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813. 묵상글 ( 연중 제19주일. -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등 )
** 1차 : 06:15, 김찬선 신부님 글 올려지지 아니한다고, 06:22. 재차 확인하여 올림
** 2차 : 14:55, 키엣 대주교님 묵상글 확인하여 추가로 올림
** 3차 : 19:55,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묵상글 대신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묵상글 게재
----------------------------------------------------
230813. 연중 제19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 2023.08.13. 06:03>
오늘 왠지 모르지만
강론을 올려지지 않습니다.
오늘 왠지 모르지만
강론을 올려지지 않습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 아래줄 첨가시 삭제됨 ( 2023. 06:22 확인)
-----------------------------------
그래서 아래 댓글 칸에다 올렸으니 거기서 보시기 바랍니다.
### 2023. 06:22 확인 올림
http://www.ofmkorea.org/ofmhomily/532493
작은형제회 - 나눔방 - 말씀나눔 - 2023. 08.13. 댓글
+++ ++++++++++++++++++++++++++++++++++++++++++++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수도자라면 더더욱 하느님 현존 체험을 원합니다.
그런데 왜 하느님 현존을 체험하지 못할까요?
원한다고 하지만 그 갈망과 원의가 약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야말로 체험의 가장 근본적인 결격사유이고,
그렇다면 왜 갈망과 원의가 약할까 다시 질문케 됩니다.
그것은 초월적 감수성이 본래 약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현재의 삶이 평안하고 안전하고 그래서 하느님 없이도 사는 데
별 어려움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보통 살만하면 하느님을 잘 찾지 않고 오히려 불평이 많은 법이고,
삶이 위태로워지고 고통스럽고 불안하고 두려울 때 찾곤 하잖아요?
그래서 오늘 연중 제19주일은 하느님을 체험하는 엘리야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얘기를 전하면서
위기와 두려움 체험의 상황을 먼저 전합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거짓 예언자들과 싸워 모두 작살낸 다음,
그로 인해 이세벨에게 쫓겨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도망치고,
거기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가운데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었고,
베드로와 제자들은 풍랑으로 죽게 되었을 때 구원의 주님을 체험하게 되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선에서 선하신 하느님을 더 잘 체험할 것 같은데
보통 선에서 선하신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하고
악에서 선하신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왜 그럴까 생각하면 보통 우리가 체험하는 선들은
우리가 그 선에 주저앉고 머물게 하고 대리 만족하게 하지,
그 선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지혜서는 이런 통찰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훌륭하신지 그들은 알아야 한다.
아름다움을 만드신 분께서 그것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찾고 또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러는 가운데
빗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분의 업적을 줄곧 주의 깊게 탐구하다가
눈에 보이는 것들이 하도 아름다워 그 겉모양에 정신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아름다운 꽃들을 보면 ‘아! 아름답다. 참 좋다.’라고 하지
‘이 이름다운 꽃들을 지어내신 참으로 좋으신 주님이여!’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워 볼 때’를 노래하면
선에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사람 곧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반대로 악을 경험하면 그 싫어하는 악에서 도망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제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으면 그때 그 악에서 구해줄 하느님을 찾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도록 가르쳐주셨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이것을 바꾸면 선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두려운 악에서 구하소서.
이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에 머물지 않고 고통의 악에서 구하소서.
이 세상의 온갖 안락함에 안주하지 않고 불안의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선과 기쁨과 즐거움과 안락함은 우리를 거기에 머물게 하고 안주케 하지만
두려움과 고통과 불안의 악들은 거기서 도망치게 하고 주님을 찾게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종종 당신을 체험하도록 악의 방법을 쓰십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일부러 제자들만 따로 호수를 건너게 하십니다.
당신 없이 그 두려운 풍랑을 맞닥뜨리게 하십니다.
다른 곳에선 한배에 타고 계시지만 잠자고 계시고,
풍랑과 힘겨운 싸움을 하다가 살려달라고 할 때에야
일어나시어 풍랑에서 구출해주십니다.
악의 체험, 한계 체험, 두려움의 체험을 먼저 하시고,
당신의 현존과 구원을 체험하게 하시는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
230813. 연중 제19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19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배경을 보면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죽은 세례자 요한이 살아 돌아온 것이라고 언급 하면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 언급됩니다. 요한의 폭력적인 죽음온 장차 예수의 죽음도 폭력적일 것임을 예고하면서 예수 주변의 배척과 갈등이 점차 커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요한의 죽음을 전해 듣고 예수께서는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가셔서 오천 명을 먹이는 빵의 기적과 물 위를 걷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빵의 기적 이야기는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광야를 배경으로 하면서 성찬례를 준비시키고, 물위를 걷는 기적은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갈대 바다(탈출14,22)와 요르단 강을 건넌 사건(여호 3,17)을 연상시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물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그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완고해 졌다고 묘사한 것(6,52)과 달리 마태오 복음은 제자들이 물 위를 걸어 배 안에 오르신 예수님께 하느님의 아드님 이라고 고백한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물위를 걸어오라고 말씀하시고 베드로가 물에 빠져들기 시작할 때 도움을 청하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십니다(14,28-31).
