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회개할 것인가: 요나 예언자의 표징과 부활
요나 3,1-10; 루카 11,29-32 / 사순 제1주간 수요일; 2024.2.2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도로 양성하여 파견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 나라에로 참회하여 메시아적 백성이 되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셨습니다. 예언자들이 걸어갔던 길을 칭송하는 데 그치지 말고 삶으로 계승하도록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나온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복음 메시지가 아니라 그 복음을 들었던 이들에 대한 반응에 대해서 내리신 예수님의 비감한 평을 전해주는 한편, 머지않아 다가올 당신의 슬픈 운명에 대해서도 비장하게 예고해주고 있습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9). 메시아적 백성으로 회개하기를 기대하셨던 예수님으로서는 매우 실망하신 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나가 고래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지냈던 고사를 생각하게 만드는 이 ‘요나 예언자의 표징’을 통해서, 이 무렵부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각오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지 사흘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적 백성으로 기대하셨지만 악한 세대로 변해 버린 그 세대에게 보여주실 표징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배경이 된 요나 예언자에 대해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독서의 주인공이요 복음의 배경인 요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를 당해 바빌론으로 끌려가기 직전 시대인 기원 전 6세기경에 활약한 예언자입니다. 그 당시 최강국이었던 고대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였던 니네베의 사람들을 회개시키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받고 나서, 처음에 요나는 무모해 보이는 이 파견 결정에 불복종하기로 마음먹고 당시 땅 끝으로 알려진 스페인 타르시스로 도망치려고 배를 탔는데, 이를 보신 하느님께서는 폭풍우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래서 위험해진 배의 선원들이 요나를 희생제물로 바다에 던졌고 고래로 하여금 요나를 집어 삼키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를 죽이지는 않고 고래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지내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다시 고래로 하여금 요나를 뱉게 하시자 그는 하는 수 없이 니네베로 다시 돌아간 요나가 회개하라고 외치며 돌아다니자 신기하게도 니네베의 임금부터 대신들과 백성들이 하느님께로 돌아왔다는 고사가 요나 예언서의 기록입니다. 어찌보면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스토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숨겨진 역사적 사실이 있습니다. 당시의 역사 기록과 천문 관측 기록에 의하면, 요나가 배짱좋게 니네베 시민들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하던 그 시절에 두 번의 대기근(大飢饉, 기원전 765년, 759년), 한 번의 개기일식(皆旣日蝕, 기원전 765년 6월 15일)이 일어났었습니다. 그러자 강제로 끌고 온 소수 민족들이 제국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던 앗시리아에서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진 터에, “이제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가 무너진다!”(요나 3,4)고 요나가 외치며 돌아다니자 공포에 질린 임금이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갑작스럽게 명령하여 억지 회개를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던 예수님께서도 니네베 사람들보다 더 완고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군중을 보면서 십자가 죽음을 각오하고 회개하라고 외치셨습니다. 당신이 죽게 되더라도 사흘이 지나면 부활하시어 진정한 표징을 주시겠다는 다짐과 각오가 수난과 부활을 세 번이나 예고하시던 말씀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 메시지의 뜻을 깨닫지 못함은 물론 당시 예수님을 둘러싼 상황의 엄중함을 눈치채지도 못하고 있었던 군중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던 요나의 사례를 들어 일깨워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담긴 표징은 요나가 보여준 표징보다 더 큰 능력을 발휘하리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이렇듯 비장한 말씀을 표명하시기까지, 즉 당신 말씀을 경탄하며 듣던 군중이 보여준 기회주의적인 반응에 대해 십자가와 부활의 표징으로 최종적인 입장을 표명하시기까지 과연 예수님께서 어떠한 노력을 하셨고 또 어떠한 성취를 하셨는지 간략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을 인용해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사명을 천명하신 이래로, 주로 갈릴래아 지방을 두루 다니시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전하시기 전에 질병이나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는 치유를 해 주셨고, 마귀 들린 이들에게는 마귀를 쫓아내어 주셨으며, 배 고픈 이들에게는 빵을 먹여 주셨고, 이런 실천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시키신 다음에는 듣는 이들이 알아들을 만한 소재를 동원해서 비유로 당신의 실천 행동에 담긴 뜻을 깨닫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활동을 하는 중에 만났던 이들 가운데 열두 사람을 뽑아서 제자로 삼으시기도 하셨으며, 이 제자들에게는 당신이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서 알아듣도록 따로 풀이해 주셨습니다. 이 제자들은 어부 출신도 있었고, 세리 출신도 있었으며 혁명당원 출신도 섞여 있었습니다. 이 제자들을 방방곡곡에 파견해서 당신이 선포하시던 복음을 선포하도록 하기도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 일행이 가는 곳마다 갈릴래아 지방 사람들은 물론 전국에서 무언가 도움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심지어는 띠로나 시돈 같은 해안지방이나 요르단 건너편 지방 같은 이방 지역에서도 사람들은 몰려들었습니다. 말하자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명망인사가 되신 겁니다.
