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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의불위 무용야(見義不爲 無勇也)
의(義)를 보고 행(行)하지 아니하는 것은 용기(勇氣)가 없는 것이다.
見 : 볼견
義 : 옳을 의
不 : 아니 불
爲 : 할 위
無 : 없을 무
勇 : 용기 용
也 : 어조사 야
논어(論語)는 BC 450년경에 만들어진 책으로, 공자(孔子)의 언행록(言行錄)이다. 공자를 중심으로 그의 제자들과 제후와의 문답 등을 기록했다.
논어(論語)는 어록(語錄)이라는 뜻이다. 공자와 그 제자들의 말과 행동이 약 500개에 이르는 문장으로 묘사되어 있다. 학이편(學而篇)에서 요왈편(堯曰篇)까지 20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서 위정편(爲政篇)은 전 24장으로 되어 있다.
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 而重星共之.
자왈; 위정이덕, 비여북신, 거기소, 이중성공지.
공자가 말하기를 “정치를 도덕적으로 한다면, 비유컨대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고, 여러 별들이 이를 중심으로 도는 것과 같다”고 했다.
위정편은 이렇게 시작된다. 여기 나오는 위정(爲政)이란 말에서 위정편(爲政篇)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논어(論語) 24편의 제목은 모두 이런 식으로 붙여진 것이다. 이것은 논어가 서로 관련성이 없는 짧은 글들을 모아서 만들어진 것임을 말해 준다.
위정편에는 공자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유명한 장이 있다.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자왈; 오십유오이지우학, 삼십이립, 사십이불혹, 오십이지천명.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육십이이순, 칠십이종심소욕, 불유구.
공자가 말하기를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뜻을 확고히 세웠으며, 마흔에는 어떤 유혹에도 흔들림이 없게 되었고, 쉰에는 천명을 알게 되었다. 예순에는 사물의 이치를 절로 알게 되었고, 일흔에는 마음이 가는 대로 해도 순리에 어긋남이 없게 되었다”고 했다.
공자는 모든 계급이 조화를 이루는 이상적인 상태를 현실 정치에 실현하려 애썼다. 그리고 50대 중반에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노(魯)나라를 떠나 천하를 편력했다. 그러나 그를 등용해 주는 나라는 없었다. 공자의 이상은 비현실적이라 하여 비웃음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제자 중에도 그런 생각을 가진 자가 있었다. 공자 자신도 내심 초조감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공자는 세속적인 의미에서 실패한 정치 사상가였고, 공자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공자는 70세가 다 되어 고국 노(魯)나라로 돌아와 후진 양성과 고전 정리에 힘을 기울였다. 그런 자기의 일생을 되돌아 보고, 그 내면의 역사를 말한 것이 바로 이 구절이다. 우리가 40세를 불혹(不惑)이라 하고, 60세를 이순(耳順)이라 하는 것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다음은 현대에도 널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구절들이다.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자왈;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것을 알고 새로운 것을 익혀 나가면 스승이 될 수 있다.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자왈;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그리고 위정편(爲政篇) 마지막 24장에 나오는 구절로 오늘의 본문이다.
子曰; 非其鬼而祭之, 諂也, 見義不爲, 無勇也.
자왈; 비기귀이제지, 첨야, 견의불위, 무용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기가 모실 귀신이 아닌데 모시는 것은 아첨이요, 의를 보고도 나서지 않으면 용기가 없다 할 것이다.
鬼(귀)는 고대에는 죽은 사람을 모두 鬼(귀)라고 불렀다. 일반적으로 이미 돌아가신 조상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때로는 총괄해서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祭(제)는 길한 제사로, 흉한 제사를 가리키는 말인 奠(전)과는 다르다. 사람이 죽으면 처음에 음식을 차려 놓고서 그 영혼을 위로하는데 이것을 奠(전)이라고 한다.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목적은 대부분 복을 빌기 위함이다.
인간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래 전부터 신이든지 천지자연이든지 초월적인 존재를 상정해놓고 경배하는 의식을 행해왔다. 그것이 예배라고 불리는 종교적 의식이든 제사라고 불리는 문화적 의식이든 경배의식은 인간사회의 규범과 질서를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동북아에서는 제사의식이 발달했는데 제사는 신분을 구별 짓는 방법이기도 했다. 천지에 대한 제사인 봉선(封禪)의식은 천자만이 행할 수 있다. 제후는 산천 이하에 제사 지내고, 경대부는 오사(五祀) 이하를 지냈다. 일반 백성은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한편 상위 직위자는 하위 직위자의 제사를 모두 지내지만 하위 직위자는 위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 천자를 비롯해 말단 백성까지 모두 제사를 지내는데 이 제사는 동북아 문화권의 질서와 규범을 상징하는 예법의 하나이다.
