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주시 상당 사거리 북서쪽 모퉁이 주변은 청주 장대가 있던 곳이다. 청주 장대터는 복자 장 토마스가 주님을 증거하며 처형된 곳이다. 장 토마스는 참된 신앙생활을 위해 진천 배티에 정착하였으나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진천 관아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은 후 청주로 이송되어 이곳 장대에서 처형되었다.경기도 수원 느지지에서 태어난 장 토마스는 1866년에 순교한 성 장주기(張周基, 일명 낙소, 1803~1866, 요셉)의 육촌 형제로, 그와 함께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이후 그들은 참된 신앙생활을 위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교회 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장 요셉 성인은 충청도 배론(현 충북 제천시 봉양면 구학리)에 정착하였고, 장 토마스는 진천 배티(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정착하였다.

당시 배티에는 토마스의 인척으로 생각되는 장 시몬 회장이 거주하고 있었다. 토마스는 이때부터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면서 하나 있는 아들에게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시작된 후, 장 토마스는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명령만을 따르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청주 포졸들이 들이닥쳐 그와 가족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이내 진천 관아로 압송된 토마스는 관장 앞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관장이 “천주교를 배반하면 죽이지 않을 것이며, 너의 세간을 돌려주어 살 수 있도록 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그는 “세간과 목숨은 버릴지언정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얼마 안 되어 토마스는 군대가 주둔하는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있은 문초와 형벌 때에 다시 영장이 “천주교를 배반하지 못하겠느냐”라고 묻자, 여전히 “만 번 죽어도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윽고 장 토마스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포졸들은 그를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로 끌고 나갔다.
바로 그때 토마스는 대자되는 사람이 배교하려는 것을 목격하고는 그에게 말하기를 “주님을 위하여 천주교를 봉행해 왔는데, 이런 기회를 버리고 목숨을 건진다면 장차 천주님의 벌을 어찌 면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권면하였다. 그런 다음 칼날 아래 목을 드리우고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 당시 토마스의 나이는 52세였다.
▒ 청주읍성
청주읍성은 현재 청주를 양분하고 있는 무심천의 동쪽 면의 구시가지로서 현재도 중심가이며, 청주읍성의 위치는 옛 북문과 남문 사이의 길다란 대로(현재 성안길)를 축으로 이를 포위한 장방형 형태로서 구한말까지 존재하였다고 한다.
현재 읍성의 형태는 찾아볼 수 없으나, 규모는 남문로 국민은행 앞 사거리를 기점으로 하여 동쪽의 옛 남궁병원으로 빠져나가는 사잇길을 따라 상당호의 서축을 북상하여 도청의 서문을 통과한 후 사직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가 옛 고속버스터미널 동쪽 앞의 사잇길을 빠져 오거리를 통과하고 현재의 청주문화원 서쪽 벽을 따라 남진하여 성남로와 만난 후 여기서 동쪽을 향하여 국민은행으로 이르는 길이 과거 청주읍성의 성지라 할 수 있다.
읍성은 네 개의 성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중 남문이 가장 크고 웅대했다 한다. 남문의 서문 시장의 남단 오거리, 동문의 위치는 경산부인과 앞이라 한다. 이 청주읍성 내중심 건물인 청주 동헌은 현재 청주시 상당구 북문로1가 171-3번지의 청원군청 내에 있다.
■ 순교자
◆ 복자 장 토마스 (1815-1866년)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재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난 장 토마스는 1866년에 순교한 성 장주기(요셉)의 6촌 형제로, 그와 함께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이후 그들은 참된 신앙생활을 위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교회 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진천 배티(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정착하였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시작된 후, 장 토마스는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있다가 얼마 안되어 청주 포졸들이 들이닥쳐 그와 가족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이내 진천 관아로 압송된 토마스는 관장 앞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얼마 안 되어 토마스는 군대가 주둔하는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있은 문초와 형벌 끝에 사형이 선고되고, 포졸들은 그를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청주시 남문로 2가)로 끌고 나갔다. 바로 그때 토마스는 대자 되는 사람이 배교하려는 것을 목격하고는 그에게 말하기를 “주님을 위하여 천주교를 봉행해 왔는데, 이런 기회를 버리고 목숨을 건진다면 장차 천주님의 벌을 어찌 면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권면하였다. 그런 다음 칼날 아래 목을 드리우고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 당시 토마스의 나이는 51세였다.
■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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