 것은 반드시 다시 받게 된다는 법칙을 믿어야만 합니다.
파도바의 안토니오는 많은 기적도 행했지만, 또한 위대한 설교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바닷가 마을은 안토니오 성인의 말을 좀처럼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성인의 설교를 들으려 모여들지 않았지만, 오히려 바다의 물고기들이 몰려와 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안토니오 성인의 설교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동물들을 통해 그의 설교를 듣게 하심으로써 그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위로하기 위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위로로 다시 갚아주지 않으실 리가 없습니다.
만약 100명이 들을법한 설교인데 1명만 듣는다면 99는 주님께서 갚아주십니다.
성 프란츠시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행복론은 더 특이합니다.
사람에게 위로를 받느니보다는 주님께 받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큰 행복이 무엇인지 아느냐?
내가 수많은 사람을 회개시키면 그것이 참 행복일까?
아니다. 더 큰 행복이 있다.
내가 어느 집에 문을 두드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먹을 것을 청할 때 심한 모욕을 당할 것이다.
이것이 행복이다.
그러면 나는 지치지 않고 다시 문을 두드려 주님의 이름으로 도움을 청할 것이다.
그 사람은 욕을 하며 오물을 뿌리고 나를 두들겨 팰 것이다.
이것이 행복이다.”
성인들은 주는 대로 받는다는 이 법칙을 아셨습니다.
당신들이 이 세상에서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면 주님께서 그 대신 더 큰 열매로
갚아주신다는 것을.
그러니 우리는 남을 위로하고, 복음을 전하고, 사랑하는 데 지쳐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 합당하게 채워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목숨을 바쳐 복음을 전했는데 사람들을 나의 목에 칼을 댔다면 하느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채워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라는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내가 주는 사랑에 대해 이웃이 어떠한 반응을 하던 내가 주는 것은 반드시 돌려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을 받으면 받아서 좋고, 거부당해도 나는 사랑의 보상을 받게 됩니다.
사랑이 거부되는 데서 오는 고통이 크다면 그만큼 더 큰 위안으로 주님께서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독일의 한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1부터 100까지 차례대로 합한 값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1+2+3+4+…+99+100’ 이렇게 하나하나 더해나갔습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손을 들더니 다 더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놀라며 값을 물었습니다.
“5050입니다.”
10살 때 이 문제를 푼 소년의 이름은 19세기 최고의 수학자가 될 칼 프리드리히 가우스였습니다.
가우스는 무조건 1부터 100까지 더하려 하지 않고 하나의 ‘법칙’을 발견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러한 법칙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100=101, 2+99=101, … , 99+2=101, 100+1=101”
1부터 100까지 가장 작은 것과 가장 큰 것을 더하면 항상 101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101이 50개가 생기니 101×50=5050이 나옵니다.
우리가 내어주는 것에도 이러한 법칙이 숨어있습니다.
결코, 내가 하는 수고는 합당한 보상을 받지 않고 끝나지 않습니다.
1밖에 받지 못했다면 사람들이 주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황금으로 도금된 100을 보상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 만들어놓으신 법칙입니다.
사랑합시다.
그러면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결코, 내가 하는 사랑보다 덜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 사랑이 거부당한다면 더욱 기뻐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 합당한 사랑을 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좋은 것을 주는데 결과만 보고 결코 지쳐서는 안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11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사도행전 11,21ㄴ-26; 13,1-3
마태오 10,7-13
위대한 바오로 사도 뒤에는 탁월한 조력자 바르나바 사도가 있었습니다!
큰 족적을 남긴 걸출한 인물은 홀로 탄생하는 것이 절대 아니더군요.
무대의 뒤에서 묵묵히 도와준 조력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보스코 뒤에는 지혜로 충만했던 요셉 카파소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고 존경받는 여성으로 유명한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 뒤에는
회개한 아버지 버논 윈프리가 있었습니다.
헬렌 켈러 뒤에는 설리반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함께 초대 교회를 이끌었던 위대한 선교사 바오로 사도 뒤에도 위대한 조력자가 한명 계셨으니,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바르나바 사도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단에 포함되지 않았으면서도 사도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부여받았습니다.
이는 그가 바오로 사도를 도와 초세기 교회 건설에 엄청난 기여를 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축으로 건설되는 것처럼 보이던 초세기 교회가 탄력을 받고 예루살렘 밖으로 퍼져나가게 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르나바 사도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의롭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바르나바 사도를 적임자로 선택하셨습니다.
바르나바 사도가 행한 일 가운데,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 탁월한 일 한 가지가 있었는데,
흙속의 진주를 찾아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오로 사도를 찾아간 것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비범하고도 탁월한 능력을 눈여겨 본것입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습니다. 바르나바는 애칭이자 별명입니다.
바르나바란 이름이 지닌 의미는 ‘위로’ ‘격려’ ‘용기를 복돋는 전문가’입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키프로스 태생으로 레위계 사제였습니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서울 강남격인 예루살렘 시내에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던 금수저 출신에 수려한 외모까지 겸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름에 걸맞게 바르나바 사도는 바오로 사도를 크게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그리스도교로 개종은 했었지만, 아직도 낯설기만한 그리스도교 공동체 신자들과의 관계 안에서 무척이나 위축되어 있고 의기소침해있던 바오로 사도를 찾아갑니다.