그런데 주(周)나라 이후 사회 전체적으로 기강이 무너지면서 제사 예법도 무너졌다. 권력을 잡은 경대부 세력이 자기 직분을 넘어 산천에 제사 지내거나, 심지어 삼환씨는 천자만이 가능한 천지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공자(孔子)는 이를 사회질서와 예법을 무너뜨리는 행위로서 정치가 혼란해지는 원인이라고 보았다. 이에 공자가 예법이 무너지고 의(義)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보고는 이는 위정자가 용기가 없어서 그런 것이라며 비난했다.
견의불위 무용야(見義不爲 無勇也)는 의(義)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눈 앞에서 보고도 이를 실행하지 않음은 용기가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제사는 자기 조상에게만 지내는 것이다. 남의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조상은 후손의 윤기(倫氣; 인륜으로 맺어진 기운)를 타고 내려오기 때문에 다른 후손이 제사를 지내게 되면 윤기가 달라서 조상이 내려오지 못한다.
이는 자기 조상의 제사는 자기가 지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아무런 소용도 없는 남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결국 남이 보라는 듯 하는 아첨과 같다는 뜻이다.
안중근 의사(義士)는 옥중에서 많은 유묵을 남겼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유묵은 見利思義 見危授命(견리사의 견위수명)이 있다. 이로움을 보았을 때에는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봤을 때에는 목숨을 바치라는 뜻이다.
논어(論語)의 헌문(憲問)편에 공자(孔子)의 제자인 자로(子路)가 성인(成人; 완성된 사람)에 대해 묻자 공자의 답 중에 나온다.
今之成人者何必然, 見利思義, 見危授命, 久要不忘平生之言, 亦可以爲成人矣.
금지성인자하필연, 견리사의, 견위수명, 구요불망평생지연, 역가이위성인의.
이(利)를 보면 의(義)를 생각하며, 위태로움이 보이면 목숨을 바치며, 평생 오랫동안 약속한 말을 잊지 않는다면 이것 또한 성인(成人)이라 할 수 있다.
안중근 의사는 유학을 공부한 유학자였다. 그래서 실천철학인 유학을 익힌 유학자로서 성인(聖人)이 아니라 성인(成人; 완전한 사람)이 되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안 의사는 실제 행동으로 의(義)로운 행동을 용감하게 실천하신 것이다.
옳은 일을 남 앞에 나서서 행동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은 별로 옳지도 못한 일에 용기를 과용하는 경우가 많다. 참다운 용기란 위기 상황에서 발휘되어야 한다. 사소한 일에는 용기까지 휘두를 필요가 어디 있으랴!
우리들은 남의 이야기 하기를 참으로 좋아한다. 더구나 남의 잘못된 것을 찾아내어 흉스럽게 이야기 함을 재미로 알고 있으며 그런 이야기를 찾는데 흥미를 느끼고 있음도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의 잘못이 왜 나에겐 그리 재미있으며 그 이야기들이 널리 퍼저 나가기를 바라는 것은 참으로 황당한 일이기도 하다.
서로 만나면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불행이 왜 그리 톱뉴스꺼리며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통쾌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정말로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남의 불행이나 잘못을 이야기 하여 그의 불행이나 잘못을 막아주려는 것이라면 그 얼마나 다행한 일이고 참다운 것일까?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좋은 것 칭찬 받을 만한 일을 찾아내기를 좋지 못한 일 찾아내 듯 하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야기의 재미가 먼저보다 클 것인가? 아마도 전자의 재미보다 배가의 재미로 느껴옴을 직감할 것이다.
현 사회가 너무 험악하여 부정과 악행이 난무하고 어느 곳에서나 쉽게 목격 되고 있으며 남녀노소 불문하고 자행되고 있음도 사실이다. 이러함이 우리 주변에 흔히 있음에도 이를 보고 어느 누구하나 알아듣게 말하여 주는 이 없으니 참으로 걱정스럽다.
행여 어느 누가 잘못된 행동을 보고 지적하여 준다면 그 이야기를 쉽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반성하고 그 행동을 수정할 것인가? 반성과 수정보다는 신체적 압력을 통하여 가해나 욕설로 오히려 되 밖음으로 돌아옴이 확실하다.
어찌 그런 모습을 보고 피해가 있을 것을 뻔히 알면서 용기 있게 나설 것인가? 못 본채 딴청을 피우며 남의 일에 나설 일이 무엇인가 하고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참으로 침통하며 서글픈 일이다.
옳은 것을 보고 즉시 행동에 임하며 잘못됨을 보고 즉시 교정토록 조언하여 줌으로 우리의 사회를 옳고 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함이 우리의 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은 의로움을 보고 즉시 행동하는 사람이어야 하며 잘못된 사실을 보고도 피하고 주저하는 삶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니라.
아첨하고 아부하는 사람을 보면서 비난할 때가 많았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러한 캐릭터가 나오면 비난할 때가 많았다. 문제는 영화나 드라마가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투영한다는 것이다.