주님께서 물위를 걸으시는 기적을 통하여 베드로는 배 안에 있는 제자공동체를 대표할 뿐 아니라 믿음이 부족한 제자로서 다른 제자들을 대표하고,주님의 도움이 없으면 제자 공동체는 난파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신앙 공동체에서 영적인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오늘 복음을 통해서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성숙한 인간성을 갖춘 지도자는 상대방의 마음 상태에 참여하는 능력과 자유를 누립니다. 자신의 사고와 주장을 설득시키려는 경향 없이, 품위 있는 사랑의 정신으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의 문제점과 마음상태에 동참합니다. 다른이의 인격을 이해하고 성숙하도록 돕기에 앞서, 자기 자신의 인격을 먼저 알고 성숙되어 있어야 합니다. 인간적 및 영적 성숙의 갖춤이나 결핍은 상대방에 의해 즉시 감지됩니다.
영적인 지도자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에 영감을 받고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지도자가 하느님의 말씀에 바탕을 둔 기도하는 사람이 아닐 때 그의 도움활동은 단순히 자신의 능력이나 인간적 역할에 불과하게 됩니다. 말씀과 기도의 사람일 때 일상의 모든 사건안에서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을 찾을 수 있고 모든 활동은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에 놓여져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진실한 영적지도자만이 사람들에게 자유를 얻도록 자기 자신이 되는 용기를 갖추도록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심을 기르도록 고무하며 동반해 줄 수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들이 지녀야 덕목중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온유함과 고통을 견뎌내는 일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사람과 일이라도 그리스도의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대하게 될 때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많은 위대한 지도자들 중에는 보통사람들은 잘 모르는 극심한 고통을 견뎌내는 이들이 많습니다. 우울과 회의와 혼란과 절망이 닥쳐와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안에서도 그것들을 주님께 의탁하고 헤쳐나가는 강인한 정신력과 불굴의 의지를 지니기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의 중심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영적 지도자이자 봉사자가 되기를 주님께 청하도록 합시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얼어붙은 연못 속의 성체
독일 - 1240년
1240년 성모 승천 대축일 전날 밤에 두 명의 도둑이 에어푸르트(Erfurt)에 있는 성 마르틴 성당에 몰래 들어갔다.
그들은 탐욕에 눈이 어두워 돈과 값진 물건들을 찾기 위해 여기 저기를 뒤졌다. 그러다가 그들은 성체를 모신 감실에서 성합을 발견하였다. 그 잔 속에는 9 개의 성체가 들어 있었다.
서둘러서 그들은 모든 것을 쓸어 모았다. 도망을 치면서 그들은 작은 잔을 팔아먹기 위해 잔 속에 보관되어 있던 성체를 당시의 풍습에 따라 부드럽고 하얀 천에 싸가지고는 연못의 갈대 속으로 던져버렸다.
이 가련한 자들은 형벌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잘못 생각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격언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은 천천히, 그러나 매우 곱게 방아를 찧으신다.'
몇 주일이 지나서 그 도둑 중의 한 사람이 병에 걸렸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범죄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그는 주님의 고통당하신 손을 생각하고는 회개하고 병자성사를 받았다. 죽어가면서 그는 언젠가 자신의 불경한 죄악의 손으로 에어푸르트 연못에 버린 성체를 찾아 달라고 사제에게 간절히 청하였다.(217)
-----------------------
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
230813. 연중 제19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오늘은 연중 19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참으로 하느님을 신뢰했던 세 사람, 곧 엘리야와 바오로와 베드로가 믿음의 위기에 닥쳤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의 믿음이 위험에 처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제1독서>는 엘리야가 가르멜 산에서 바알의 사재들을 쳐 죽인 후 자신을 죽이려는 이제벨 여왕을 피하여 호렙산의 동굴에 피해 있을 때, 주님께서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1열왕 19,11) 하시고,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당신을 찾아오시어 위로하심을 전해줍니다. 곧 믿음의 위기에서 엘리야를 건져주셨음을 보여줍니다.
<제2독서>는 바오로의 일생을 통하여 그를 괴롭힌 것이 있었으니, 자신의 동족인 유다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와 불신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에 대한 답을 주시지 않았지만,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것과 그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했을 지라도 그분을 받아들일 날이 오리라는 것을 확신하며, 신뢰와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영원히 찬미 받으실 분이십니다.”(로마 9,5)
<복음>은 베드로가 물에 빠진 후, 신앙의 위기에서 오히려 주님께 대한 믿음을 되찾은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의 이야기는 의심하는 습관을 지닌 한 회의주의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압도되어 혼란에 휩싸여서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곧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삶에 기꺼이 도전하고, 미지의 물속으로 뛰어드는 신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더 깊은 신앙의 길로 나아가려는 바로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어둠과 위험과 만연한 이 세상에서 교회라는 배를 타고 하늘나라라는 건너편으로 건너갑니다. 그러나 배를 타고 앉아 있다고 해서, 절로 건너편으로 건너가는 것은 아닙니다. 침몰하지 않으려면, 키를 제대로 잡고서 모든 위험요소를 헤쳐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삶의 물살이 고요한 강물처럼 잔잔하게 흐를 때는 믿음과 신뢰에 대한 도전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삶의 물살이 암담하고 격렬하게 풍랑으로 밀어닥치면, 우리의 신앙은 베드로처럼 시험에 들게 되고 도전을 받게 됩니다.
