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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행주도강 전첩비
위 치 : 고양군 지도읍 행주외리 산7-1 건립년월일 : 1958년 9월 28일(최초건립) 1984년 9월 20일(재건립) 건 립 자 : 해병대사령부 현 황 : 탑 높이 8M, 바닥길이 8M, 경역면적 : 24펑 모 형 : 삼각형 모양의 두 개의 비로 구성된 이 비는 한미 해병대의 연합작전을 의미하며 삼각형 모양은 안정된 모습과 확고한 신념 그리고 필승의 투지를 상징하고 있으며, 하늘을 찌르듯이 끝부분을 뾰족이 처리한 것은 한미연합군의 승전을 다짐하는 투혼의 정신을 기리고 찬양한 것임. 건 립 개 요 : 6.25동란 당시 한미연합해병대가 한강 도강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수도 서울을 탈환하는데 빛나는 공훈을 세움으로 이를 기리기 위하여 당시 도강지점인 행주대교 북방 서원마을 상봉에 최초의 비를 건립하였단 것을 규모와 모습을 정성껏 가다듬어 해병대사령부에서 현 위치에 다시 세움. 전 과 : 인천상륙작전을 성공리에 감행한 한미연합해병대가 다시 적을 추격하여 1950년 9월 20일 행주나루에서 치열한 혈전 끝에 도강작전에 성공하므로써 서울 진격의 교두보를 확보하였음. |
고양 행주산성(高陽 幸州山城) 국가지정 문화재(사적 제56호) 소재지 : 고양시 덕양구 행주로 15번길 89 행주산성은 덕양산 정상 중심의 능선을 따라 축조된 토성(土城)이며, 전체 둘레길이는 약 1km이다. 산성의 남서쪽은 한강이 흐르고 동남쪽은 창릉천倡陵川)이 산성을 돌아 한강으로 흘러 천연의 요새지(要塞地)로서 인근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행주산성은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되었으며,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전라 순찰사이던 권율이 승군을 포함한 정병 2,300여명으로 왜군(倭軍) 30,000명을 격퇴한 곳으로 임진왜란 3대 대첩지 중 하나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끝난 후 선조 35년(1602)에 그날의 승전을 기념하여 덕양산 정상에 대첩비가 세워졌다. 헌종 8년(1842)에는 행주 나루터에 기공사(紀功祠)를 창건하여 권율 도원수를 제향하였으나 6·25전란 때 소실되어 1990년도 후반 기공사를 원형 복원한 후 현재 행주서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권율 도원수 및 충신들의 제례를 봉향하고 있다. 1970년 행주산성 정화사업을 시작으로 권율 도원수의 영정(影幀)을 모신 충장사(忠莊祠), 진강정(鎭江亭), 대첩비각(大捷碑閣), 대첩문(大捷門)이 건립되었다. 이후 1980년대에는 대첩기념관(大捷記念館), 충훈정(忠勳亭), 충의정 (忠義亭), 권율도원수(權慄都元帥)의 동상이 건립되어 오늘의 행주산성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1593년(선조 26년) 1월 우리 군과 명군은 반격을 펼쳐서 북상했던 왜군을 격퇴하여 서울오 퇴각시켰다. 그러나 왜군은 1월 27일 벽제관 싸움에서 명군을 깨뜰자 다시 사기가 올랐다. 전라도 순찰사 귄률장군은 이미 1592년 11월부터 5천의 군대를 이끌고 수원 독산성에 진을 친 뒤 서울에 머물고 있는 왜군을 후방에서 위협하다가 조방장 조경, 슨군장 처영과 함께 2천3백의 정예군을 이끌고 행주산성으로 옮겨 목책을 세워 요새화하고 남하하는 우리 군과 합세하여 서울을 수복하려고 하였다. 1953년 2월 12일 새벽, 서울에 집결하였던 왜군이 벽제관 승리의 여세를 몰아 3만의 대군을 7대로 나누어 행주산성을 총공격하였다. 인해전술로 물밀 듯이 공격하며 선봉대를 교대로 투입하는 왜군을 우히 군은 권률장군의 지휘하에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면서 격전을 벌였다. 우리 군은 수차의 왜군 공격을 모두 격퇴하였고, 왜군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상자를 내게되자 시체를 네곳에 쌓아 불태우고 오후 5시경 퇴주하였다. 임진왜란 삼대첩의 하나인 이 행주대첩은 관군, 의병, 승군, 부녀자의 총력전으로서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엎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우리나라 대외 항전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