타인이 아부하는 것을 비난하지만,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아부하고 있는 나를 깨닫는 순간이 있다. 아부는 아주 쉽고 빠르게 몸에 베어 들어온 습관 같다고 여겨졌다. 머리와 행동이 다른 나를 반성하며 24장을 선택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커다란 자랑거리 중 하나는 아마 청백리(淸白吏)일 것이다. 청렴하고 결백한 관리를 청백리라고 하는데, 옛날 청백리는 국민의 사표요, 사회의 귀감으로서 온 백성의 칭찬과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이 시대에는 과연 청백리가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바람직한 청백리상의 덕목을 살펴보면 첫째, 청렴(淸廉)의 정신을 꼽을 수 있다. 청렴은 성품이 고결하고 탐욕이 없는 맑고 행동이 깨끗한 것이다. 그래야만 국민의 두터운 신임을 얻을 수 있고, 깊은 존경을 받을 수 있다. 공무원은 공평해야 한다.
이해관계에 얽매이고 사리사욕의 노예가 될 때, 인간은 절대로 공정한 판단과 올바른 처사를 할 수 없다. 공평해야만 사리에 밝고, 청렴해야만 위엄이 생긴다. 위대한 민주정치가였던 해공은 젊은 관리들에게 언제나 염생위(廉生威)라는 글을 써주며 격려했다고 한다. 염생위는 바로 공무원이 일생동안 지켜야 할 생활의 계명이다.
우리는 깨끗한 나라를 만들고, 깨끗한 정치를 하고, 깨끗한 기풍을 조성해야 한다. 청백리는 먼저 인격을 갈고 닦는 수기(修己)에 힘써야 한다. 수기하는 사람만이 남을 다스리는 치인(治人)이 될 수 있다. 먼저 나를 갈고 닦아 바른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청백리의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덕목으로는 성실(誠實)을 꼽을 수 있다. 청백리는 공무를 신성하고 성실하게 수행하여야만 한다. 공무원을 우리는 공복(公僕)이라 한다, 즉, 나라의 심부름꾼이라는 뜻이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요, 공무원은 주인의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다. 공무원이라는 말에는 이렇듯 겸허한 마음과 봉사정신이 배어 있다.
청백리는 국민의 겸허한 봉사자요, 나라의 정성스러운 일꾼이 되어야 한다. 자기직분에 대하여 애정과 긍지와 충성심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공복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국민의 두터운 신뢰와 돈독한 존경을 받을 수 있다. 열의와 성의와 창의를 가지고 나랏일에 헌신할 때, 국민들은 공무원을 믿고 따르고 우러러본다.
세 번째 덕목은 용기(勇氣)의 덕(德)을 가지는 것이다. 청백리는 진취적 정신과 적극적 태도를 가지고 용감하게 일하고 개척하고 건설해야 한다. 눈에 정기가 빛나고 얼굴에 생기가 약동하고, 몸에는 활기가 넘쳐야 한다.
깨끗한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열심히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내대장부의 씩씩한 기상을 가져야 한다. 정(正)은 바로 우리가 설 자리요, 의(義)는 우리가 가야할 길이다. 큰일을 하려면 큰 힘이 있어야 한다.
큰 힘을 가지려면 부단히 배우고 공부하고 연마해야 한다. 평생교육으로 쉬지 않고 노력을 쌓아 지성과 인성과 덕성을 겸비하는 사람만이 바람직한 청백리가 될 수 있다. 투철한 국가관, 사명감, 책임감으로 무장해야 한다.
논어(論語)에 나오는 견의불위 무용야(見義不爲 無勇也)하라는 말이다. 의를 보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씩씩하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가지고 인생의 정도와 역사의 대도를 당당하게 걸어가면서 자기의 천직에 몸을 바치는 사람이 현대적 청백리다.
나라에 큰 사건이 터질 때 마다 정치계 관계 등이 거의 약방의 감초처럼 끼어있어 아쉽다. 대통령의 수갑차는 모습은 더 이상 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500여년의 조선을 지탱하게 한 것도 관리들이요 망치게 한 장본인도 바로 공직자의 기강해이와 부패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 않겠는가? 우리에게 과연 깨끗한 청백리가 있는가?
참다운 용기(勇氣)
어떤 이는 용기(勇氣)를 도덕적 용기, 영적 용기, 종교적 용기, 행동하는 용기로 분류했다. 노자(老子)는 자고능용(慈故能勇), 온화한 사랑에서 용기가 나온다 했다.
공자(孔子)도 견의불위무용야(見義不爲無勇也), 의를 보고 행하지 못함은 용기가 아니라 하여 행동하는 용기를 강조했다. 소크라테스는 미덕(美德) 즉, 언행일치(言行一致)를 용기라 했다.
