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모두 안녕하세요! 며칠전에 가입한 사도세자 입니다.
여기 가입하신 모든 분은 김용택 이라는 시인과 그가 만들어 놓은 시와 산문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공통분모로 모인 분들이겠지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가치있는 일이라 생각 됩니다.
아랫 글은 제가 지난달 김용택 시인과 고향을 직접 방문하여 나름대로 정리해 놓은것입니다. 인터뷰라고 하기엔 구성도 엉망이고 주관적인 느낌이 필요이상으로 개입된 글이지만 다들 김용택의 세계를 사랑하는 분들이니 만큼 미천한 글이지만 공유하자는 취지로 올립니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점이나 알아보고 싶은 일이 있으면 메일 주시면 친절하게 답 드리지요. 이 카페의 운영자님과 다른 실세(?) 되시는 분들에게는 허락없이 글 올리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씀도 드립니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 시인을 찿아
-문학적 글밭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섬진강시인 김용택의 외로운 투쟁-
인터뷰한 곳 : 전북 임실군 운암면 마암분교 교실
인터뷰한 때 : 2001년 11월 23일 금요일 13:30 - 15:00
우리에게 기교를 모르는 꾸밈없는 글 솜씨로 6,70 년대 한국 농촌의 정취와 풍경을 탁월하
게 그려낸 시인이 있다. 그가 바로 섬진강 시인으로 불리며 현재 섬진강변 조그만 분교 선
생님으로 재직중인 시인 김용택이다.
그의 서정성 짙은 시와 산문은 기성세대들에게는 고향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
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겐 각박한 도시에서 누릴 수 없는 사라져 가는 우리 농촌의 공동체
적 모습을 일깨워 주는 하나의 교과서와도 같다.
가을의 막바지에 필자는 최근 전북 임실. 순창 지역의 현안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적성댐
건설계획 문제와 맞닥쳐 본격적인 반대운동에 나선 시인의 최근 심경과 살아온 이야기, 앞
으로의 작품활동에 관한 얘기를 들어보고자 전북 임실군 운암면 마암분교를 찿았다.
광주를 출발해서 마암분교에 도착하기전에 먼저 전주. 순창간 국도변에 위치한 시인의 고
향 진메 마을을 둘러 보기로 했다. 시인이 특유의 재담으로 정겹게 묘사해 놓은 삼대논, 벼
락바위, 마을 앞 징검다리랑 시인의 노모를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인터뷰에 들어가도 나
름대로 의미가 있을 거라는 계산 깔린 행동이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내집평 뜰을 지나자 유난히 길게 터 잡은 마을 앞으로 눈이 시리도록 맑
고 깨끗한 섬진강 물줄기가 흐르고 물 건너에는 횡으로 길게 늘어선 장산이 웅장한 자태로
마을을 호위하듯 지키고 서 있었다. 참 아름다운 곳이었다.
손타지 않은 천혜의 자연을 고스란히 간직한 마을의 모습에서 시인의 출현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시인의 생가에 들러 어머니 박덕선(74) 여사로부터 이것
저것을 물어 들었다. 노모는 아들이 요즘 너무 유명해진 탓에 여기저기서 찿아오는 손님 치
뤄 내느라 꽤 지친 표정이다. 어떤 단체 방문객들은 식사까지 요구하는 몰염치로 노모의 마
음을 어지간히 불편하게 했던 모양이다. 그런 아들을 보고 " 아야 시가 대체 뭐다냐" "니가
뭐냐" 라며 아들의 유명세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니 그 심중을 헤아릴 수 있을 것만 같
았다.
눈치껏 질문을 한 후 사랑방을 안내 받아 들어갔다. 순간 시인의 숨결이 온몸으로 빨려 들
어오는 듯한 전율에 옅은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작은 방 책꽂이엔 사방으로 빽빽하게 책들
이 꽂혀 있었다. 시인이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할 때부터 접했다는 창작과 비평 시리즈로부터
각종 문예지 과월호들, 고전과 현대 문학서들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그 곳은 시인의 혼이
깃든 작은 책의 전당이였다.