베드로는 신앙의 도약을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합니다. 그는 안전한 자기 배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예수님께 와 달라고 소리쳐 부르기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습니다.”(마태 14,19)
그렇습니다. 우리는 물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마치,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호수 위를 걸어가듯, 교회 바깥의 거리로 나가는 모험을 감행하기를 촉구하셨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안전한 울타리를 벗어나 길을 떠나지 않고서는 신앙의 도약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은 가만히 앉아 있거나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불투명한 미지에 던질 때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비록 물속에 빠져 허우적댄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사실, 물은 우리를 침몰시키기도 하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걸으면 우리를 떠받쳐주고 목적지로 인도하는 발판이 되기도 합니다. 참으로, 신앙의 길은 예수님께만 믿음을 두는 순종을 통해서 가능해지나 봅니다. 진정, 순종할 때라야 비로소 신앙이 되나 봅니다.
본 훼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신앙이란 순종이 있을 때에만 참이다. 순종할 때에만 비로소 신앙은 신앙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위기의 순간에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캄캄한 밤에 길을 잃고 헤맬 때, 풍랑 속에서 혼란과 혼동에 빠졌을 때, 어둠과 절망에 빠져 두려움에 휩싸였을 때, 바로 우리 곁에 다가와 계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약해져 있을 때, 오히려 당신의 손을 내미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사실, ‘믿음’은 기본적으로 어떤 사실이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을 넘어서, 그 사실에 대한 신뢰와 헌신(충실), 곧 순종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문제를 성장과 단련, 그리고 배움과 도약의 기회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하여, 믿음은 우리를 물위를 건너게 하여, 마침내 예수님 품에 안기게 합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믿음’이란 “초월성이 진짜임을 인정하는(assentire) 능력”, 곧 ‘삶의 이면에 실재하는 우리가 경험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실재하는 더 성스러운 차원을 인정하는 능력’이며, 동시에 이러한 ‘인정’은 지성의 굴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 속에서 어렴풋이 느끼는 비경험적인 실재들을 인정하고 기뻐하는(assentio;박수갈채) 능력’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믿음에는 ‘기쁨’이 동반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그분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다면, 기쁨 속에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마태 14,33) 주님을 찬양하였듯이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주님,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 14,28)
주님!
배안에 머물러 있기만을 고집하지 말게 하소서.
풍랑이 위협할지라도 믿음의 구명대를 입고 물위를 걷게 하소서.
삼킬 것 같은 풍랑이 오히려 저를 떠받들게 하시고,
넘어뜨릴 것 같은 거센 바람이 오히려 저를 이끌게 하소서.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하신 당신이 바로 ‘저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
230813. 연중 제19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 오늘 묵상글 게시 없음 (홈피에 19:35에 19주간 월요일 묵상 올라옴)
-------------------------
230813. 연중 제19주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22&id=2064253&menu=4770
이기승 [bona24] 2023-08-12 ㅣNo.164937
오늘 독서의 동굴 속의 엘리야와 호수에 빠진 베드로의 모습이 너무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사실 이 두 상징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풍부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가장 위대하면서도 가장 소심한 인간의 양면성을 잘 드러내 주는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이 참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어가는 이야기로, 그 이야기란 다름 아닌 자신이 누구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자신 또한 옆집의 그 사람과 하등의 차이가 없는 소시민적인 근성과 그렇고 그런 부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통렬한 자기 깨달음의 이야기 말입니다.