살다 보면, 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먹어야 할까 먹지 말아야 할까? 망설여질 때가 있다. 일상적인 일을 결정할 때는 별 의식이나 용기 없이 습관에 따라 결정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큰 용기, 참다운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 하고 싶지만 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고, 하기 싫지만 해야 할 때가 있다. 문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용기 있는 행동일까 이다. 출발은 가장 쉽고도 쉽지 않은 '예, 아니요'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어린이 동화 이야기다.
개구리, 쥐, 달팽이, 참새가 연못가에서 용기시합을 하고 있었다. 누가 더 용기 있는지를 겨루는 것이었다. 생쥐가 나서서는 '난 물 속에서 한번도 나오지 않고 연못을 건너갔다 올 수 있어!' 그러자 개구리는 '그건 용기 있는 일이 아니고 재미있는 일이야.'
생쥐는 '우리에겐 이 일이 용기 있는 행동이거든!'하며 기분 나빠했다. 그래서 친구들은 '그럼 보여줘' 했다. 생쥐는 신이 나서 그 일을 해냈다.
이어 개구리는 달팽이가 매일 먹는 연잎을 한번에 먹으며 용기를 자랑했고, 달팽이는 참새가 태어난 둥지를 한 바퀴 돌면서 자기의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참새를 바라보며 용기 있는 어떤 행동을 보여줄까를 기대했다. 한 참 고민하던 참새는 '난 안 할래!'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어안이 벙벙해졌던 친구들이 잠시 후, 참새의 행동이 참 용기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생쥐, 개구리, 달팽이가 용기라고 했던 것들은 다른 동물이 볼 때에 참 무모한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함정에 빠져있는지 알 수 없다. '예'해야 할 때 '예'하고, '아니요'해야 할 때 '아니요'하는 것이 참새가 가진 것과 같은 용기가 아닐까!
또 다른 용기는 진실과 정의를 위해 나서는 행동이다. 타임 투 킬이란 영화의 내용이다. 미 남부 미시시피주의 작은 도시에서 대낮에 술과 마약에 찌든 백인 건달 두 명이 한 흑인 소녀를 무참하게 성폭행한 후, 잔인하게 장난을 치고 다리 밑에 버린다.
만신창이가 된 소녀의 아버지 칼은 범인들이 잡혀 재판 받는 곳에 청소부로 들어가 재판을 받으려고 출두한 범인들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하여 범인을 죽였다. 딸을 위한 복수로 살인죄를 범한 칼은 현장에서 잡혔다.
그리고 흑인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당시 상황에서 칼은 사형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흑인이란 편견과 불공정한 재판을 이겨내기 위해 인권단체가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백인 우월주의 속에서 선임된 변호사도 칼에게 우호적이지 못했다.
이를 알아차린 칼은 선임변호사를 거부하고 제이크에게 변호를 부탁했다. 새롭게 변호를 맡은 제이크는 칼을 위해 진실과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로 인해 정의를 위해 싸우는 변호사로 명성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곧 협박과 위협이 들어왔다. 그의 비서는 백인들에게 폭행을 당한다. 위협과 위기로 제이크는 아내와 딸을 외가로 보내고 홀로 싸운다. 하지만 아내마저 제이크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명예 때문인 것으로 오해하여 가정까지 위기를 맞는다.
그런 와중에 재치 있고 똑똑한 법학도 앨렌이 제이크를 돕게 된다. 하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버클리 검사, 백인인 재판장, 배심원들마저 대부분 백인이었다. 백인들의 위협의 농도는 점점 높아졌다. 심지어 KKK단의 테러로 앨렌까지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제이크는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진실과 정의를 위해 자기 딸을 생각하며 끝까지 싸웠다. 그리고 마지막 변론에서 배심원들의 마음을 돌려 무죄판결을 받아냈다. 편견이 판을 치는 사회에서 그 용기가 인정되었다. 이는 정의란 대의를 위해 자신의 것을 포기한 예일 것이다.
그 보다 귀한 것은 양심에 입각한 결단과 행동을 용기라 한다. 양심에 따른 용기라면 귀한 것일 것이다. 하지만 그 용기가 '예, 아니오' 정의 혹은 양심에서 온 것이든 정도와 입장과 관점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양심에도 타락한 양심, 더러워진 양심, 선한 양심, 깨끗한 양심이 있듯이 말이다.
미식축구 미네소타 바이킹스팀 소속 짐 마샬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수비수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린시절 어머니의 죽음과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자랐다. 성장한 후 미식축구 선수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중요한 경기중에 곤혹스런 실수를 저지른다. 상대방 선수와 충돌한 후 방향감각을 잃고 뛰어 자책골을 넣었다. 전반전이 끝난 후 짐은 라커룸에서 실의에 빠져 있었다. 동료들이 괜찮다 위로를 했지만 힘이 나지 않았다.
