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따스한 봄날, 친구와 고구마를 심었다. 집과 동떨어진 농장이라 자주 가지 못했다. 주인 발자국 소리도 듣지 못한 농작물이 잘 될리가 있을까. 뙤약볕이 작열하는 여름 한나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잡초와의 전쟁을 했다. 고구마를 심었다는 기억도 희미해질 무렵, 수확의 계절이 다가왔다. 친구가 하는 말이 "시장에 햇고구마가 나왔더라. 우리도 고구마 캐러 가자." 그다음에 하는 말이 더 가관이다. 고구마를 담을 커다란 박스까지 준비하라니 염치가 없어도 보통 없는 게 아니다. 심어 놓고 돌보지도 않았으면서 박스씩이나! 김칫국부터 마신다고 고구마도 땅속에서 웃겠다. 농장은 여전히 잡초로 무성하다. 우리는 낑낑거리며 웃자란 잡초부터 뽑아낸다. 얼기설기 뒤엉킨 풀뿌리가 딸려 나온 고구마보다도 크다. 고구마에게 가야 할 자양분을 잡초가 흡수해 버린 탓일까. 고구마가 튼실하지 못하다. 어쩌다가 주먹만한 고구마가 보일 뿐 손가락처럼 길쭉하니 볼품이 없다. 뿌린 만큼 거둔다는 만고불변의 진리에 가슴을 친다. 친구가 농장에서 갓 수확한 고구마를 삶는다. 못 생겼으면 어떠랴. 맛만 있으면 될 것이다. 게으른 농사꾼은 기대도 하면 안 된다. 여태껏 먹어 본 고구마 중에서 이처럼 맛없는 고구마는 생전 처음이다. 달지도 고소하지도 않은 고구마가 고랑에 널브러져 있다. 고구마를 맛본 친구가 급기야는 호미를 던져버린다. 맛도 없는 고구마를 더 이상 캘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이리저리 흩어진 고구마를 주섬주섬 담아서 집으로 돌아온다. 고구마가 다용도실에 들어간 지 보름이 지났다. 불현듯 지인의 말이 떠오른다. 고구마도 수확하고 나서 숙성기간이 필요하다고 했던가. 반신반의하면서 고구마를 꺼내 삶는다. 큰 기대 없이 김이 채 가시지도 않은 고구마를 맛본다. 어찌된 일인가. 농장에서 먹어 본 그 맛이 아니다. 달짝지근하다. 친구는 고구마를 어떻게 했을까. 맛없는 고구마를 아직까지 끌어안고 있을 리 만무하다. 그녀에게 전화를 한다. 역시 못생기기까지 한 고구마는 그녀 곁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전화를 끊고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조금 끌어안고 있어나 볼 일이지. 사람이든 식품이든 숙성기간이 있거늘."
첫댓글 그렇군요. 제주도에서 배달된 귤도 며칠 지나야 단맛이 나더군요. 고구마를 통해 큰 깨달음을 얻으시다니.
축하해야겠지요. ㅎㅎ
바쁘신데 댓글까지요.
고맙습니다.
그게 그렇더군요.
인간관계도 숙성이 필요한 거 절감했습니다. 숙성기간까지 기다릴 줄 알게
해 준 그 고구마 생김새도 맛도 궁금합니다. 언제 맛 보여 주실겁니까?
잘 풀어 쓰신 글 잘 읽고 갑니다.
고구마 맛!
언제든지요. ㅎ
맞아요
모든 것에는 숙성기간이 필요하고 말구요
잘 읽었습니다.
수고많으십니다.
고맙습니다.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지요
사람까지도 ^^
올해 고구마농사가 영
별로라 했는데 그래도 맛있는 고구마를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좋은 친구를 두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