초기 시인의 습작기 때부터 그리고 문단에 등단하고 나서 활동기에 이 수많은 책들은 그에
게 어떤 의미를 갖고 세월을 함께 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어느 값비싼 서재보다
더 가치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머물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진메 마을을 빠져 나왔다. 나오는 길에 당산나무 옆
에 적성댐 결사 반대라는 글귀가 새겨진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최근 마을이 처한 어수선한
분위기를 대변이라도 하듯 현수막은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서둘러 마암분교로 발길을 옮겼다. 마을로부터 마암분교까지는 차로 20여분 거리다.
섬진강댐으로 생긴 옥정호 상류에 문명의 상징처럼 기다랗게 걸쳐있는 운암대교를 건너 호
숫가를 따라 구불구불한 포장도로로 5 분 남짓 가다보니 조그만 팻말이 눈에 띈다. 바로 마
암분교다. 몇 년전만 해도 이곳을 찿은 나그네들의 기억속에는 학교 앞 길이 비포장도로로
남아 있겠지만 지금은 산뜻한 아스팔트길이다.
여느 시골 초등학교가 다 그렇듯 단층 짜리 건물 한 채와 부속건물 두 동이 운동장을 끼고
자 형태로 터 잡고 있다. 바로 앞에 옥정호가 검푸른 물빛을 자랑하고 호수 위 산허리께
에 여러개의 모텔들이 흉물스럽게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시인이 언젠가 한 월간지 인터뷰에서 못 마땅하게 언급하던 그 모텔이려니 생각하니 공연
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선생님 계십니까? 한마디를 길게 내지르며 교실로 들어섰다.
텔레비젼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 짧게 깎은 스포츠형 머리에 까무잡잡한 얼굴, 작달막한 키
를 한 어찌보면 촌스럽기 그지없는 시인이 바로 거기 서 있었다.(시가 거기 서 있었던게 아
니라 시인이 거기 그렇게 서 있었던 것이다.)
누군고 하는 약간은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필자를 맞는 모습까지...
김용택 시인(이하 김 으로)> 누구신가요? (약간 빠르면서 고성의 어투로)
필자(이하 필로)> 아 예 안녕하세요! 일주일 전에 전화로 찿아 뵙기로 약속했던 이완재 라
고 합니다.
김> 가만 그랬던가? 일단 들어오세요.
미닫이 유리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요즘 시인은 여기저기서 걸려오
는 전화와 방문객들로 정신이 없는 눈치였다. 필자가 방문섭외 차 전화를 했던 때도 꼼꼼하
게 일주일 스케줄을 확인하고 약속을 잡았던 터였다. 자리를 잡고 간단한 인사말을 주고받
고 바로 인터뷰에 들어갔다.
필> 지금 현재 살고 계신 곳은 어디인지요?
김> 어머니가 살고 계신 진메마을에서 주로 기거하고 있어요. 일 때문에 출타할 때도 있
고, 주말엔 전주 집에 한번씩 들르며 문단속을 하고 있지요. 어머니하고는 이삼일 정도 지내
는 것 같습니다.
필> 현재 선생님의 가족은 중국으로 유학을 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유학을 보낸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또 영어권이 아닌 중국으로 보내 이유는 무엇이며 언제까지 머물 계획인
지요?
김> 중국은 넓은 대륙의 나랍니다. 그만큼 폭넓은 문화를 자랑하고 있고, 최근에 급부상
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지요. 애들을 그런 나라에 보내 마음껏 여행을 하도록 하고 싶었어
요. 내 영향으로 시인 안도현이도 현재 자녀를 중국에 유학 보낸 상태지요. 귀국은 내년 1
월 예정입니다.
(인터뷰 당시 시인의 부인과 두 자녀는 잠시 귀국한 상태였고 다음날 중국으로 돌아가는 걸
로 되 있었다.)