그 순간 ‘사람은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실수를 했으면 바로 잡을 줄 알아야 한다.’라는 아버지 말이 번개처럼 스쳤다. 사력을 다해 그는 결국 최고의 경기를 펼쳤다. 하지만 자책골에 대한 기자들의 조롱 섞인 질문은 끊이질 않았고 자살골 장면은 TV를 통해 방영되며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매 경기마다 더욱 최선을 다했다. 누구를 만나든 자신감 있는 태도로 일관했다. 세월이 좀 지나자 짐에게 감사의 편지와 메시지들이 쇄도했다. 내용은 부끄러운 실수들을 저지르고 좌절했던 사람이었는데 짐의 당당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힘을 얻을 수 있었다는 감사의 마음들이 담김 것들이었다.
그의 당당한 극복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 그가 자살골을 넣은 순간 자신을 포기해 버렸다면 미식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선수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용기는 다른 누군가의 희망이요, 용기가 된다.
살다보면 여러 종류의 용기를 본다. 사리를 분별하지 못해 함부로 날뛰는 용기를 만용(蠻勇)이라 한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인 줄을 알면서도 실행하지 않는 것은 참된 용기가 아니라는 견의불위무용야(見義不爲 無勇也), 소인의 혈기에서 나오는 경솔한 용기는 필부지용(匹夫之勇), 여러 사람을 능히 당해낼 만한 용기는 겸인지용(兼人之勇), 오랜 체험으로 얻은 용기나 결단력을 일컫는 혹은 어부는 물 속에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어부지용(漁父之勇)이 있다.
진정한 용기는 두려울 때 위험에 맞서는 것이다. 진정한 용기란 사람들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보는 이 없는 곳에서도 하는 것이다, 용기에도 큰 용기와 작은 용기의 구별이 있다(맹자), 죽음을 가벼이 하고 날뛰는 것은 소인의 용기요. 죽음을 소중히 여기고 의로써 마음을 늦추지 않는 것은 군자의 용기다(순자)’ 등이 있다.
성경은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하신다. 용기는 영혼의 가장 고귀한 부분이요, 참 용기는 위험과 실패를 경험하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진정한 용기는 위험과 실패 속에서 비로소 빛을 발하며 희생 속에서 더 큰 용기가 된다.
용기도 자란다 라는 말이 있다. 진정한 용기 즉 끊고 버리는 용기, 양보하거나 용서하거나 나서는 용기, 인정하거나 수정하는 용기, 죽어도 포기하지 않는 용기, 모두 외면할 때 도와주는 용기, 예 해야 할 때 예 하고, 아니오 해야 할 때 아니오 하는 용기, 하나님과 양심 앞에 서는 용기가 진정한 용기요, 인간다운 삶은 그런 진정한 용기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살아가다 보면, 당연히 옳은 일인 줄 알면서도 몸소 행하지 아니하고 응당 나쁜 일인 줄 알면서도 거부하지 아니하고 침묵하는 경우가 자주 생깁니다. 도덕적 해이(解弛)로 치부하기에는 뭔가 아쉬움이 남고 그렇다고 잘못을 인정하라고 할 정도의 책임을 논할 경우도 아닌 것이지요.
단지 스스로 비겁한 인생, 부끄러운 인생이 아닌가 하는 씁쓸한 소회(所懷)를 느끼는 정도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겁함에 아첨하지 않고 불의(不義)를 보면 참지 못하고 과감히 뛰어들 수 있는 용기(勇氣)가 과연 자신에게도 있는 것일까요?
공자는 스스로 인간을 위하고 혼란스러운 춘추전국시대 불의(不義)를 정의로움으로 대체할 세상을 구할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비록 권력을 얻진 못했지만, 이상적 현실주의자로서 붓과 책이 창과 방패보다 강하다는 확신을 거뜬히 심어준 위인이었습니다.
그는 하늘을 원망하지도 사람을 탓하지도 않았으며, 그 근본은 아래로 사람을 배우고 위로하는 천명(天命)에 이르고자 했으니, 결국 군자가 세상에 나가고자 함은 의(義)를 행하기 위함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문구를 해석해보면, 이렇게 하는 것이, 혹은 이런 것이 인간으로서 행해야 할 올바른 도리라고 알면서도 자기의 이익을 위해, 또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감히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것을 나는 용기가 없는 자라고 한다는 의미입니다.
공자는 “어떤 일에 대해 마땅히 옳다 여겨지면 주저하지 않고 용기 있게 행해야 자신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막상 그러한 상황에 대처하게 되면, 진정 용기 있는 행동을 의지대로 발현(發現)하기가 쉽지만은 않은 문제인 듯합니다.
