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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세상 징조를 보면서 말세라고 합니다.
인간의 마음과 도덕성을 살피면서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인다고들 합니다.
게임과 핸드폰에 중독된 아이들을 보면서
도대체 이들이 자라나면 어떤 세상이 될까 걱정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인간을 뛰어넘은 AI의 등장은 또 한번 인간을 놀라게 합니다.
누구도 예측불가한 지구의 건강상태는 또 어떤 충격적인 재난을 불러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미래를 바라보는 미래과학에는 답이 없지만,
세상역사의 시작과 마지막을 기록한 성경에는 답이 있습니다.
인생과 역사는 우연이다 생각하는 진화론에는 답이 없지만,
온 우주를 주관하시는 절대자가 계시다라고 믿는 기독교신앙에는
분명한 답이 있습니다.
연령별 '없다' 시리즈 유머가 있습니다.
10대: 철이 없다
20대: 답이 없다
30대: 집이 없다
40대: 돈이 없다
50대: 일이 없다
60대: 낙이 없다
70대: 이(치아)가 없다
80대: 처(배우자)가 없다
90대: 시간이 없다
100대: '다 필요' 없다
그러나 예수를 가진 인생은 없는 인생에서 있는 인생으로 바뀌어 집니다.
10대 성경을 통해 지혜를 얻고, 넘쳐나는 젊음의 에너지가 있다
20대 장래를 향한 꿈이 있고, 도전이 있다
30대 길이 있다
40대 경험이 있다
50대 안목이 있다
60대 인생 제2막이 있다
70대 지혜와 사랑, 너그러움이 있다
80대 안정이 있다
90대 인생을 향한 통찰과 여유가 있다
100대 아름다운 마무리와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다
오늘날 힘든 시기를 보내면서 자신도 모르게 종말 종말 하지만, 성경은 종말을 말하는 책이 아니라 재림을 말하는 책입니다.
종말과 재림은 다릅니다.
종말은 미래가 없지만 재림은 약속이 있습니다.
종말은 끝을 바라보지만 재림은 시작을 바라봅니다.
종말은 멸망이지면, 재림은 소망입니다.
종말은 모든 것이 파괴되지만, 재림은 모든 것이 회복됩니다.
종말은 모두가 피하고 싶은 것이지만, 재림은 모두가 열망해도 좋을 희망입니다.
종말을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은 그 동기가 기본적으로 공포이지만, 재림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소망입니다.
종말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그 목적이 재난에서 살아남기이지만, 재림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종말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종말론자라고 부르고, 재림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재림 성도라고 부릅니다. 재림 성도들은 종말론자들이 아닙니다. 재림의 아름다운 소망을 현대판 종말론자인 프레퍼족의 수준으로 격하시켜서는 안 됩니다.
혹시 프레퍼(Prepper)족이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이 프레퍼족은 'Prepare'라는 동사에 사람을 나타내는 접미사 '-er'를 붙여서 만든 신조어입니다. 프레퍼족(Prepper)은 전쟁, 자연재해, 경제 붕괴, 전염병 등 다가올 수 있는 최악의 재난 상황에 대비해 스스로 생존 물자를 비축하고 대피 훈련을 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얼마 전 가장 권위 있는 과학 잡지인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프레퍼족에 대한 집중적인 소개를 했습니다. 프레퍼족 사람들 중에 가장 유명한 미국 남자 배우, 가장 인기가 있다고 하는 톰 크루즈가 바로 이 프레퍼족입니다. 이 프레퍼족 중 한 사람인 톰 크루즈의 미국 LA 대저택 지하에 가보면 보시는 것처럼 벙커가 있고, 침실 두 개, 운동장, 세탁실 등 일상생활이 가능한 모든 시설을 갖추어 놓고 있다고 소개합니다. 톰 크루즈가 왜 이런 저택을 준비하고 있을까요? 지구 종말을 대비한 시설입니다.
프레퍼족은 나만 살겠다고 깊은 산속으로, 깊은 땅밑으로 굴을 파고 들어가 혼자 살기을 모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재림성도는 함께 살 구원의 길을 외치는 자입니다.
수많은 징조들의 이야기를 마치 "늑대가 나타났다"라는 어떤 소년의 이야기처럼, 그저 재난에서 살아남기 위한 공포심 조장의 차원으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주님의 성품을 어제보다는 오늘 조금이라도 더 닮아 가려고 하는 것, 그것이 재림 성도들의 근본 내용이고 동기가 되어야 하지요.
단지 재난을 피하기 위해 출애굽 공동체에 참여한 이들을 성경은 '잡족', 즉 ‘어중이떠중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런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지요. 주님을 만나기 위해 예수 바라기로, 예수님을 마음에 중심에 모시고 닮아가는 작은 예수들로 살아 가는 사람들입니다.
신약성경에 재림이 가까우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구원이 가까우니 빛의 갑옷을 입으라"라는 말씀으로 로마서 13장 11절~14절의 본문을 살펴보았고, 오늘은 "주께서 가까우시니 관용을 알게 하라"라는 제목으로 빌립보서 4장4-5절의 말씀을 가지고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 4:4-5)
주께서 가까우시면 두 가지를 해라. 첫째, 기뻐해라. 둘째, 관용해라. 이 두 가지를 준비하라는 거예요.