필> 그렇군요. 평소 존경하는 분이 있다면 누구이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 김수영 시인을 존경합니다. 그 분이 살아냈던 치열한 삶을 좋아하지요. 그 분의 시는
태작이 없고 한편 한편이 다 완성된 시로써 오늘날에도 우리를 긴장시키고 반성토록 하고
우리의 삶을 질타하는 등 시가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그래서 존경하고 있지요.
필> 각종 방송출연 신문, 잡지기고 등 왕성한 대외 활동을 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다른
작가처럼 그 흔한 개인홈페이지 하나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대외활동에 대한
제한을 둔 의도적인 이유에서 인지요?
김>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 질문에 시인은 필자에게 오히려 홈페이지라는게 뭐하
는거냐며 반문을 했다.) 도대체 홈페이지를 만들어 뭐 하는거지요? 홈페이지를 만들 필요
를 못 느낍니다. 작가는 글이면 족하지요. 글로써 독자를 대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외
활동에 제한을 두고 있는 건 없습니다.
필> 그렇다면, 앞으로도 홈페이지를 만들 생각은 없으십니까?
김> 네 그렇습니다.
필> 각종 선생님에 대한 자료 중 군 생활에 대한 소개가 없던데 군 생활은 언제 어디서 하
셨는지요?
김> 우리 때는 군대 가고자 하는 사람이 넘쳐 나는 시절이었습니다. 당시엔 신체검사를 받
으면 갑종을 받아야 군대를 갈 수 있었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지요. 그래서 일종의 지금으로
치면 소집면제 판정을 받은 셈입니다.
필> 많은 취재기자들을 상대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특별히 친분이 있는 기자가 있
는지요? 그리고 취재간에 있었던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해 주시지요?
김> 다들 공적인 취재로 만나는 사람이라 각 신문사 문화부 기자들과는 한번씩 안면이 있
는것 같고 특별히 한겨레신문의 최재봉 기자와 개인적인 일로 종종 상의를 하는 편입니
다. 나름대로 친한 분이라면 그 분이겠지요.
필> 선생님은 안도현, 신경림, 곽재구, 황지우 같은 문인들과 호형호제 하는 사이인걸로 알
려져 있습니다. 그 분들과는 처음 어떻게 만나게 되었으며 교류는 어떻게 하고 계시는지
요?
김> 시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이입니다. 다들 한번씩 이곳을 다녀갔고 황지우
와는 오래 된 사이고 서울에 가끔 가면 함께 모임을 갖고 있는 정호승 시인, 도종환 시인을
만나기도 하지요. 모임은 좋은 시를 가수들과 함께 노래로 만들어 부르는 모임으로 서울에
서 매달 한번씩 정기모임과 공연을 갖습니다.(참여가수로는 김원중, 안치환등이 있다고 함)
필> 선생님은 산문집에 삽화( 낚시하는 장면, 낚시도구)를 직접 그릴정도로 그림솜씨도 수
준급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림공부는 언제 어느 정도 하신건지?
김> 그림을 너무 좋아합니다. 유화공부를 조금 했었고 전주에서 화랑을 자주 들러 관람하
고 있습니다. 화가로는 김병종 이목상 화가를 좋아하지요.(실제로 시인의 여동생이 그림공부
를 한 걸로 알고 있다.)
필> 작품 속에 등장하는 윤환이 용조 같은 인물들과 지금도 만남이나 연락을 하고 있는지
요?
김> 나이는 한두살 차이가 나지만 같이 학교를 다녀 같은 동창이라 지금도 자주 만나고
있습니다.
필> 최근에 본 영화가 있습니까?
김> 조폭 마누라, 봄날은 간다, 달마야 놀자 등 최근 개봉영화는 거의 다 본 것 같습니다.
요즘 나오는 조폭 영화는 가볍고 내용이 없고 말장난 일색인 것 같아요.
(영화 에세이를 쓴 분답게 영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대단하다는 걸 느꼈다.)