요즘은 타인에 대한 따뜻한 온정과 진정한 용기를 점점 찾기가 힘들어집니다. 여기에 철로에 쓰러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과 젊음을 던진 남자가 있었습니다. 2001년 1월, 귀가 도중 도쿄 신오쿠보 전철역에서 선로로 추락한 취객을 구조하기 위해 선로에 뛰어내려 26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의인(義人) 이수현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그의 빈소에는 일본 주요 정치인을 비롯한 추모객들이 줄을 이었으며, 그의 유해가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애도의 물결은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는 의로운 일에 몸을 사리지 않고 던졌던, 진정한 용기를 보여준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고(故) 이수현씨와 같은 상황이 오면, 다 그렇게 대처해야 한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세상 일에는 극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늘 외로움을 실천하고 용기를 발휘해야 할 상황들이 항상 도처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는 것이지요.
인생은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말이 있습니다. 돈오(頓悟), 즉 문득 깨달음에 이르는 경지까지는 반드시 점진적 수행단계가 따른다는 말입니다. 하나둘 배움의 과정을 거쳐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 그 과정 속에서 유의미한 채움과 인식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잘 만들어 가자는 것이지요.
다식(多識)하다고 모두 똑똑하거나 의로운 삶을 실천하며 사는 건 아니기에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점진적 수행과 용기있는 삶을 위한 자기성찰이 꼭 필요한 때입니다.
▶ 見(견)은 회의문자로 见(견)은 간자(簡字)이다. 안석궤(几; 책상)部는 사람을, 目(목)은 눈을 뜻한다. 見(견)은 눈의 기능으로, 보는 일을 말하는데, 이쪽으로 부터 보는 것을 視(시), 저쪽으로 부터 나타나 보이는 것을 見(견)으로 나누어 썼다. 見(견)은 보다, 보이다, 당하다, 견해 등의 뜻과 뵙다(현), 나타나다(현), 드러나다(현), 보이다(현), 소개하다(현), 만나다(현), 현재(현), 지금(현) 등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나타날 현(現), 볼 시(視), 뵐 근(覲), 볼 관(觀), 뵐 알(謁), 나타날 현(顯),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숨을 은(隱)이다. 용례로는 보고서 깨달아 앎을 견해(見解), 듣거나 보거나 하여 깨달아 얻은 지식을 견문(見聞), 남에게 거절을 당함을 견각(見却), 실지로 보고 학식을 넓힘을 견학(見學), 남의 일을 보고 배워서 실지로 연습하는 것을 견습(見習), 사물을 관찰하는 입장을 견지(見地), 남에게 미움을 받음을 견오(見忤), 얼른 스쳐 봄을 별견(瞥見), 분실이나 유실을 당함을 견실(見失), 책망을 당함을 견책(見責),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한다는 견금여석(見金如石), 눈앞에 이익을 보거든 먼저 그것을 취함이 의리에 합당한 지를 생각하라는 견리사의(見利思義), 모기를 보고 칼을 뺀다는 견문발검(見蚊拔劍), 위험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는 견위수명(見危授命), 항상 잊지 않음을 이르는 견요어장(見堯於墻), 물건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는 견물생심(見物生心), 나라의 위급함을 보고 몸을 바친다는 견위치명(見危致命) 등에 쓰인다.
▶ 義(의)는 회의문자이나 형성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나(我)의 마음 씀을 양(羊)처럼 착하고 의리있게 가진다는 뜻을 합(合)하여‘옳다’를 뜻한다. 羊(양)은 신에게 바치는 희생의 양으로 양을 바쳐 신에게 비는 의식(儀式)이 나중에 바르다, 의로운 일의 뜻이 되었다. 義(의)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떳떳하고 정당한 도리를 말한다. 옳다 또는 의롭다, 바르다, 선량하다, 순응하다, 맺다, 혼합하다, 간사하다, 올바른 도리, 의리, 의미나 의의, 예절, 의로운 일, 명분, 법도, 용모, 의로 맺은 친족 관계, 공적인 것, 인공적인 것, 가짜 등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가(可), 옳을 시(是)이다. 용례로는 의로운 사람을 의인(義人), 의로 맺은 형을(義兄),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일을 의무(義務), 정의를 위하여 거사함을 의거(義擧), 수양 아버지를 의부(義父), 의를 위하여 일어난 군사를 의병(義兵), 정의감에서 우러나는 용기를 의용(義勇), 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도우려는 마음을 의협(義俠), 의를 위하여 분발함을 의분(義奮), 의리와 지조를 굳게 지키는 사람을 의사(義士), 정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기개를 의기(義氣), 의기에 불타 일어나는 용맹을 의기지용(義氣之勇),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 당연함 의리당연(義理當然), 의가 있는 사람은 어버이를 거역하지 않음을 의불배친(義不背親), 의로써 利의 근본을 삼음을 의이건리(義以建利), 의는 바다와 같고 은혜는 산과 같다는 의해은산(義海恩山) 등에 쓰인다.
