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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barnabak
성탄절을 맞이하는 성도의 자세
요한복음 1:6-8, 19-28
오늘은 대림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구세주로 오신 성탄절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평강과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외쳤던 천사들의 찬양이 이 땅에 임하기를 바랍니다.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이 2017년 한반도에서 다시 한 번 태어나 이 땅을 평강으로 다스려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에 회자되는 성탄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뵙기 위하여 베들레헴으로 간 네 목동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목동은 달걀, 두 번째 목동은 빵과 치즈, 세 번째 목동은 포도주를 갖고 갔습니다만 네 번째 목동은 빈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네 번째 목동을 ‘매혹 당했다’는 뜻의 앙샹떼라고 불렀습니다.
마구간을 찾은 세 목동은 ‘마리아가 아름답다’ ‘마구간이 참 아늑하다’ ‘요셉이 그곳을 잘 골랐다’ ‘별빛이 아름다운 밤이다’ 하면서 마리아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아기 탄생을 축하하고 부모에게 선물을 건네면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만 하라고 합니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난 듯, 한 사람이 말을 합니다.
“그런데 앙샹떼는 왜 안 보이지? 앙샹떼는 어디 갔지?”
이곳저곳, 안과 밖을 찾아보다 바람막이로 쳐놓은 담요를 슬쩍 젖히고 구유가 있는 곳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구유 앞에는 앙샹떼, 곧 예수에게 매혹당한 자가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내내 그는 그렇게 경배하며 “예수, 예수, 예수, 예수.” 예수만을 속삭였다고 합니다. (최효석 예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시고, 우리의 관심과 사랑은 예수님을 향해야 할 줄 믿습니다.
인간의 유일한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이 없는 크리스마스, 예수님대신에 다른 어떤 것이 주인공이 되는 크리스마스가 되어서는 안 될 줄 압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요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만 이 말씀은 올바른 성탄절을 맞이하는 성도의 자세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이 땅에 먼저 온 선지자였습니다.
세례요한의 등장은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먼저는, 400년 만에 나타난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40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다가 세례요한을 통하여 말씀이 전하여 졌을 때 사람들은 그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일반 사람들과 달리 구별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청렴한 삶을 살았습니다.
세 번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정의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시 최고의 권력자인 헤롯의 잘못에 대해서도 할 말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네 번째는, 그의 가르침에 어떤 힘과 능력과 감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요한의 말을 듣기 위해 사방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고 요한이 베푸는 세례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에 대한 관심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그가 죽은 이후에도 계속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이샤랴 빌립보에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질문을 하셨을 때 제일먼저 나온 말이 세례요한입니다.
사람들은 세례요한을 예수님과 거의 동격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헤롯이 세례요한을 죽이고 난 후 예수님의 능력의 역사가 일어났을 때 ‘이는 세례요한이 살아난 것이다’ 하고 당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러나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 이르렀을 때 어떤 제자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성령을 알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하였고 오직 요한의 세례만 알 뿐이었습니다.
요한의 세례만 알았다는 말은 이들이 요한을 섬기며 요한의 가르침을 따라 살았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전도할 때까지도 요한을 메시야로 생각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라 살았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세례요한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로 각인되어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분명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자로 불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인기가 있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있던 세례요한이 오늘 본문을 보면 자신의 위치를 넘지 않고 맡겨준 사명에만 충실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 온 하나님의 종일뿐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얼마나 낮추는지 자신은 메시아의 신발 끈을 풀 사람도 못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았고 예수님에게만 집중하도록 했습니다.
자신의 인기는 상관하지 않고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만을 증거 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얼마나 인기가 있느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얼마나 자신을 잘 알고 자신의 본분에 충실 하는가? 가 중요합니다.
저는 이것이 진정한 세례요한의 모습이고 이것이 진정 본받아야 할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례요한의 모습에서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는 성도들의 진정한 자세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을 그리스도 메시아로 고백하는 성탄절이 되어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보여준 여러 가지 모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저가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계속해서 질문을 합니다.
“네가 누구냐?”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네가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냐?”
이러한 질문에 세례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 말은 아주 당연한 말같이 여겨집니다만 당시 그의 인기로 볼 때 결코 하기 쉬운 말은 아니었습니다.