관 군
권률장군이 가장 높은 지휘소에서 왜군의 정세를 살피던 중 왜군이 목책에 접근하였을 때에 큰 북을 세 번치자 우리 군은 활을 쏘고, 차포는 일제히 불을 뿜었다. 왜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왜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교대로 산성으로 올라와 조총을 쏘며 목책을 넘으려 했다. 이에 권률 장군은 큰칼을 뽑고 진두지휘하니 전군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다. |
의 병
의병은 왜군을 격퇴시키기 위하여 지원한 민간인으로 이루어진 군대였다. 행주산성의 의병은 전라도 순찰사 권률장군을 따라온 전라도 의병이 많았다. 의병은 관군에 비해 무장이 허술하고 훈련이 부족하였지만 사기는 휠씬 높아 칼, 도끼 등을 들고 관군과 함께 공방전을 펼쳤다. 적이 목책에 불을 놓으면 물로 불을 끄고 화살이 다하면 돌로 적을 쳤다. |
승 군
슨군은 승려의 몸으로 전투에 참가한 군대였다. 승군장 처영이 이끄는 행주산성의 서북쪽에 있는 자성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왜군이 계곡으로 올라와 조총을 쏘며 목책에 불을 질러 한때 목책의 진지가 위태로왔다. 이때에 권률 장군이 진두지휘하고 승군장 처영이 독전하자 승군은 육박전으로 왜적을 쳐서 끝내 그들을 격퇴시켰다. |
여 성
우리 군은 산성 위에서 화포와 강궁을 쏘고 돌을 굴리면서 올라오는 적을 막았다. 싸움이 오랫동안 계속됨에 따라 포탄과 화살이 다하고 돌마저 떨어지게 되자, 성안의 부녀자들이 치마로 돌을 날라주어 돌로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녀자들의 호국에의 의지가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하여 그 후부터 "행주치마"라는 말이 더욱 유명해졌다. |
권율장군과 동산동 밥할머니 -조선 최초의 여성 의병장, 행주치마와 노적봉의 전설- ◆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불과 20일만에 서울(한양)을 함락시켰고 선조 임금은 함경도로 피신하면서 명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고양에서는 권율장군이 조선 민관군을 이끌고 있었다. 이때 북한산 부근의 대부호 문씨 집안에는 총명한 며느리로 이름난 여장부 해주오씨가 있었다. 그녀는 북한산 봉우리를 볏짚으로 감싸 군량미를 쌓은 노적가리처럼 위장하고 냇물에 석회가루를 폴어 흘려보낸 후, 왜군들에게 “조선군 주둔지에는 산더미같은 군량미가 쌓여 있는데 이 뿌연 물은 북한산에 주둔한 수 만명 군사의 밥짓는 쌀뜨물이다.”고 속여 허기진 배를 석회물로 채우게 하고 복통 설사를 일으켜 퇴각시키는 지혜를 발휘하였다. 이후로 위장했던 북한산 산봉우리를 노적봉이라 불렀다. 그 후에 오씨는 인근의 부녀자들을 모아 여성의병대를 조작하고 전쟁에서 군인들에게 밥을 지어주고 부상병을 치료하였다. 이 때부터 사람들은 오씨를 밥할머니라 불렀다.
◆ 1593년 2월 12일 행주산성에는 권율장군이 이끄는 1만명의 조선 민·관·군과 3만명의 왜군이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시간이 갈수록 성안에 무기가 떨어져 불리하게 되자 밥을 짓고 부상병을 돌보던 여성의병장 밥할머니는 여자들에게는 앞치마에 돌을 주워 나르게 하고 군인들이 돌을 무기로 쓰게 하여 대승을 거두게 하는 지해를 발휘하였다. 이 전투가 바로 행주대첩이다. 전쟁이 끝난 후 인조대왕은 밥할머니의 공적을 인정하여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하였고 후세 사람들은 밥할머니의 석상과 비석을 북한산이 잘 보이는 창릉모퉁이에 세워 호국정신을 기렸다. -밥할머니 석상 : 경기도 항도문화재 제46호- |
충 장 사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권을 장군[도원수]의 전공을 기리고 그의 호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1970년 문화재 재건사업으로 건립한 사당이다.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콘크리트 건물이다. 충장사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이며, 사당 안에 봉안된 장군의 영정은 장우성 화백이 그린 것이다. 충장사에서는 매년 3월 14일 행주대첩을 기념하는 제례를 모신다. |