▶ 不(부/불)은 상형문자로 꽃의 씨방의 모양인데 씨방이란 암술 밑의 불룩한 곳으로 과실이 되는 부분으로 나중에 '…하지 않다', '…은 아니다'란 말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새가 날아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음을 본뜬 글자라고 설명하게 되었다. 不(부/불)는 한자로 된 말 위에 붙어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작용을 하는 말, 불합격을 말한다. 아니다, 아니하다, 못하다, 없다, 말라, 아니하냐, 이르지 아니하다, 크다, 불통, 꽃받침 또는 꽃자루 등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미(未), 아닐 비(非)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가(可), 옳을 시(是)이다. 용례로는 움직이지 않음을 부동(不動), 얼지 않는 액체를 부동액(不凍液), 토지나 집처럼 움직여서 옮길 수가 없는 재산을 부동산(不動産), 어떤 충동에도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부동심(不動心),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일정하지 않음을 부정(不定), 몸이 튼튼하지 못하거나 기운이 없음을 부실(不實), 덕이 부족함을 부덕(不德), 부당한 일을 부당지사(不當之事), 생활이 바르지 못하고 썩을 대로 썩음을 부정부패(不正腐敗), 그 수를 알지 못한다는 부지기수(不知其數), 시대의 흐름에 따르지 못한다는 부달시변(不達時變) 등에 쓰인다.
▶ 爲(위)는 상형문자로 为(위), 為(위)는 통자(通字), 为(위)는 간자(簡字)이다. 원숭이가 발톱을 쳐들고 할퀴려는 모양을 본떴다. 전(轉)하여 '하다, 이루다, 만들다, 다스리다'의 뜻으로 삼고 다시 전(轉)하여 '남을 위하다, 나라를 위하다' 따위의 뜻으로 쓴다. 하다, 위하다, 다스리다, 되다 또는 이루어지다, 생각하다, 삼다, 배우다, 가장(假裝)하다, 속하다, 있다, 행위(行爲) 등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움직일 동(動), 옮길 사(徙), 옮길 반(搬), 흔들 요(搖), 옮길 운(運), 들 거(擧), 옮길 이(移), 다닐 행(行), 구를 전(轉)이 있다. 용례로는 나라를 위함을 위국(爲國), 백성을 위한다는 위민(爲民), 다른 것에 앞서 우선하는 일이라는 위선(爲先), 힘을 다함을 위력(爲力), 첫번을 삼아 시작함을 위시(爲始),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여 행동함을 위아(爲我), 생업을 삼음 또는 사업을 경영함을 위업(爲業), 사람의 됨됨이를 위인(爲人), 정치를 행함을 위정(爲政), 주되는 것으로 삼는 것을 위주(爲主), 예정임 또는 작정임을 위계(爲計), 진실한 즐거움을 위락(爲樂), 어떤 것을 첫 자리나 으뜸으로 함을 위수(爲首), 기준으로 삼음을 위준(爲準), 나라를 위한 기도를 위축(爲祝), 부모를 위함을 위친(爲親), 부모를 섬기는 도리라는 위친지도(爲親之道), 자식된 도리라는 위자지도(爲子之道), 자기를 이롭게 하려다가 도리어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을 이르는 위총구작(爲叢驅雀), 어떤 사람을 위해 벼슬자리를 새로이 마련한다는 위인설관(爲人設官), 임금 노릇하기도 신하 노릇하기도 어렵다는 위군난위신불이(爲君難爲臣不易), 도마 위의 물고기가 된다는 위어육(爲魚肉), 나라를 위한 충성스러운 절개라는 위국충절(爲國忠節) 등에 쓰인다.
▶ 無(무)는 회의문자로 커다란 수풀(부수를 제외한 글자)에 불(火)이 나서 다 타 없어진 모양을 본뜬 글자로 '없다'를 뜻한다. 유무(有無)의 無(무)는 없다를 나타내는 옛 글자이다. 먼 옛날엔 有(유)와 無(무)를 又(우)와 亡(망)과 같이 썼다. 음(音)이 같은 舞(무)와 결합하여 복잡한 글자 모양으로 쓰였다가 쓰기 쉽게 한 것이 지금의 無(무)가 되었다. 無(무)는 유(有)를 부정하는 말,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일정한 것이 없는 것, 도가의 근본적 개념 도(道), 어떤 명사 앞에 붙어서 없음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없다, 아니다, 아니하다, 말다 또는 금지하다, ~하지 않다, 따지지 아니하다, ~아니 하겠느냐?, 무시하다, ~에 관계없이, ~를 막론하고, ~하든 간에, 비록 ~하더라도, 차라리, 발어사(發語辭), 허무(虛無), 주검을 덮는 덮개, 무려(無慮) 또는 대강(大綱) 등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빌 공(空), 빌 허(虛)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존(存), 있을 유(有)이다. 용례로는 그 위에 더할 수 없이 높고 좋음을 무상(無上), 하는 일에 막힘이 없이 순탄함을 무애(無㝵), 아무 일도 없음을 무사(無事), 다시 없음 또는 둘도 없음을 무이(無二), 사람이 없음을 무인(無人), 임자가 없음을 무주(無主), 일정한 지위나 직위가 없음을 무위(無位), 다른 까닭이 아니거나 없음을 무타(無他), 쉬는 날이 없음을 무휴(無休), 아무런 대가나 보상이 없이 거저임을 무상(無償), 힘이 없음을 무력(無力), 이름이 없음을 무명(無名), 한 빛깔로 무늬가 없는 물건을 무지(無地),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음을 무자(無子), 형상이나 형체가 없음을 무형(無形), 아무런 감정이나 생각하는 것이 없음을 무념(無念), 부끄러움이 없음을 무치(無恥), 도리나 이치에 맞지 않음을 무리(無理), 하는 일 없이 바쁘기만 함을 무사분주(無事奔走), 한울님은 간섭하지 않는 일이 없다는 무사불섭(無事不涉), 무슨 일에나 함부로 다 참여함을 무사불참(無事不參), 즐거움과 편안함에 머물러서 더 뜻 있는 일을 망각한다는 무사안일(無事安逸), 아무 탈없이 편안함을 무사태평(無事泰平), 재미나 취미나 없고 메마르다는 무미건조(無味乾燥) 등에 쓰인다.