첫째, 기뻐하라.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빌립보서는 기뻐하라는 책입니다. 기쁨이란 '카라'라고 하는 헬라어 명사가 1장 4절, 25절, 2장 4절, 29절, 4장 1절 등에 나타나고, '기뻐하라'라고 하는 동사가 1장 18절, 2장 17절, 18절, 28절, 3장 1절, 4장 4절, 10절 등 빌립보서에 기쁨 이야기가 많습니다. 아시는 대로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쓴 편지, 즉 옥중서신입니다. 누군가 감옥에 갇히면 감옥 밖에 있는 사람이 감옥 안에 있는 사람을 위로하는 게 기본적인 세상 이치입니다. 그런데 지금 감옥 안에 있는 사람이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기뻐하라"라고 하니, 이 삶의 차원이 완전히 다른 것이지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여러분, 우리가 요한계시록 21장 1절~4절을 잘 알지요. 새 하늘과 새 땅을 묘사하면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데,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 같고 그 세계가 다가오면 눈물이 다 씻겨지고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없다, 행복하고 즐거운 곳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우리가 그렇게 바라보지요.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내용의 원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사야 61장을 살펴보면, 이사야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 61:10)
이사야 65장에서도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원전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서는 "눈물을 씻겨 준다"라고 표현했는데, 이사야 65장에서는 뭐라고 묘사합니까?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사 65:17-18)
슬픔과 고난과 눈물은 끝이 있으나 주님은 우리에게 끝은 기쁨과 즐거움을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천국입니다.
신앙은 진지하지만 즐겁고 기쁘게 해야 하며, 이를 준비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여기서 '너희를 향하신'이라는 전치사(에이스)는 현대인의 성경 번역처럼 '너희를 위한'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이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며, 그렇게 할 때 우리에게 행복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기도하면 항상 기뻐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하면 쉬지 않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기쁨을 빼앗는 가장 빈번한 요인은 깨어진 '인간관계'입니다. 반대로 깨어진 인간관계 속에서 기쁨을 지켜주는 핵심 요인은 바로 '관용'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관용('에피에이케스')이란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 관대함, 아량, 자비, 자기 권리나 이익을 위해 까다롭게 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빌립보서 4장 5절에서 주께서 가까우실 때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가장 가까운 신앙 덕목으로 '관용'을 제시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관용은 첫째, 우리 주님의 속성입니다. 시편 86편 5절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에서 '사죄하기를'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번역본(70인역)에서 빌립보서 4장 5절의 '관용'과 같은 단어로 쓰였습니다. 즉 관용이란 기꺼이 용서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를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셨다고 고백하고(롬 9:22~23, 딤전 1:16), 베드로 역시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우리의 구원이 된다고 말합니다(벧후 3:9, 15). 속속들이 아시는 주님이 나를 아시는 대로 취급하셨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절에는 관용과 온유가 함께 언급됩니다. <시대의 소망> 204쪽에는 "예수는 하나님이 복수하는 재판장이 아니요 온유하신 아버지라고 말씀하시며 자기 안에 반사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셨다"라고 기록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복수하는 재판장으로 느끼게 만드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따뜻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품성이 곧 관용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어떤 조항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재림교회의 브랜드 이미지가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고, 예수님처럼 따뜻하게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둘째, 관용은 교회 지도자의 기본 덕목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 3절과 디도서 3장 2절은 지도자가 다투지 아니하고 관용하며 온유함을 나타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18절에는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순종하라"라고 하며 관용의 반대를 '까다로움'으로 표현합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와 교인들은 까다롭지 않아야 합니다.
관용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가장 긍정적이고 좋은 편으로 해석해 주는 마음가짐입니다. 엘렌 화잇은 <사도행적> 319쪽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동기와 행위에 가장 좋은 해석을 가한다... 쓸데없이 그들의 잘못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들의 좋은 품성을 기억하고자 노력한다"라고 썼습니다. 재림을 준비하며 다른 사람에 대해 비판하거나 뒷담화하지 않고 가장 좋은 해석을 가해주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인간이 생존을 위해 나쁜 소식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넘어 관용을 실천해야 합니다.
관용하려면 내 가슴이 넓어져야 합니다. 내 마음이 넉넉해야 타인을 품을 수 있습니다. 구약의 요셉과 다니엘은 넓은 마음을 가졌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요셉은 자신을 판 형들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라며 하나님의 섭리로 승화시켰습니다. 다니엘은 자신을 모함하는 법이 제정되었음을 알고도 집에 돌아가 창문을 열고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단 6:10). 그들은 환경을 넘어 하나님의 크신 섭리를 바라보는 넓은 영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재림을 준비하기 위해 기쁨과 즐거움의 신앙을 하고, 서로를 믿어주고 품어주는 관용의 신앙을 하십시다. 확실한 소망이 있기에 기뻐하고, 임박한 재림을 바라보기에 오히려 더욱 따뜻하고 관용한 공동체, 그것이 바로 우리 재림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