먼저 엘리야의 이야기가 전해주는 메시지를 묵상해 봅시다. 엘리야는 거짓 예언자가 활개 치는 세상에서 홀로 하느님의 영으로 불타올라 갈멜산에서 누가 진짜 예언자인지, 누가 참된 하느님의 사자使者인지 판가름하는 진검승부를 펼쳐 승리하지만, 이세벨 왕비가 자신을 죽이겠다는 위협에 엘리야는 이세벨이 무서워 호렙산으로 줄행랑을 쳐 도망칩니다. 나름대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정의로운 행동에 목숨까지 걸면서 싸웠던 위대한 존재가, 자신을 위협하는 이세벨의 기세가 무서워 줄행랑을 쳐 도망치는 꼴은 마치 우리 자신의 어두운 구석, 내면의 그림자와 콤플렉스를 보여 줍니다. 남자란 가끔은 이런 허망한 구석이 있답니다. 자기 딴에는 제법 그럴싸한 객기로 강한 척하면서도 남이 이해할 수 없는 하찮은 것으로 말미암아 꼬리를 내려 뒷걸음치는 면이 있고, 이를 심리학에서는 퇴행이라고 하지요. 자기 안의 어둠(=동굴)에 머물고, 자기 열등감이나 콤플렉스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한 지극히 나약한 모습을 엘리야는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우리 자신을 다시금 깊이 생각하도록 해 줍니다. 남자란 자기 어둠, 문제로부터 스스로 제 발로 동굴이나 방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 열왕기에선, 하느님께서 엘리야에게 명합니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는(19,11) 이 명령은 단지 엘리아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우리 모두 자신의 내적 어둠, 동굴에서 처박혀 있지 말고, 자신의 열등감이나 콤플렉스에 연연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느님 앞에 서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우리를 더 잘 아시고, 골수와 머리카락까지도 꿰뚫으신 분이시기에 당신 앞에 당당히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크고 강한 바람, 지진 가운데 계시지 않고 오히려 미풍 가운데 서 계시는 하느님의 자애 앞에 있는 그대로, ‘지금 너 어디 있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창3,9~10)라는 대답을 대신해서, 그야말로 본래의 자기 모습대로 나와 서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돌아설 수 있지만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의 존재인가를 깊이 깨닫고, 사랑과 생명이신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하느님 앞에서 참 자유를 누리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순수와 거짓, 정의와 불의, 선과 악으로 늘 내적 싸움을 하는 존재로 사랑하게 되며 떳떳이 하느님 앞에 설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은 남을 변화시키려는 것이고, 가장 힘든 일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자신을 변화시키길 원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자기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자신의 소리= 하느님의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불같은 열정 속에 숨겨진 욕망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지진과 같은 외침 속에 숨겨진 자기 교만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하고, 바람 같은 부드러움 몸짓 속에 드리워진 콤플렉스의 그림자를 볼 줄 아는 사람만이 세상을 끌어안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세상과 함께 갈 수 있습니다.
복음의 이야기 또한 아주 미묘한 상황입니다. 저녁에 호수를 건너기 시작한 배는 이미 새벽, 여명이 떠오르는 시간이 되었는데도 호수를 건너지 못하고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풍랑(=내적 갈등)에 허덕이고 겁에 잔뜩 질린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14,2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의기양양한 베드로는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14,28)라고 간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는 주저 없이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습니다. 참으로 베드로의 물 위를 걸은 행동은 어떤 누구도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걸었던 존재는 없었고 없을 만큼 대단히 신적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마치 엘리야가 행한 위대한 일처럼, 하지만 베드로는 그렇게 위대한 일을 실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14,30) 조금 전과 전혀 다른 비굴하고 나약한 자기 모습을 직면하자 이내 호수에 빠져듭니다. (*엘리야의 동굴로 칩거와 동일 이미지) 이것이 인간의 가장 적나라한 모순적 실존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누구도 예외가 없으며, 다만 이런 자신의 콤플렉스나 열등감에 주저앉지 않고 기꺼이 인정하면서 ‘주님 앞에 서라, 오너라.’는 주님의 따뜻한 격려와 지지에 힘입어 극복해 나가야 하리라 봅니다. 이러한 과정은 주님과의 믿음의 여정이며 관계의 심화 과정이라고 봅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베드로처럼 호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동굴에 스스로 칩거할 수 있고, 상황이나 외적 환경과 현실에 의해 호수에 빠져 허우적댈 수 있음을 인정합시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 놓일 때 자신의 나약함이나 실패나 열등감에 연연하거나 집중하지 않고 ‘여기 지금 함께 계시는 주님의 현존’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을 때 주저하지 말고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14,30) 오직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만이 동굴에서나 호수에서 벗어나고 빠져나올 수 있으며,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적나라한 자신의 본래 모습대로 하느님 앞에 서는 것을 관상의 경지라고 하며, 이런 관상의 경지에는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이 영혼을 보시듯이 영혼이 하느님을 볼 수 있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내면이 미풍처럼 가라앉고 잠잠할 때 느껴지며, 이러한 상태는 인간이 인간의 허상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자신, 이미 내 안에 내 것이 되어 버리신 하느님과 참된 일치와 친교의 관계를 누릴 것입니다. ‘진계유’라는 분의 시를 읽으면서 우리의 자신의 진면목을 듣고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고요히 앉아 본 뒤에야 평상시의 마음이 경박했음을 알았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았네. 일을 돌아본 뒤에야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냈음을 알았네. 문을 닫아건 뒤에야 앞서의 사귐이 지나쳤음을 알았네. 욕심을 줄인 뒤에야 이전의 잘못이 많았음을 알았네. 마음을 쏟은 뒤에야 평소의 마음 씀이 각박했음을 알았네』