[백송과 배롱나무]
[전사청]
행주 대첩비
이곳은 임진왜란 때 권률 장군이 적은 군대를 가지고 많은 적을 격타한 전적지이다. 장군의 자는 언신, 영의정 권철의 아들이다. 一五三七년에 출생, 一五八二년 문과에 급제하여 임진란이 발발한 뒤에 의주 목사에서 광주 목사에 전임되어 전라 순찰사 이 광의 휘하에 들어갔으나 이 광은 장군의 말을 듣지 않다가 마침내 전군이 궤멸 당하였다. 장군은 광주로 돌아가 군대를 모집하여 남원 이치에 주둔,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 오는 적을 크게 격파하여 침입을 저지하였다. 장군은 다시 전라도 순찰사에 임명되었다. 장군은 곧 군대를 모아서 약 四천명을 거느리고 9월에 수원 독성에 주둔하였다. 이때에 적들은 평양, 황해도 및 개성을 나누어 점령하였고, 후방 부대들은 서울에 모여 있었다. 장군은 위험을 무릅쓰고 서울을 송격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고 앞에 나아간 적들의 기세를 꺽기 위하여 또다시 이듬해 二월 二천三백명을 거느리고 양천강을 건너 고양의 행주산성에 주둔하였다. 이때는 중국에서 퍄견된 대장 이여송이 평양에 있는 적을 격파한 뒤이므로 평양, 황해도 개성 및함경도에서 후퇴한 적들이 모두 서울에 집결해 그 세력이 강대하였다. 장군은 소수의 군대를 거느리고 서울의 목덜미를 누르고 있었으나 워낙 적은 수였기 때문에 적군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이달 十二일 수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산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장군은 군중에게 동요하지 말도록 주의시키고 성안에서 활을 쏘며 돌을 굴려서 기어오르는 적을 격파하였으며 적이 목책에 불을 지르면 물을 쏟아서 이를 방지하였다. 일부의 적이 방위가 약간 허술한 쪽으로 들어오자 장군은 칼을 뽑아들고 앞장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아침부터 저녁 때까지 세 차례의 격적 끝에 적은 마침내 참패하여 전사자의 시체를 네 곳에 모아서 불태우고 달아났다. 이것이 이른바 행주 대첩이다. 그해 六월 장군은 도원수에 임명되었고 정유재란에 울산 및 순천 전투에 참가하여 크게 활약하였다. 장군은 一五九九년 六十三세로 돌아가시니 나라에서 장군을 선무일등공신에 올려 영가부원군의 칭호와 의정부영의정의 관직과 충장공의 시호를 추증하였다. 一六0二년 장군의 부하들이 산성에 비를 세웠다. 최립의 글, 한호의 글씨에, 김상용이 머리글을 썼으며, 비 후면에 장군 사위인 이항복의 추기를 김현성의 글씨로 새기었다. 一八四二년 조인영의 건의로, 나라에서는 장군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한 사당인 기공사를 짓고 여기에 새로 비를 세웠는데 조인영의 글과 이유원의 글씨로 되었다. 一九七九년 十월 일 임창순 옮기고 김응현 쓰다. |
[일총통]
[신기전]
[행주대첩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왜군은 전쟁에 익숙한 자들로서 조총이라 하는 새 무기를 가졌으며 우리나라 군대는 二백 년 동안 평화스러운 생활을 하던 농민군으로서 무기다운 무기도 가지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싸움은 문제가 되지 아니하였다. 부산 동래 상주 충주가 연달아 함락되고 정부가 의주로 피난하였으며 전라도와 평안도의 일부를 제외한 전국 방방곡곡이 왜군에게 유린되었으니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적의 수군을 전멸시키고 육지에서는 권률 장군이 행주대첩을 얻어 차차 전세를 우리에게 유리하게 인도하였다. 권률 장군은 본래 문신이었으나 장수의 자질을 겸했기 때문에 一五九二년 四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선조의 특명으로 전라도 광주목사가 되었으며 七월에 왜군이 금산으로부터 전주로 쳐들어 올 때 이치(梨峙)에서 이것을 막아내어 적으로 하여금 전라도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八월엔 전라감사로 승진하였으며 九월에 근왕병 四천명을 거느리고 북으로 올라가 강화도에 진을 치고 있다가 十二월에 진지를 수원 독성으로 옮겨 때때로 왜병을 공격하면서 명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一五九三년 一월 八일에 명장 이여송이 四만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평양을 수복하였으나 二十七일 벽제관 싸움에서 패하여 개성으로 후퇴한 뒤 다시 전진하지 아니하므로 권률 장군은 명군과 연락하여 서울을 수복할 목적으로 二월 十一일에 조방장 조경, 승장 처영과 함께 정병 二천 三백 명을 거느리고 양천으로부터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으로 들어와 토성을 쌓고 목책을 치고 있었다. 