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 고두현
늘 뒤따라오던 길이 나를 앞질러 가기 시작한다.
지나온 길은 직선 아니면 곡선
주저앉아 목 놓고 눈 감아도
이 길 아니면 저 길, 그랬던 길이
어느 날부터 여러 갈래 여러 각도로
내 앞을 질러간다.
아침엔 꿈틀대는 리본처럼 푸르게
저녁엔 칭칭대는 붕대처럼 하얗게
들판 지나 사막 지나 두 팔 벌리고
골짜기와 암벽 지나 성긴 돌 틈까지
물가에 비친 나뭇가지 따라 흔들리다가
바다 바깥 먼 항로를 마구 내달리다가
어느 날 낯빛을 바꾸면서 이 길이 맞느냐고
남 얘기하듯, 천연덕스레 내 얼굴을 바라보며
갈래갈래 절레절레
오래된 습관처럼 뒤따라오던 길이 갑자기
앞질러 가기 시작하다 잊은 듯
돌아서서 나에게 길을 묻는 낯선 풍경.
― 시집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여우난골, 202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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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두현 시인
1963년 경남 남해 출생. 경남대 국문과 졸업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시선집 『남해, 바다를 걷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