----------------------------------------------------
230813. 연중 제19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80년 고등학교 때입니다. 성당 친구들과 문산으로 여행을 갔습니다. 문산가는 기차는 서울역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늦게 오는 친구들이 있어서 저는 남아 친구들에게 표를 주기로 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저와 친하게 지내던 여자 친구를 친구에게 부탁했습니다. 제 친구는 저의 여자 친구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고, 서울역에서 문산으로 가는 길에 둘이 더 친해졌습니다. 저는 나중에 문산에 도착해서 어색해진 분위기를 알았습니다. 그렇게 저의 여자 친구는 친구의 여자 친구가 되었고, 저는 둘이 잘 되기를 바랐습니다. 저는 여자 친구와 헤어져서는 아니었지만 신학교에 들어갔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43년 전 딱 이맘때의 일입니다. 친구들을 위해서 표를 전해 주었던 저를 하느님께서는 어여삐 봐 주셔서 제가 사제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제가 되는 동기는 거룩할 수도 있지만 아주 사소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 여름이면 ‘남량특집’이라는 것을 했습니다. 날이 더우니 무서운 내용의 드라마를 보여주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구미호’였습니다. 그런 드라마를 보면서 한 여름의 열기를 식힐 수 있었습니다. 저의 삶에도 남량특집에 나올 수 있을 것 같은 순간들이 몇 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군대에 있을 때입니다. 저는 신학생이어서 성당 군종병으로 선발 되었습니다. 처음 3달은 잘 지냈는데 저의 부족함 때문에 성당에서의 일을 그만두고 본부중대로 가게 되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잔디밭에 거름을 주라고 했는데 귀찮아서 몇 군데만 주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니 거름을 지나치게 많이 뿌린 곳의 잔디는 노랗게 변하였습니다. 그 뒤로 몇 번의 실수가 있었고, 신부님은 저를 다른 곳에서 근무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감사할 일입니다. 신부님의 엄한 질책이 있었기에 저는 남은 군 생활을 정신 차리고 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사제가 되어서 신부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사목국에서 교육담당 업무를 할 때였습니다. 저는 4시에 강의가 있었지만 1시에 미리 와서 분위기를 보았습니다. 봉사자들은 제가 미리 온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분위기를 대충 보았고, 성당 앞을 보니 ‘불가마’ 사우나가 있어서 잠시 쉬기로 했습니다. 사우나에서 쉬고 있는데 방송으로 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저는 사우나에 방송 시설이 있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한편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사우나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사연을 들으면서 웃음이 나왔습니다. 2시에 강의를 해야 할 신부님이 교통체증으로 늦을 것 같다고 연락했다고 합니다. 봉사자는 제가 있기에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와 시간을 바꾸면 된다고 했습니다. 봉사자의 말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봉사자는 제가 성체조배하는 줄 알고 성당에 갔는데 거기에 저는 없었습니다. 제가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는 줄 알고 성모상 앞으로 갔는데 거기에도 저는 없었습니다. 사제관에서 신부님과 대화하는 줄 알고 사제관에 갔는데 거기에도 저는 없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불가마에서 저를 찾았다고 합니다. 다행히 저의 이름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저는 부랴부랴 사우나에서 나와 강의를 했습니다.
오늘의 성서말씀도 한편의 남량특집같습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을 체험하는데 하느님께서는 큰 바람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진 속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침묵’ 속에 계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성공 속에서 찾으려고 하면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재물 속에서 찾으려고 하면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권력 속에서 찾으려고 하면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깊은 침묵 속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물 위를 걸을 수 있도록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걸으면서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우리들 또한 신앙의 여정 속에 자주 흔들리곤 합니다. 유혹의 바다에 빠지기도 하고, 시기와 질투의 바다에 빠지기도 하고, 교만의 바다에 빠지기도 하고, 두려움의 바다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빠지지 않고 주님께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도 인생과 역사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을 알아 뵙고 어떠한 시련에도 의연하게 맞서며, 아버지께서 주시는 평화를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
230813. 연중 제19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 모두 ‘믿음의 뿌리’를
튼튼히 합시다.”
-기도하라, 사랑하라, 함께하라-
“주님, 저희에게 자비와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시편85,8)
오늘 화답송 후렴의 기도가 참 간절합니다. 주님의 자비와 구원 은총이 우리 믿음의 뿌리를 튼튼하게 합니다. 순수한 ‘뿌리’란 우리말이 참 좋습니다. 뿌리가 튼튼해야 합니다. 뿌리가 죽으면 나무는 저절로 죽습니다. 뿌리없이는 잎도 꽃도 열매도 없습니다. 뿌리가 병들면 나무도 병들고 머지 않아 죽습니다.
푸르름 짙어가는 나무들과는 대조적으로 죽은 나무들은 보기도 흉합니다. 흉물같습니다. 뿌리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엊그제 병든 사회, 병든 개인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바로 뿌리가 병들었음을 뜻합니다. 나무 뿌리가 상징하는 바 믿음입니다. 믿음의 뿌리입니다. 내 믿음의 뿌리는, 내 공동체 믿음의 뿌리는 튼튼합니까? 병들거나 죽지 않고 살아서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습니까? 믿음의 뿌리가 가리키는 바 내적성장입니다.
카눈 태풍의 위력이 여기 수도원에는 미미했지만 커다란 소나무가 뿌리 뽑혀져 넘어져 있었습니다. 거대한 소나무를 받쳐 주기엔 뿌리들은 참 허약했고 이미 많이 썩어있었습니다. 새삼 내 삶의 뿌리를, 믿음의 뿌리를, 내 공동체의 뿌리가 연상되었습니다. 예전에 써놨던 ‘뿌리살이’란 글이 생각납니다.