▶ 勇(용)은 형성문자로 勈(용)은 본자(本字), 恿(용)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힘력(力; 팔의 모양, 힘써 일을 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甬(용; 管 속을 뚫고 나가는 일)으로 이루어젺다. 힘(力)을 돋우어 날래다는 뜻을 합(合)하여 용감하다를 뜻한다. 勇(용)은 용기나 일시에 몰아서 내는 강한 힘의 뜻으로 날래다, 용감하다, 과감하다, 결단력이 있다, 강하다, 용기가 있다, 다툼, 용사나 병사 등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겁박할 표(剽), 감히 감(敢), 날랠 효(驍)이다. 용례로는 씩씩하고 겁이 없으며 기운참을 용감(勇敢), 날쌔고 굳셈을 용강(勇剛), 용감하고 건실함을 용건(勇健), 용기 있게 결단함을 용단(勇斷), 어떠한 위험이라도 무릅쓰고 선행을 감행하는 덕을 용덕(勇德), 씩씩한 힘 또는 뛰어난 역량을 용력(勇力), 용자로서의 명성을 용명(勇名), 용감한 군사를 용병(勇兵), 용감한 사나이를 용부(勇夫), 용맹스러운 사람을 용사(勇士), 용감한 자태를 용자(勇姿), 날래고 씩씩함을 용장(勇壯), 용맹스러운 장수를 용장(勇將), 용감하게 싸움을 용전(勇戰), 날래고 사나움을 용한(勇悍), 의협심이 있어 남자다움을 용협(勇俠), 용기 있게 결단함을 용결(勇決), 씩씩하고 용감한 기운을 용기(勇氣), 날래고 사나움을 용맹(勇猛), 조금도 꺼리지 아니하고 용기 있게 물러나감을 용퇴(勇退), 용감하기 짝이 없음을 용감무쌍(勇敢無雙), 용맹스럽게 힘써 나아감을 용맹정진(勇猛精進), 거리낌없이 힘차고 용감하게 나아감을 용왕매진(勇往邁進), 용감하고 강한 장수에게는 약하고 비겁한 병사는 없음을 용장약졸(勇將弱卒), 관직을 그만두고 속세를 떠나서 생활함을 이르는 용퇴고답(勇退高踏) 등에 쓰인다.
▶ 也(야)는 상형문자로 뱀의 모양을 본떠서 본 뜻은 뱀이다. 그 음(音) 빌어 오로지 어조사(語助辭)로 쓰여지고 있다. 也(야)는 한곳에 대어 잇거나 한곳에 닿아서 붙는 잇기, 어조사(語助辭), ~이다, ~느냐?, ~도다, ~구나, 발어사(發語辭), 또한 또는 역시(亦是), 딴 또는 다른, 다른 사물에 이어서 달다(이), 둥글넓적한 그릇(이) 등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영탄하는 어조사 야야(也耶), 그러한가를 야여(也歟), 별로 해로울 것 없음을 야무방(也無妨), 괜찮음 또는 해롭잖음을 야자무방(也自無妨) 또는 야자불방(也自不妨), 마침내 또는 마지막에는 급기야(及其也), 만일에 또는 행여 나를 혹야(或也), 그 사람 또는 그 자라는 궐야(厥也), 나는 것 같음이나 매우 빠름을 비야사(飛也似), 홀로 푸르다는 독야청청(獨也靑靑), 말인즉 옳다는 언즉시야(言則是也), 입이 관문과 같다는 구자관야(口者關也), 옳으니 그르니 하고 시비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일을 시야비야(是也非也), 전쟁에서 사람은 죽는다는 병사지야(兵死地也), 누구들이라고 드러내지 않고 가리키는 말을 모야수야(某也誰也), 의외로 많음을 이르는 하기다야(何其多也)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