이런 와중에 예루살렘이 머물던 사두가이들은 민심의 향방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며 날로 명성을 얻어가는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바리사이들은 아예 그분 일행을 따라다니며 감시하면서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그분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이 적대세력과 구분되면서도 주목해야 할 사람들이 군중이었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에 대해 열광하면서도 당시 유다교의 기득권을 쥐고 있었던 두 세력의 동향도 물론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시면 도움을 청하고 혜택을 받기는 하면서도 기득권 세력의 눈 밖에 날까 두려워서 내놓고 예수님의 복음을 환영하고 회개하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악한 세대’라고 뭉뚱그려 표현하신 것은 당신을 적대시하기에 이른 기득권 세력들의 사악한 반응뿐만 아니라 도움과 혜택을 받기만 할 뿐 회개할 생각은 없이 눈치만 보고 있는 군중의 기회주의적 처신도 포함해서 하신 것입니다. 전자가 더 사악하기는 하지만 후자 역시 하느님 나라를 외면한다는 의미에서는 선한 세력일 수는 없고 결과적으로는 악한 세력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변이 어두울수록 빛은 더욱 빛나는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대의 악한 세대에게 솔로몬의 표징보다 더 지혜롭고 요나의 표징보다 더 설득력이 강한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가 지닌 빛을 암시하여 군중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회개를 미루고 있던 그 군중이 이 말씀 한 마디로 금새 알아듣기를 바라서라기보다는 당신 자신과 제자들에게 다짐하는 의미가 더 큰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마만큼 상황이 엄중했었던 것입니다.
요나의 표징에 덧붙여 예수님께서는 솔로몬과 그를 찾아온 남방 여왕이 보여준 표징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은 하느님께 지혜를 청해서 이스라엘 왕국을 다스렸지만, 그 지혜란 결국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세속의 지혜였습니다. 이 지혜를 얻고자 찾아왔던 남방 시바의 여왕은 어마어마한 선물을 가져왔고, 그 덕분에 솔로몬 자신과 이스라엘 왕국은 풍요를 누렸지만, 이 풍요로운 왕국을 계속 유지하고자 백성은 무거운 세금에 허덕여야 했고 더 결정적으로는 왕국의 풍요로움을 지속시켜보자고 주변 나라들과 혼인 동맹을 맺고 들여온 이방 왕비들이 자신들의 우상을 들여와서 이스라엘 왕국을 타락시킨 데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왕국은 솔로몬 이후에 왕자들의 왕위 다툼으로 남북으로 갈라져 버렸습니다. 이것이 솔로몬이 받은 세속적 지혜의 결말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에 담긴 지혜는 세속의 지혜를 훨씬 넘어섭니다. 그래서 ‘요나보다 더 큰 이’, 또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바로 당신이시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언자였던 요나가 적대적인 강대국 앗시리아의 수도 한복판 니네베에서 혈혈단신으로 회개하라고 외칠 수 있었던 비결은 영으로 하느님과 직접 통공하면서 힘과 지혜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회개시켰던 니네베, 즉 앗시리아는 더 큰 재앙에 대한 두려움에서 회개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에 더 이상 따르지 않았고, 결국 북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켰으며, 뒤이어 일어난 바빌로니아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부활에 대한 확신으로 십자가를 짊어지셨던 예수님께서 회개하라고 외치셨던 바는 그리스도교와 교회의 탄생으로 역사의 거대한 진보를 가져왔고, 그 결실이 우리 자신들의 신앙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당시 이스라엘 군중에게 바라셨던 메시아적 백성이 되는 길입니다.
평소에 모범을 보여주신 바와 같이 제자들이나 군중도 하느님과 기도로써 통공을 이루면 당신이 하시던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으리라고 예수님께서 장담하셨던 바는 기도가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는 회개의 행동이 가져다 줄 성취를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통공의 기도와 회개의 행실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일단 기도로 하느님과 통공을 이룬 사람은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징표를 읽을 줄 알게 되고 그에 따라 행동하게 됩니다. 그 행동은 자기중심적으로 행하던 이전과 달리, 하느님께 중심을 두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회개의 결실입니다. 일단 마음과 혼이 자리한 우리의 두뇌가 기도로써 영을 받아 하느님과 통공하게 되면, 평소에 쓰지 않던 거대한 잠재력이 깨어나기 때문에 우리의 기억력은 물론 인지능력도 전에 없이 훨씬 똑똑해집니다. 박해하는 주변 세상으로부터도 초연할 수 있는 정신적 면역력도 강화됩니다. 이른바 ‘멘탈(Mental) 갑(甲)’ 수준의 심리와 인격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도 ‘악한 세대’라고 단죄받지 않고 메시아적 백성이 되자면 통공을 위한 회개를 해야 합니다. 기도를 바치되 하느님의 영과 소통하는 기도를 바침으로써 통공해야 합니다. 이러한 통공에 대한 회개 요청이 오늘 말씀의 메시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