“뿌리없이는 꽃도 없다
뿌리로 살아야지
세월 땅속에 묻혀 뿌리로 사는 거야
꽃사랑으로
피어날 때까지
기다리며 뿌리로 사는 거야
뿌리살이 고달플 때
꽃사랑 추억으로 갈증 축이며
하늘사랑 꽃으로 피어날 그날 그리며
뿌리로 사는 거야
뿌리없이는 꽃도 없다”-1999.7.2.
수도원 여기 이 자리에서의 24년전 시가 새롭게 떠오릅니다. 지금까지 공동체의 정주의 뿌리가 되어 큰 나무로 살아온 기분입니다. 지금까지 날마다의 강론은 집요한 뿌리내림의 표현이었습니다. 정주의 믿음, 정주의 뿌리입니다. 어떻게 하면 날로 깊어지는 튼튼한 정주의 뿌리로 살 수 있을까요?
첫째, 기도입니다.
기도해야 됩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간절히, 항구히, 공동기도는 물론이고 개인기도도 필수입니다. 고독과 침묵을 사랑했던 옛 수도자들이었습니다. 바로 고독과 침묵중에 하느님을 찾아 날로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렸던 사막의 수도자들이었습니다. 참으로 내적 깊이의 뿌리 내림에 개인기도는 결정적입니다. 고독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라 설파한 토마스 머튼입니다.
고독이 궁극으로 지향하는바는 연대입니다. 새삼 오늘 말씀의 순서대로 하느님의 종들인 엘리야, 바오로, 예수님의 믿음의 뿌리는 얼마나 깊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세분 공히 하느님의 사람들,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했을 때 우선 찾은 것이 하느님의 산 호렙이었고 여기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호렙에 있는 동굴에서 밤을 지낼 때 주님의 말씀이 내립니다. 밤은 주님을 만나라 있는 은총의 기도시간임을 깨닫습니다.
“나와서 주님 앞에 서라.”
크고 강한 바람이 지났지만 거기에 주님은 계시지 않았고, 지진이 일어났지만 거기에도 주님은 계시지 않았고, 불이 일어났지만 불 속에도 주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으니 바로 주님의 임재입니다. 그 소리를 듣자 엘리야는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섭니다.
고독과 침묵의 산에서, 외딴곳에서, 또는 내 삶의 자리에서 특히 밤시간, 조용하고 부드러운 주님의 소리를, 말씀을 들은 적이 있으신지요? 우리 예수님도 밤시간은 조용하고 부드러운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며 깊은 관상 상태에 있었음을 봅니다. 5천명 군중을 배불리 먹여 돌려 보내시고 제자들을 먼져 떠나 보내신후 불야불야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시어 밤샘기도에 돌입합니다. 어쩌다가 아니라 매일 외딴곳에서 밤샘 기도로 충전시킨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끝기도후 잠자리에 들기전 다음 찬미가를 바칩니다.
“우리는 잠을 자도 주님과 함께,
꿈에도 당신만을 뵙게하소서.
언제나 한결같이 당신영광을,
새는날 밝아올제 찬미하리다.”
우리 수도자들은 잠자는 중에도 영혼은 깨어 주님 안에서 관상의 휴식을 누리며 내적 친교를 깊이합니다. 믿는 이들의 삶은 자나깨나 끊임없는, 한결같은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또 공동체에 깊이 뿌리내리는 삶이어야 합니다.
둘째, 사랑입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기도와 사랑은 함께 갑니다. 기도는 기술의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기도와 더불어 하느님께 이웃에 더욱 깊이 사랑의 뿌리를 내리기 마련입니다. 보십시오, 바오로의 사랑은 얼마나 깊은지 그 사랑의 뿌리는 하느님께 닿아 있습니다.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하느님 찬미의 사랑에 깊이 뿌리내린 이웃사랑임을 봅니다. 불교의 지장보살을 연상케하는 가톨릭의 지장보살 바오로 같습니다. 바로 지옥의 고통에서 허덕이는 중생들을 극락세계로 인도해 주기 위해 스스로 부처가 되기를 포기하고 지금도 지옥 문전에 있는 지장 보살입니다. 어제 읽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전설적 기도도 생각납니다.
“주여,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제가 어찌 천국을 즐기겠습니까. 주여 저주받은 자들을 불쌍히 여겨 천국으로 들여보내든지, 아니면 저를 지옥으로 보내 고통받는 자들을 위로하게 하소서. 저는 지옥에 남아 그들과 고통을 나누겠습니다.”(영혼의 자서전, 하권 424쪽)
하느님 사랑에 까지 그 사랑의 뿌리가 도달한 성 바오로, 성 프란치스코를 닮은 불가의 지장보살입니다. 이에 비하면 우리의 사랑은 여전히 초보자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봅니다. 더욱 사랑의 훈련, 습관화로 하느님과 이웃에 더욱 깊이 뿌리내리시기 바랍니다.
셋째, 함께입니다.