따뜻하게 위로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용기를 북돋아주며 앞으로 나아가도록 자극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자신들을 박해하던데 앞장서던 바오로 사도가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회개를 하고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찾아왔을 때, 무척이나 당혹스럽고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그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저러다가 또 언제 마음이 바뀌어서 우리를 위협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입장에서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은 그리스도교 신자들 앞에서 꽤나 괴로웠을 것입니다.
이런 난감한 상황 속에서 성령과 지혜로 가득했던 바르나바 사도가 두팔을 걷어붙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루살렘에 왔을 때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지만, 바르나바 사도는 그를 따뜻히 환대합니다.
다른 사도들에게 그를 소개해줍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배려와 협력에 힘입어 바오로 사도는 용기백배해서 그 위대한 선교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선교 여행 초기에 ‘바르나바와 바오로’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행에서 돌아올 때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로 표현합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때로 바오로 사도의 스승처럼 그를 지도했습니다.
때로 친구처럼 그를 동반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제자처럼 처신하며 그를 섬겼습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그리스도 교회를 이방인들에게 개방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 앞에서
바오로 사도의 편에 섰습니다.
적극적으로 그를 지지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회의는 이방인들에게 교회 문호를 활짝 여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6월11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성 바르나바는 비록 12사도의 명단에는 들지 않았지만, 사도행전에서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훌륭한 사람”(10,24)으로 사도로 인정하였다. 유다교에서 개종한 그는 자기 재산을 모두 사도들에게 봉헌함으로써 바르나바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개종한 후 초대 공동체 지도자들에게 바오로를 소개하였고, 그 공동체에 들어오게 하였다.
그리고 바오로의 선교여행에도 함께 하였고, 안티오키아 교회를 사목하기도 하였고, 바오로와 함께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 공동체에 전달하기도 하였고, 예루살렘 회의에도 참석하는 등 많은 활약상을 보였다. 바르나바 사도는 키프로스 교회의 창설자로 알려져 있으며, 61년경에 키프로스 섬의 살라미스에서 돌에 맞아 순교하신 분이다.
복음: 마태 10,7-13: 너희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7절)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로 가려고 하는 세상의 파멸이 곧 복음선포이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로 세상은 이제 다른 나라가 오고 있고 그 나라가 자기의 뒤를 이을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사도들은 이 말씀에 순명하여 예언자들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꺼려하지 않고, 장차 자신들이 겪을 위험과 싸움을 알고 있었지만 주님의 명령을 따랐다. 그들은 하늘 나라의 선포자가 되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8절) 주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모든 권능이 사도들에게 주어졌다. 사도들은 스승의 명령에 따라 살게 되니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상과 닮은 자들이 되었다. 세속적이었던 그들이 하늘 중심적인 이들이 되어,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고, 진리를 통해 하느님의 모습과 닮음을 이룰 수 있다고 선포한다. 그들이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라는 명령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병든 이를 고치고, 죽은 이를 되살리고, 나병환자를 깨끗이 하고, 악마를 쫓아내는 권능을 주셨다. 그러나 보상을 바라고 영적인 선물을 베푼다면 그 선물을 더럽히는 것이므로, 복음의 은총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탐욕을 단죄하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9절) 보수를 받지 않는 사도들이기 때문에 돈을 지닐 필요가 없었다. 사도들은 하느님의 섭리를 가르치면서, 이처럼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그래서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과 신발과 지팡이를 지니는 것도 금지 되었다.
여행 보따리는 세속 물건에 대한 관심을, 여벌 옷은 이단이나 율법 같은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옷 입으라는 말씀이며, 신발이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탈출 3,5 참조) 가시나무와 덤불로 덮인 거룩한 땅 위에서는 맨발로 확고히 서서 그리스도께 받은 것 말고는 어떤 신발도 지니지 말아야 한다. 지파이는 권위의 상징이다. 하느님의 힘이 아닌 외적인 힘을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팡이는 아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10절)고 하셨다. 그러므로 마땅한 사람을 찾아 그 집에 머물러야 했다. 그런 다음 더 좋은 대접을 받기 위해 이 집 저 집 옮겨 다녀서는 안 된다. 그리고 평화를 빌어 주라고 하시며 평화를 비는 말과 몸짓으로 표현하라고 하신다.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12절)
초대 교회의 ‘열두 사도의 가르침’에 보면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에 대해서 복음의 원칙을 따라 이렇게 하시오. 어느 사도든 여러분에게 오면 주님처럼 영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루만 머물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다음 날도 머물 것입니다. 그러나 사흘을 머무른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사도가 떠날 때에는 (다음 장소에서) 숙박할 때까지 (필요한) 빵밖에는 아무 것도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에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11,3-6).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평화를 전할 수 있어야 하며 구원의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은 바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생명을 줄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