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 롬 16:17-27
- 제목: 다시 찾은 교제의 삶
◇ 기도
아버지, 오늘은 기숙학원에 잠시 간 큰 아이를 데려오려고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3주만에 만나니 너무 반갑고 기뻤습니다. 저도 아버지의 기쁨되는 존재이고 싶습니다. 행위가 아니라 복음으로 의롭게 여겨주신 은혜를 믿기에, 저는 이미 창세 전부터 그런 존재로 여겨졌음을 믿습니다. 비존재의 위협과 술책에서 건지시고 아버지께 매일 더 나아오게 하소서.
◇ 본문살핌
공동체 안에서 다른 교훈과 메시지를 일으키는 이들을 피해야 한다. 다른 교훈이란 복음의 내용과 다른 어떤 것들이다. 그것의 진위는 성경전체로서 파악 할수 있다. 누군가 전하고 주장하는 것이 이전에 들었던 말씀과 다소 생경할때, 베뢰아 사람들이 그랬듯이 '과연 그러한가' 하는 물음을 마음에 안고 성경 전체를 통해 그 주장을 대조해 보면 된다. 그렇다면 성경을 맥락있게 알지 못하는 이, 성경을 보지않는 이, 이런 사람들은 그런 선별작업도 불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다른 교훈을 전하는 자는 이단의 탈을 쓸 수도 있겠으나, 목사와 장로, 집사일 수도 있다. 초대교회의 유명한 이단적 사상들이 이른바 신학자의 위치에 있던 이들에게서 주로 생성되었음만 봐도 그렇다. 어쩌면 교회에 처음 발 딛고 들었던 메시지들이 이단적이거나 잘못된 해석에 기반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스스로 성경을 읽고 탐구하지 않는다면 그런 이가 어떻게 자기 공동체의 심각한 영적 오류를 알아차릴 수 있을까? 아니, 그러기가 얼마나 힘들까?
자기 생각대로, 자신만의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외적 태도는 아첨과 교활한 언사로 묘사된다(16:18). 그들은 진리가 이렇게 말하니 맞아죽어도 어쩔수 없다는 스데반의 마음이 아니며, 말이야 어떨지 몰라도 내 충정어린 진심이 이런 것만은 알아주길 바란다며, 진리 대신 진심에 호소하는 듯 하다. 문제는 본인의 진심이 거짓에 기반한 것이란 사실이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은 진리를 섬긴다. 예수께서 전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신자들은 참아버지의 음성에 반응하여 이를 따르며, 저마다 이에 순종하는 길을 간다. 그러니 아버지의 말씀과 다른 것을 전하는 이는 사실 하나님의 자녀된 적이 없거나 적어도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바울이 전한 바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께서 행하신 구원의 일들(십자가-무덤- 부활)을 말한다. 그것은 창세 전에 이미 계획되고 작정되었던 사건이다(16:25). 이 사건이 실제로 나타나기 전에 하나님은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여 이에 대해 기록(대언, 예언)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 글과 예수의 일들을 살펴 보고, 모든 민족이 믿어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녀되게 하려 하신 것이다. 예수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은 이 복음, 이 말씀을 재료로 우리 신자들을 능히 견고한 믿음으로 이끄실 수 있는 분이다(16:27).
◇ 묵상
날마다 복음 앞에, 말씀 앞에 나아온다는 것은 새로운 앎을 위한, 어떤 공부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은 아버지에 대해 끊임없이 새로운 정보를 얻기 위함이 아니다. 아버지와의 대화 자체가 목적일 때 서로 화목하고 친밀한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 아버지와 몹시 서먹했던 어린 시절, 하루는 아버지와 친해지고 싶어서 아버지가 월남에 잠시 파병되셨을 때의 일을 용기내어, 뜬금없이 물은 적이 있다. 아버지는 거기에 대답해 주시지 않았다. 실제 전쟁의 한가운데 서 있었던 기억을 어린 아들에게 차마 하실 이야기가 없었을 것이다(초등학생이던 동생도 함께 있었기에 더욱). 물론 아버지가 지혜롭게 소소한 군생활의 다른 에피소드라도 말해 주셨다면 참 좋았겠지만, 아버지는 그저 화제를 돌리시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나도 딱히 월남 얘길 듣고자 했던 건 아니었다. 대화가 필요했을 뿐이다. 다만 너무 뜬금없고 거북한, 맞지 않는 화제였을 뿐이다.
묵상하는 어떤 날은 본문이 다 아는 이야기, 혹은 바울의 안부인사 같은 영양가 없어보이는 글들일 때도 있다. 물론 거기서도 성령께서는 얼마든지 보화를 캐내게 하실 수 있고, 나도 그러한 경험을 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식사하셨어요?" 나 "안녕히 주무셨어요?"는 그 사실을 궁금해 하는 것이 아니다. 대화의 목적은 대화 그 자체이듯이(교제로서), 말씀을 가까이하는 것은 어떤 새로운 앎이나 명령(오더)을 캐치하기 위해 우리 회장님께 거는 엄숙한 전화통화의 시간이 아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듣는 시간이 곧 아버지와의 평화로운 교제 시간이 되기에 그 시간을 확보할 뿐이다. 또한 아버지의 말씀이 내 영혼에 전해지면, 그것이 곧 내 영의 양식이 되며 생수가 되기에 하는 것일 뿐이다.
◇ 기도
아버지, 첫 100일 묵상이 지나고 이제 새로운 100일 결사를 시작합 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분전환을 위한 이름짓기일 뿐, 이 시간의 본질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함없을 것입니다. 내일부터 시편을 통해, 먹이시고 가르치시며 또한 쉼을 주실 아버지를 신뢰하고 그 사랑에 기대합니다. 다시 아버지를 향한 마음을 회복하고자 하는 작은 마음과 결심에 큰 은혜 주셔서, 영영토록 말씀을 붙잡도록 영혼을 적셔주시고 회개케 하시고 결단케 해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제 생명입니다. 이제 나사로는, 무덤에서 일어나 주의 복음에 연합하기를 원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