함께 해야 합니다. 함께 섬겨야 합니다. 회개-친교-섬김의 순서입니다. 마음의 순결이, 자유가 최종 목표가 아니라 더불어 섬김입니다. 섬김을 위한 자유요, 섬김을 통한 자유의 완성입니다. 홀로인 듯 하나 함께 안의 홀로입니다. 더불어와 단절된 고립단절은 환상이요 바로 이것이 지옥입니다. “함께 안의 홀로” 성서의 위인들, 교회의 성인들이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곁 관상기도중에도 영안은, 사랑의 눈은 제자들을 향해 활짝 열려 있음을 봅니다. 초월과 내재의 파스카 예수님입니다.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시고 언제나 깨어 우리를 살펴보시며 위기시 우리를 구원할 채비가 되어 계십니다. 이를 안다면 전혀 걱정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세요. 그대로 인생 항해 여정중의 제자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얼마나 위험한 인생 항해 여정중인 크고 작은 무수한 공동체들인지요! 좌초하거나 조난당한 공동체들도 많습니다. 각자도생의 비정한 사회, 온전한 공동체 보기 힘든 세상입니다. 그래서 무수한 이들이 자살입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은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의 구원의 개입을 기도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풍랑에 시달리던 제자들의 공동체가 그러했습니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고 물위를 걸어 한걸음에 달려 오시는 주님은 흡사 축지법을 쓰는 듯 그대로 하느님 모습입니다. 제자들의 곤경을 한눈에 보신 주님의 개입이 고맙습니다. “유령이다!”외치는 제자들에 이어 주님의 감로수 같은 구원의 말씀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바로 위기에 처했을 때 이 말씀 상기하시고 흩어진 정신을 수습하시기 바랍니다. 물위를 걸어오다 두려움에 주님 향한 눈길을 놓치고 물속에 빠져드는 베드로의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외침에 즉각 응답하여 손을 내밀어 구원하시며 베드로의 믿음 약함을 꾸짖습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 자 몇이나 될런지요? 함께의 인생항해 여정중 참 많이 깨닫고 배웠을 제자들의 믿음입니다. 혼자라면 이런 주님의 체험도 없었을 것입니다. 공동체의 배에 오르시어 중심에 자리 잡자 바람은 그쳤고 도래한 내적평화와 안정입니다. 공동체 제자들은 그분께 엎드려 고백합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그러나 아직도 멀었습니다. “스승님”이라니 “주님”이라 부름이 맞습니다. 저 같으면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시편 23장을 노래했을 것입니다. 주님이자 스승인 주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 살아난 제자들입니다. 평생 믿음의 여정중에 늘 이 구원의 추억을 상기하여 분투의 노력을 다했을 제자 공동체 형제들입니다.
참으로 병들지 말아야 할 믿음의 뿌리들입니다. 늘 살펴봐야 할 내 믿음의 뿌리, 공동체 믿음의 뿌리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뿌리내리기 영성훈련의 기도가, 사랑이, 함께하는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하 주님의 간곡한 당부 말씀이요,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1.기도하십시오!
2.사랑하십시오!
3.함께(together) 하십시오! 끊임없이 한결같이 간절히 항구히!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시편85,11-12). 아멘.
----------------------------------------------------
230813. 연중 제19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베드로 사도는 물을 건너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처음에는 주님이 물 위에 서 계시니까 자신도 할 수 있다는 믿음, 예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한발을 내디뎠겠지요.
그런데 한발 한발 다가갈수록, 바닷속이 보입니다. 내 발밑에 시커먼 바다가 보입니다. 어부라서 수영도 꽤 할 텐데, 어쩌면 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기에 더욱 겁이 났겠지요. 그러면서 빠지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생각이 스며듭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주저하게 됩니다. 내 목숨 잃을까 봐.
앞에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안위를 걱정합니다. 믿음의 주최가 주님이 아닌 내가 되어버립니다.
오늘도 우리는 두려움에 떨며 걸어가는 하루를 보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그 밑바닥에는 강한 믿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내 가족이 나를 의지하고 있다는 믿음, 풍랑 치는 바다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서 있어야 한다는 강한 의지, 그리고 그럴 수 있도록 예수님께 함께 서 계셔 주신다는 믿음 말입니다.
하루하루 풍랑 속에서 걷는 우리이지만 믿으십시오. 예수님이 함께 이 풍랑을 이겨내고 계신다는 것을, 함께 시커먼 물 위에 서 계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예수님께 기도하고 의지하며 걸어가십시오.
그러면 세상의 어떤 풍파도 우리는 무너뜨릴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밑의 파도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기도로서, 믿음으로서 그리스도를 향해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아삭이 고추
더운 여름
입맛 없을 때
얼음물에 밥을 말고
아삭이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한입 아사삭….
이른 참 잘 지었습니다.
아삭이라는 말이 너무나 잘 어울립니다.
진짜 입속에서
아사삭 아사삭 합니다.
화려한 밥상도 좋지만
가끔은
소박, 담백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주님도 우리 마음의
소박, 담백을 좋아하실 것입니다.