이때 서울에는 평안도 황해도로부터 후퇴한 왜병 三만 명이 집결하고 있었는데 十二일 새벽에 왜병 우끼다 히데이에가 三만 대병을 총동원하여 행주산성을 포위하고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서로 교대하여 가면서 공격해왔으나 워낙 산성이 높고 가파르며 아군이 고지대에서 활과 총통을 쏘고 돌을 던졌기 때문에 쉽게 쳐 올라오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두울 무렵에 악착같이 달려들어 서북쪽 자성의 목책 한 칸을 파괴하고 쳐들어 왔으며 그곳을 지키던 승군이 조금 물러서려고 하므로 그 찰나 권률 장군이 칼을 들어 물러선 자 두어 사람을 죽이고 독전하여 마지아니하였다. 이에 전군이 죽음을 무릅쓰고 적과 싸워 마침내 이를 물리치고 다시 목책을 세웠다. 이 싸움은 二천 三백의 작은 군대로써 三만의 적을 격퇴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이 물러갈 때 시체 네 무더기를 불사르고 갔는데 아군이 적의 시체를 주운 것이 一백 三십이오, 기치와 창검을 얻은 것이 또한 많다 하니 실로 큰 전과이며 이 싸움으로 인하여 아군과 명군의 사기가 일어나 차차 적을 남으로 쫓고 정부가 환도하게 되었으니 그 의의는 실로 크다 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싸움을 임진왜란의 三대첩의 하나로 손꼽으며 권률 장군은 그 공으로 도원수가 되어 우리나라 육군을 총지휘하였고 전쟁이 끝난 뒤 선무一등 공신으로 책봉되었으며 장군이 돌아가신 뒤에 행주대첩비를 건립하고 산 밑에 기공사를 세워 장군의 영렬을 봉안하였으나 그 동안 모두 황폐하여 볼 모양이 없으므로 금번 박정희대통령의 분부를 받들어 문화공보부가 행주성지를 정화하고 권률 장군의 사당을 새로 지어 장군의 영정을 봉안하고 그 비각과 정자를 지어 장군과 부하장병 및 구국의 결전에 참여한 백성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널리 선양하여 우리와 우리 후손에게 나라를 스스로 지키는 자주의 정신을 길이 계승하고자 한다. 이 비는 一九六三년 八월 十五일 당시 재건국민운동경기도지부가 세웠던 것인데 비문에 훼손이 심하여 다시 새기어 세우는 것이다.
큰 글자는 박정희 대통령이 쓰고 비문은 신석호가 짓고 글씨는 서희환이 쓰다. 一九七○년 十一월 일 |
[방화대교]
[宿江浦遽廬(숙강포거려) / 강나루 주막에 묵으며]
남 효 온
紈袴飽肉者(환고포육자) / 비단옷 두르고 고기반찬 배부른 자
安知西山蕨(안지서산궐) / 수양산 고사리 맛 그 어찌 알겠는가
飛走不同穴(비주불동혈) / 날짐승과 길짐승은 보금자리 달리하듯
我獨恥干謁(아독치간알) / 나만은 벼슬 탐하는 것 부끄럽게 여기노라
畎畝尋要術(견무심요술) / 시골에 묻혀 밭고랑을 일구며
漁舟費日月(어주비일월) / 뱃전의 낚시질로 세월을 보낸다네
人生適意耳(인생적의이) / 한세상 사는 삶이 뜻대로면 그만이지
何用終歲矹(하용종세올) / 어찌하여 한평생을 아등바등 지낼 것가
[登幸州城隍堂(등행주성황당) / 행주 성황당에 올라]
남 효 온
城隍堂下落花明(성황당하락화명) / 성황당 아래 떨어진 꽃잎 선연한데
鴨島南頭潮水生(압도남두조수생) / 압도 남쪽 언저리엔 밀물이 밀려오네
繫馬叢林坐靑草(계마총림좌청초) / 수풀에 말 매고 푸른 풀 깔고 앉아
隔江聞唱午鷄聲(격강문창오계성) / 강 너머 들려오는 닭 울음 듣노라
白水蓮天動我前(백수련천동아전) / 하늘 잇닿은 행주강 흰 물결 내 앞에서 찰랑이고
漁舟來泊孔巖邊(어주래박공암변) / 고깃배 저어온 사공 공암가에 닻 내린다
山蔬白酒登臨處(산소백주등림처) / 풍광 좋은 곳에 올라 산나물로 막걸리 즐기니
病客明眸骨欲仙(병객명모골욕선) / 병든 이내몸 눈 밝아져 신선이나 되었으면
金性彦 한글 옮기고 呂運來 삼가 씀
[고양 오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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