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6.20이후 적용 자세한사항은 공지확인하시라예
출처: 여성시대 꼭지노래듀덤
글은 읽을 여시들만 읽어 그냥 엄마가 노무현대통령님 대통령 되기전
노무현이라는 사람에게 반해 우리 초등학교 중학교때 냉패겨치고 노무현대통령님만 따라다녔었거든
그땐 어려서 엄마가 엄청 미웠기도했고, 원망도 많이 했어 거의 2~3년 떨어져 있었거든
근데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워 우리엄마가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노무현 대통령님을 도와줬다는 거닌깐
근데 내가 쫌 이런말 낯간지러워서 엄마한테 잘못하는데
여성시대는 엄마는 절대 볼수없는 곳이닌깐ㅋ...
그래서 글읽다가 울컥해서 퍼왔어
눈물한방울할려다 나만 울컥한거일수도 있으니;
문제되면 바로 말해줘 ㅠ_ㅠ 쿠크다스심장이얌..
+아참..엄마가 들고있던 영상이라서 우리엄마 위주로 좀 많이나와ㅋ..
이때 우리엄마 아이디가 소나무거든 ㅋㅋㅋㅋ포장마차아줌마 ㅋㅋㅋ
--------------------------------------------------------------------------------------
나를 힘들게 하는 정치인, 노무현 그리고 김부겸.....2부
‘포장마차 전국투어’ 대선까지 2개월..
경선 이후 우왕좌왕 힘 빠져있는 노사모들도 다시 뭉칠 수 있고 그곳에서 나오는 수익금을 돈 없는 후보 괄시하는 민주당 중진들 설렁탕도 한 그릇 사먹이고...
생각은 에너지라는 광고카피가 있다. 2002년 노사모가, 내가, 바로 그랬다.
날씨는 추워지고 그림 몇 조각이 비어있는 상태지만 다음날 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아이들과 살림을 위해 친정엄마한테 부탁했다. 남편의 동의도 필요했다.
남편은 정치엔 무관심한 편, 노무현에 대한 관심도 별로였던 터라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이었지만 당시 내 의지가 너무나 굳건했던지 흔쾌하지는 않았지만 동의를 했다.
2002년 10월11일
우여곡절 끝에 노란천막을 두른 희망포장마차는 부산을 떠나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 광주는 노사모에게 언제나 남다른 의미를 가진 이름이었다. 노무현은 지역감정에 맞서 싸웠다. 광주경선의 승리는 경선의 향배를 결정지은 역사적 순간이었다.
부산사람들이 작당한 희망포장마차가 광주에서 출정식을 갖고 첫출발을 한다는 것은 영호남지역갈등을 극복하려는 우리의 소박한 몸짓이었다.
마침 희망돼지를 실은 미키루크 일행도 광주에 왔었다. 우리 두 사람은 가정을 잠시 버려두고 온 것에 대한 미안함과 서글픔이 교차했지만 12월19일 노무현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그날까지란 무언의 약속을 하고 광주의 첫 밤을 그렇게 보냈다.
광주를 시작으로 대전, 청주, 천안, 인천, 서울, 일산, 동두천, 춘천, 태백, 원주, 제천, 영주, 문경, 안동, 대구, 부산, 김해, 창원, 울산, 군산, 익산, 정읍, 남원, 전주, 성남, 시흥. 등등
전국을 누비는 포장마차의 일정이 시작됐다.
포장마차란 게 그렇듯이 녹녹하지는 않았다.
물과 전기는 당연히 없었다.
물통을 들고 추운 겨울 공용 화장실을 찾아 물을 구했고, 손은 불어터졌고 발은 꽁꽁 얼기가 일쑤였다. 새벽까지 영업을 하고 난후 숙소를 찾아 헤매다 결국 차안에서 밤을 새우기도 하였고, 한 끼 식사비를 아끼려고 2인분을 세 명이 나누어 먹으면서도 행복했다.
숙박비 몇 푼을 아끼려고 난생처음 여인숙에 잠을 청하기고도 했다. 혼숙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잠시 짬이 나도 집에 전화를 걸 수가 없었다.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게 두려웠다.
내가 엄마라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었는데 애써 피하고 싶었다. 친정어머니에게는 염치가 없어서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일정한 장소도 없이 전국을 돌아 다니는 건 당연히 고단하고 무리한 행군이었지만 힘든 건 그게 아니었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서 감시의 눈길로 주시하는 선관위.
선관위의 제지를 뚫고 나면 경찰이 들이닥치기도 했다.
선거법이 아니면 도로교통법을 적용하기도 하였고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도 했지만 공권력 앞에 때로는 포장마차를 접기도 했다.
이미 우리의 일정은 노사모게시판에 다 공개되어 있었기 때문에 선관위와 경찰은 우리를 저지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였다. 소위 관권선거라고 해서 집권여당이 모든 공권력의 비호와 지원을 받곤 했던 지난 날이 무색하리만치 법과 원칙은 우리에게 가혹하게 적용됐다. 집권야당 한나라당이라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던 시절이었다. 가는 곳마다 우리 후보는 정말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는 걸 새삼 뼈저리게 확인했다. 우리는 분노와 슬픔에 칼바람도 추운 줄 몰랐다. 이 작은 몸짓이 정말 노무현에게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 없었을 뿐이다.
그때 우리를 달리게 하고 지치지 않게 해 준 건 각 지역에서 만난 노사모들이었다.
-여의도 포장마차를 찾아온 노무현후보-
희망이라는 이름의 포장마차!