필> 화제를 좀 무거운 쪽으로 가져가 보겠습니다. 현재 적성댐 건설계획 반대운동에 참여하
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적성댐 건설계획은 어떻게 전개될 것으로 보시는지요?
김> 그제도 서울 국회의사당 앞에서 댐 건설 반대 1 인 시위를 하고 왔습니다. 어제 신문
에 많이들 실었더군요. 정부의 방침을 계속 지켜봐야겠지요. 현재 저는 전북환경운동연합 공
동의장이란 직함을 갖고 있습니다. 긴소리 필요 없이 섬진강은 흘러야 합니다. 내가 서있는
땅을 지켜야 한다는 거지요.
(사뭇 투쟁적인 어투로 역설하는 시인의 모습에서 시인을 모질게 만든 세상에 대한 야속함
으로 씁쓸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참고로 적성댐 건설계획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antidam.inp.or.kr 에서 확인할 수 있음)
필> 개인적으로 선생님이나 선생님의 작품이 유명세를 치르면 치를수록 이 곳 섬진강 상류
지역이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동강의 경우처럼 오염될 우려도 있다고 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김> (두 팔을 내저으며) 그렇지 않아요. 섬진강 상류지역은 동강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바
닥에 울퉁불퉁 돌들이 많아 사람들이 물놀이를 하기엔 부적절하고 곳곳에 소와 바위들이 많
아 위험하기도 하지요. 오히려 섬진강가에 사는 주민들이 쓰레기를 버려 오염이 되고 있는
편이지요.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네요.
필> 대도시 학부모들로부터 자녀들의 전학문제와 관련해서 문의전화를 많이 받으신다고 들
었는데 도교육청에서 마암분교를 대안학교로 지정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마암분교가 여러 차례 방송을 통해 알려지고 난 후 대도시 학부모들로부터 이곳에 대한 문
의가 하루에도 수 차례씩 걸려온다고 함)
김> 도교육청에선 대안학교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여러 가지 법
적인 문제, 학교시설 문제 등 여러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지요. 다행인 것은 꾸준히 한 두
명씩 학생이 느는 추세라 폐교 위험은 없어졌다는 것이지요.
필> 최근 편입과 관련한 교육대의 문제, 교사들의 오지근무 기피 등 교육계에서 일고
있는 일련의 사태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는 어떤 건지요?
최근 일어나고 있는 교육대 문제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근본적으로 교육정책이 잘못되어
있다고 보고 있지요. 교원수급문제를 비롯해서 교육정년문제 등 개인적으로 정년연령 62세
는 좀 너무 한다고 봅니다. 지금이 딱 좋지요. 교육이 제대로 서 있지 않는것 같아요.
필> 갑자기 엄청난 책을 읽을 생각과 그로 인한 시인의 길로 접어들게 된 직접적인 계기나
이유가 있었습니까?
김> 21 살에 처음 문학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다 보니 독서를 하게 되었고
오랜 시간 책을 읽다 시를 쓰게 되었지요. 모든 게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필> 그 당시 월부로 구입했던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이나 격월간 문예지 등은 지금도 보관
하고 계신지요?
김> 학교, 전주 집에, 40년 된 진메 집에 책을 그대로 다 보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시인
의 고향집에 상당수의 책이 보관되어 있었고 인터뷰하는 필자 뒤 책꽂이에 여러 문학관련
잡지들이 꽂혀 있었다. 나중에 학교를 옮길 일이 생기면 책을 추려 가야 한다며 작은 고민
에 빠져 있었다.)
필> 산문에서 윤환이라는 인물이 1992년 진메 마을을 떠난 사건을 두고 선생님은 농민정
신의 단절, 역사성이 있는 이농이라는 표현으로 굉장한 의미부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일
이 갖는 진정한 의미는 어떤 것이었는지요?
김> 윤환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지게대학에 들어선, 다시 말해 어린 나이부터 농
사일에 뛰어든 전형적인 농사꾼이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일, 이론적인 것이 아니고 자연속에
서 스스로 터득하고 배운 전통적인 개념의 농군이었던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의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었지요.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이농은 역사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응하던 시
인의 얼굴이 너무도 진지했었고, 잠시 그 옛날을 회상하는 모습이었다.)