얼마든지 부인하지 않고 적당히 수용하면서 자신의 인기를 누릴 수 있는 매혹적인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분명하게 말하면서 자신을 향한 관심을 일축합니다.
그리고 메시아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번 성탄절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분은 그 어느 누구도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임을 확인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이름은 멜스(Mels)라고 합니다.
그 이름은 구소련에서 유명했던 네 사람의 이름의 첫 글자, 즉 막스의 M, 엥겔스의 E, 레닌의 L, 스탈린의 S를 딴 이름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이름을 자랑하며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구소련은 바로 그 유명했던 사람들 때문에 망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유명한 사람들은 우리를 망하게 하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이신 줄 믿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할 메시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분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귀신의 굴레에서 벗겨줄 메시아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는 줄 믿습니다.
우리를 육신의 질병에서 구원하시고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구원하실 분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는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밖에는 우리에게 구원자가 없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소망을 주실 분도 예수 그리스도 그분밖에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믿고 의지하며 오시기를 기다려야 할 분도 오직 예수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세상은 자신이 구원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문선명 이만희 장길자 같은 이단 교주가 그런 말을 합니다.
인간이 쌓아놓은 바벨탑 문명이, 풍요한 물질문명이 그런 말을 속삭이며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런 유혹에 넘어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대신에 세상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의 어떤 사람이, 세상의 어떤 이단 교주가, 세상의 어떤 나라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도로 발달된 첨단 과학, 기술문명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문명은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우리를 더욱 두려움과 공포에 빠지게 만듭니다.
오직 예수, 오직 그리스도 그 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가 되시는 줄 믿습니다.
이번 성탄절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가 되시는 것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어떤 것을 바라보다가 주님을 멀리하지 마시고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주님에게 시선을 고정하는 성탄절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메시아 되신 예수님을 증거 하는 성탄절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은 세례요한은 자신의 역할을 확실하게 말합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
세례요한은 자신을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러 온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8절)
세례요한은 자신이 메시아 그리스도가 아님을 분명히 한 후 메시아는 바로 이 사람이라고 증언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탄절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진정한 유일한 구원자라고 믿는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증언하여 구원받게 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그 역할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소개하면서 자신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도록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인기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부흥하고 잘 되고 자기의 세력이 많아지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가 인기가 없어지고 유명세가 사라지고 자기의 세력이 약해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사람들이 그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하는 일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세례요한의 훌륭한 점이고 세례요한에게 맡겨준 귀중한 사명이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성탄절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기쁨의 소식이 전해진 날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의 남편 된 요셉에게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말씀하였습니다.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이 전해진 날에 우리도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나만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날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 번째로, 이번 성탄절에 우리는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고 그렇다고 선지자도 아니라는 요한의 설명을 들은 사람들이 또 다시 질문을 제기합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네가 세례를 베푸느냐?”
여기에 대해 세례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베푸는 존재밖에 못된다.’
‘나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 하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신발을 잘 신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벗은 신발을 가지런히 하는 일은 종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자신은 메시아에 비하면 신발 끈을 푸는 종에 불과하다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사실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으로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신적인 존재이십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 인간은 그 누구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종과 같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당시 세례요한의 입장에서는 이렇게까지 낮추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고 인정을 받는 입장이었습니다.
얼마든지 자신을 높일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세례요한은 자신을 높이는 대신 정말 낮추고 또 낮추고 또 낮추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이러한 모습이 바로 성탄절에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시면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얼마나 낮아지신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 인간이 짐승의 몸을 입을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실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몸을 입으실 뿐 아니라 인간 중에서도 가장 연약한 모습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마리아와 요셉의 가난한 집안을 택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낮고 천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고 말구유에 자신의 연약한 몸을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항상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자신을 낮추시고 낮추시다가 결국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모습까지 낮추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말구유, 어린 나귀, 십자가로 대표되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낮아지시고 겸손하신 삶을 한 눈으로 보여주는 성탄절기에 주님을 따라가고 닮아간다고 하는 우리가 어떻게 교만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부인하는 삶으로 예수님을 따라가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럴 때 우리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예수님의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시선이 오직 성탄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에게만 집중되는 금번 성탄절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