----------------------------------------------------
230813. 연중 제19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100미터 달리기 선수가 있습니다. 100미터 달리기는 10초대에서 경기 자체가 끝납니다. 그렇다면 거의 10초대에 끝나는 경기라서 이를 준비하는 시간도 짧을까요? 그렇지 않지요. 그 짧은 순간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 비지땀을 흘리며 엄청난 양을 훈련해야만 합니다. 만약 훈련을 전혀 하지 않고 시합에만 집중하면 어떨까요? 당연히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시간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이 세상 삶을 마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길 간절히 원하시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문제는 그 나라에 들어갈 준비에 충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일이 바빠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남들도 다 그렇다면서 자신의 준비 없음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아무런 준비 없이 우리 목표에 도달할 수가 있을까요? 무작정 하느님 자비에만 맡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실제 경기보다 훈련에 쏟는 시간이 더 길 수밖에 없고 또 더 중요한 것처럼, 지금 주님의 뜻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가에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주님께 대해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훈련의 시간이 길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 시간이 결국은 모두 나를 위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바로 물 위를 걸으시어 제자들 쪽으로 가신 것입니다. 마침 제자들은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모습에 “유령이다” 하며 두려움의 소리를 지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맞바람이 부는 거센 파도에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알아보지 못한다고 화를 내는 주님이 아니셨습니다. 오히려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을 알아보는 것은 편하고 쉬운 삶 안에서만 이뤄져서는 안 됩니다. 거센 파도가 이는 고통과 시련에서도 주님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주님을 만나는 결과만이 아닌 계속된 훈련, 즉 믿음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고 베드로가 청합니다. 예수님의 “오너라.”라는 대답에 그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걷습니다. 그러나 물에 빠지고 맙니다. 주님만을 바라봐야 했는데, 바로 거센 바람에 두려움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으뜸 제자인 베드로도 훈련이 계속 필요했습니다. 하물며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요? 늘 깨어 기도하면서 주님께 대한 믿음의 훈련을 계속해야 합니다. 참 하느님의 아드님과 늘 함께 할 수 있습니다.
---------------------
본립도생(本立道生) 기본이 바로 서면, 나아갈 길이 보인다(논어 학이 편).
---------------------
----------------------------------------------------
230813. 연중 제19주일. 키엣 대주교님.
주님의 선택 14:55 추가로 올림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의 기적을 보여주신 후ㅜ제자들은 보내고 당신께서는 산으로 가셔서 밤새 기도하셨습니다. 왜 제자들을 따로 보내셨을까요? 군중의 마음과 신뢰를 얻어 권위를 드높이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뒤로 하고 홀로 떠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부분에 대해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에는 자세한 설명이 없지만 요한 복음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요한 6, 14-15)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십니다. 인간은 끝없이 높아지려 안간 힘을 쓰건만 주님께서는 한없이 당신을 낮추셨습니다. 같은 세상의 계단을 사람과 하느님은 서로 다른 목적으로 사용합니다. 사람들은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계단을 사용합니다. 더 높은 물질적 삶을 추구하고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고 더 좋은 평판을 얻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계단을 내려가는 데 사용하셨습니다. 높은 하늘에서 비천한 인간세상으로 내려오시어 평범한 사람, 가난한 사람, 죄지은 사람, 가장 낮은 신분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쉬운 것만을 추구합니다. 고생을 적게 할 수 있는 길, 더 편한 길, 더 빨리 성공하는 길만을 찾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언제나 좁은 길, 험한 길, 겸손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빵과 물고기의 기적’으로 들떠 있는 군중들이 당신을 왕으로 추앙하는 것을 원치않으셨기에 그들을 떠나고자 하셨습니다. 왕은 당신이 가고자 하는 겸양의 길, 고난의 길, 좁은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이고 당신의 제자들이 스승의 권위를 세우고 그 권위만을 존경하는 제자가 되는 것을 우려하시어 제자들에게 먼저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많은 유혹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겸손의 길, 봉사의 길, 고난의 길인 성령의 길을 가셨기에 마침내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충실한 자녀의 삶을 살아가려한다면 오직 주님의 길만을 따라야 합니다. 그 외 다른 길은 없습니다.
과거 가톨릭 역사에서 권력과 부유한 교회는 쉽게 부패하고 해체의 위기에 직면한 사실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박해를 받을수록 교회는 크게 성장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주님의 길인 고난의 길을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을 따라 겸손의 길, 좁고 험한 길, 십자가 고행의 길을 떠나야 합니다.
세상의 유혹에 많은 어려움도 있겠지만 그 길은 주님의 길이기에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고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이 당신을 왕으로 숭상할까 우려하여 제자들을 두고 산으로 오르셨습니다. 당신도 이런 상황을 맞는다면 주님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습니까?
2. 내가 다니는 교회가 어떤 모습이기를 바랍니까? 권위와 부유함을 지닌 교회? 아니면 가난하고 겸손한 교회입니까?
3. 당신은 주님의 길을 따라 갈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말씀의 나눔
1.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습니다. 어떤 길을 선택하는가는 내가 결정합니다. 선택의 기로에 있다면 나의 결정보다는 주님이시라면 어떤 결정을 하셨을지 잠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요.
----------------------------------------------------
230813. 연중 제19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도>
홀로
당신 곁에
머무름
기도의
시작입니다
힘겨운
벗들 곁으로
다가섬
기도의
중간입니다
당신처럼
벗들 곁에
더불어함께
기도의
마침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