가는 곳 마다 지역노사모들이 함께 해주며 선관위를 피해 장소를 옮겨 다녔고 겨우 외진 공터를 찾아 천막을 쳤다. 모두가 주인이었고 모두가 객이었다.
다들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도 얼싸안고 서로 고마워했고 앞으로 남은 시간동안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을 서로 주고받았다.
후단협의 준동이 극성일 때 여의도 민주당사 앞에서 당내에서 후보 그만 흔들고 차라리 정몽준과 함께 하라는 구호를 걸고 시위포장마차를 일주일 내내 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 걸까?
김민석이 정몽준에게 날아갔다는 소식을 접한 건 청주에서의 어느 날 아침이었다.
그동안 모았던 포장마차수익금 450만원을 보냈다. 기가 막힌 현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우리는 더 오기가 생겼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하룻밤에 후원금 118억을 모았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우리는 천 만원을 전달했다. 여기에는 우리의 노무현을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모든 이들의 열정과 의지가 담겨있었다.
고달팠지만 행복했다. 대책없이 승리할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토의땅 대구는 여성회원들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럼에도 참 열심히 도와주셨는데..
매상이 처음으로 백만원이 넘어 거금 180만원의 수입을 기록했다.
언제나 추웠지만 정말 추웠던 11월의 어느 날 여의도.
누군가는 십자수를 놓은 커다란 액자를 선물하고, 누군가는 진영단감을 트럭 하나 가득 싣고 와 후보 앞에 부려놓았던 그 날.
포장마차 수익금을 전달하며 잠시 뿌듯하기도 했던 그 날.
민주당의 지도부와 중진들이 병풍처럼 줄줄이 앉아있는 단상에 올라온 후보 노무현은 정몽준과 단일화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를 연호하던 사람들은 일순간 무거운 침묵에 빠졌고 뒤이어 곳곳에서 비통한 외침이 들려왔다.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짓던 그의 미소는 쓸쓸해 보였고 누군가는 혈서인 듯 ‘단일화 반대’라는 글씨를 쓰고 있었다.
-민주당 에 후원금 천만원 전달하던날,-
두고 온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너무 허무했고 부질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모든 걸 접을까도 생각했지만 그쯤에서 그만둘 수 가 없었다.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가는 길이 험난했지만 후보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위안을 받으려 애썼다.
TV 토론과 여론조사를 거쳐 노무현은 드디어 단일후보가 되었다. 경선 첫 날부터 단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고 단 한번도 그냥 쉽게 문턱을 넘을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노사모는 애면글면 애닯아 했고 발을 동동 구르며 뭔가를 하기위해 거리로 나섰다.
우린 왜 하필이면 이렇게 어려운 사람을 좋아하게 됐을까. 그래서 굽이굽이 힘들게 그의 여정을 함께 하며 눈물을 훔치는 걸까. 우리끼리 자조 섞인 신세한탄을 하던 시절이었다. 정작 후보는 아무리 힘들어도 항상 여유를 잃지 않았다. 후보시절의 노무현은 단연 최고였다. 그렇게 따뜻하고 그렇게 품위와 열정을 보여준 정치인은 아마 없다. 물론 나는 포장마차 때문에 그의 유세를 제대로 볼 기회조차 없었지만 말이다.
단일화를 거쳐 첫 후보 등록을 하고 부산을 출발한 후보가 대구로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새벽을 달려 도착한 대구 칠성시장에서 만난 노무현 후보는 그랬다.
“소나무 고마 부산으로 내려가라, 힘들다 아이가”
“아입니더, 포장마차는 노짱님과 약속이 아니고 노사모와 약속이니 지켜야 합니더.”
나는 억척스레 고집을 부렸고, 후보님께서 그나마 소나무 글을 읽으면서 위안을 얻는다고..게시판에 글 좀 올려 달라는 비서의 전화한통에 천근같은 몸을 끌고 새벽녘 피시방을 찾아 헤매기도 했다.
그리고 12월19일 승리했다.
노무현은 대한민국의 16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10년.....
난 대구에 있다.
이번에는 그때 초등 3학년이었던, 지금 스무살이 지난 둘째딸을 대동하고.
2002년 칠성시장의 노무현 후보처럼 김부겸은 말한다.
"소나무, 우짠다고 여기왔노?
하이고~ 이 아줌마야. 딸까지 끌고.."
10년이 지난 지금 노무현에서 김부겸으로 사람만 바뀌었지만 여전히 제일 어려운 대구출마를 감행한 김부겸 못본체 할수 없다는 게 그 이유다.
발이 부르터라 대구 수성구를 해메고 다니면서도 웃음을 잃지않는 김부겸
노무현과 김부겸, 전혀 다른 듯 하지만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우직한 배짱이 있고 가슴으로 말하고 한번 하겠다면 그냥 밀어 부치는..
이번이 마지막이란 단어를 되뇌이면서......
김부겸 화이팅!! 대구 화이팅!!
|
첫댓글 소..나무야..소나무야..언제나 푸른..소나무야.. 가슴속에 새겨진 소나무야..
언니 닉네임ㅠㅠ..그리워요
울엄마도 노대통령 엄청좋아하셔서 맨날 노대통령 영상보시면서 눈물흘리신다..ㅜㅜ
아이고 노대통령님ㅠㅠㅠㅠㅠㅠㅠ 와 진짜 영상보니깐 눈물난다ㅠㅠ 노대통령님, 여기는 아직 사람 사는세상이 되기는 먼 것 같아요., 노대통령님 계신 그 곳은 사람 사는 세상이겠죠?? 너무 그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