필> 초기에 신경림 시인의 시 "농무" 의 계보를 잇는 농촌시인이라는 문단의 평에 거부감
을 가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왜 그러신건지요?
김> (약간 흥분해서) 농촌을 소재로 해서 시를 썼을 뿐인데 농촌시인으로 국한시킨 것은 잘
못된 표현이라 생각했습니다. 도시를 소재로 시를 쓰면 도시시인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과
같은 논리지요. 말이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필> 선생님은 진메 마을, 섬진강을 이야기하는데 있어 시로 쓸 수 있는 것과 산문으로 쓸
수 있는 것에 대해 구분 짓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거기엔 어떤 기준이 있는 건지요?
김> 가령 고기를 잡는 행위, 산에서 나무를 하는 것과 같은 어떤 구체적인 묘사나 서술을
해 야 될 상황에 시는 부적절하지요. 그럴 때 산문이 제격인 것입니다. 그런 기준이 있는 거
지요.
필> 지금껏 선생님은 진메마을 즉 섬진강을 주 제재로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진메
마을은 인근 회문산을 끼고있어 이태의 소설 남부군의 배경이 되기도 한 역사적인 곳인데
유년시절 듣고 경험한 한국전을 소재로 소설이나 논픽션을 써 볼 생각은 없으신지요?
김> 아직 소설이나 논픽션을 쓸 수 있을 만큼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전쟁과 관련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써 볼 의향은 있습니다.
필> 그밖에도 섬진강을 탈피한 상상에 의한 새로운 창작적 모험을 시도하실 의향은 없으신
지요?
김> 앞으로 어떻게 쓸 건지에 대한 것은 말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 질문에 대해
서는 애써 대답을 회피하는 분위기라 더 이상 깊게 물을 수 없었다.)
필> 선생님 작품속에는 바작, 확독, 지죽, 싱건지, 살강, 샛거리, 고샅 같은 이 지역에서 사
용되는 독특한 방언들이 아름답게 구사되고 있습니다. 따로 모아 정리해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은 생각은 없는지요?
김>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아직 그런 생각은 미처 못하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기회를 봐서 꼭 해 봐야 겠네요.
필> 다른 나라에서는 시, 시인이 소설. 소설가보다 더 인기 있고 대우를 받는 풍토라고 합
니다. 그러나 우리 문단의 현실은 시집으로 20 만권 이상 팔린 사례가 홀로서기, 접시꽃당
신, 민들레 영토 정도로 열악한 수준인데 이러한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요?
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처럼 시집이 많이 팔리는 나라가 없습니다. 아주 특별한 상
황이지요. 우리 나라의 시인이나 시는 큰 대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 본인의 시집은 얼마
나 팔렸는지 짓궂은 질문을 하자 잘 모른다고 했다. 출판사가 알거라며. 이와 관련 최근 섬
진강 이야기 판매액 전액을 환경운동에 쓰여지도록 하기도 했다.)
필> 현재 얘기되고 있는 인문학(문.사.철)의 위기에 대한 생각과 인문학의 장래는 어떻게 보
고 있는지요?
김> 국가정책의 실숩니다. 기능적인 학문만을 권장하고 인문학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나라는
망합니다. 인문학이 튼튼해야 나라가 살수 있지요. 문학은 쉽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문학이
없어지면 시대가, 정신이 없어지고 맙니다. 문화가 없어집니다. 현재 상황은 아주 위태롭기
만 하지요.
필> 인문학의 위기라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수많은 문학관련 학과는 아직도 많고 더
러는 신설되기도 하며, 많은 작가지망생들이 등단하고자 목말라 하는 게 또한 오늘날 현
실입니다. 이들 지망생들에게 현업작가로서 한 말씀 해 주시지요?
김> 문학하는 사람은 세상을 종합할 줄 알아야 하며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독
서를 다양하게 해야합니다. 철학 역사 문화 모든 세계를 이해할 줄 알아야 하는거지요.
필> 현재 구상하고 있는 작품이나 집필중인 작품이 있다면 그리고 앞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선생님의 작품세계는 어떤 건지요?
김> 앞으로의 추구방향은 모르겠고,(앞서 질문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일종의 자신이 세
워놓은 원칙처럼 보였다.) 내년 2 월초에 창비에서 25 편의 시집이 출판 될 예정입니다. 이
번 시집의 특징은 주로 산문시 위주라는 것이지요. 그밖에도 아이들을 위한 자연 이야기, 논
이야기, 소 이야기, 잠자리 이야기를 책으로 낼려고 준비중이고, 150 매 내외의 소설 구상
을 마무리했고, 내년 5 월에는 영화에세이도 낼 예정입니다.
필> 소설은 어떤 내용인지요?
김> 살아가는 우리들 이야깁니다. (새로 나올 소설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없었고, 뭔가를
더 얘기하려는 듯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요즘 시는 너무 가볍습니다. 그래서 좀 더 무거운 시를 쓸 생각입니다.( 이 대답에서 시인
이 앞으로는 보다 현실참여적인 시,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아 보려는 메세시 강한 시를 쓰
겠다는 의지같은 것이 엿보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김용택시인에게 있어 섬진강은 50평생을 한번도 떠나 본적이 없는 삶의 터전이요. 영원한
육신의 고향이다. 그래서 그는 고향을 지키고 세상에 알려온 파수꾼 역할을 자임해왔다.
그의 작품의 9할 이상을 차지하는 소재는 당연히 섬진강이요. 섬진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고향 진메 마을이다. 초기 그의 산문은 사라져 가는 농촌의 아름다운 공동체적인 삶을 철저
한 자신의 경험에 의해 기록해 놓고 있다. 남겨놓으려는 의도에서인 것이다. 그러나 개발이
라는 검은 손길은 진메 마을도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이 되어 진메 마을을 포함 인근 섬진강
상류지역이 전부 수몰되는 적성댐 개발계획이 지난 7월 발표되고 건교부는 이를 하나하나
추진해 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시인은 50 평생을 살아온 그의 고향이자 문학적 글 밭을 하루아침에 잃게 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섬진강 시인이라고 직접 나서서 댐 건설에 반대하면 남들이 뻔뻔스럽다고 생각할까
봐 주저하던 시인은 생전 처음 서울 국회의사당 앞에서 댐 건설에 반대하는 1인 독자 시위
를 하며 적극적인 투쟁의지를 표명하고 나선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시인은 인터뷰 내내 착잡한 표정이었다.
어쩌면 적성댐 건설문제는 시인에게 일대의 큰 변화를 가져올지도 모르겠다. 지금껏 소박하
고 얌전하게만 그려온 섬진강 이야기를 조금은 과격하고 투쟁적인 것으로 그려야 할 기로에
놓인것이다. 그때도 우리 눈에 비춰질 섬진강의 모습이 맑고 깨끗한 모습, 그대로일지 걱정
이 앞서는건 이때문이리라. 인터뷰 후반 시인은 앞으론 좀 더 무겁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시
를 쓰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런 시인의 결연한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리는 까닭은 무엇일
까? 행복의 조건이 사람과 자연을 소외시키는 개발에 있는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는 대
목이다. 아무튼 작가의 시 작품세계라는 것이 시종일관 한결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스스로
와 독자를 끊임없이 자극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정한 변화와 끝없는 모험이 작가가 취할 책
임이자 의무일지도 모른다. 김용택 시인처럼 그의 문학적 글 밭이 어느 날 갑자기 인위적으
로 사라지게 될 위기에 처한 경우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경우지만 시인이 이같은 어려운
국면을 어떻게 시로 표현해 내고, 문명세계에 어떤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질 것인가를 지
켜보는 것 또한 조금은 잔인하지만 독자인 우리가 즐기고 담당해야할 부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인터뷰/정리 사도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