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양산문(曦陽山門) 봉암사(鳳巖寺)의 빗장이 열리던 날(1)
- 봉암사 가는 길 -
나는 아마 저곳에 발을 들여 놓기가 어려울 것이다.
언제쯤이면 구름처럼 일어난 마음을 싸들고 저곳을 찾을 수 있을까.
한 번은 다녀오고 싶지만 가게될 우연의 기회가 주어질 것인가.
불교근처에서 어슬렁거리며 게으름을 피우는 사이비 불교신자인 내가 아주 가끔 봉암사를 떠올리며 가진
생각이다.
몇해 전 대야산 산행을 가는 길에 봉암사 초입을 지나치면서도 생각했고,함창~불정간 국도우회공사를 하면서
희양산 인근의 산수경개 좋은 곳을 찾아 다니며 신선놀음 흉내낼 때도 그랬다.
1년에 단 한 번 부처님 오신 날만 빗장을 풀어준다는 저 고집불통 늙은 절집과의 인연이 내게도 있을 것
인가라고...
그 우연의 인연이 마침내 내게도 닿았다.
5월초의 연휴 때 아내와 함께한 경북 영양으로의 문학기행(너무 거창한가?)덕분이었다.
노동절인 5월 1일,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의 음식디미방과 이문열 문학관,오일도 시인 생가,조지훈 문학관을
들린 후, 안동 하회마을 강건너 부용대의 옥연정사를 거쳐 저녁무렵 문경온천에 도착했다.
문경으로의 발걸음은 다음날 부처님 오신 날에 인근의 사찰에 들린 뒤 문경 찻사발축제를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온천일대의 객실은 거의 동이났다.
몇 곳을 기웃거린 끝에 하나 남은 큰 방을 가까스로 잡아 여장을 풀었다.
부처님 오신 날에는 문경온천에서 그다지 멀지않고 두어번 다녀온 적이 있는 김용사와 대승사,윤필암을
찾으리라 마음을 정하였다. 이 세 사찰은 서로 가까이 이웃한 터라 참배하기가 편리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녁식사 중 아내가 부처님 오신 날만 문을 연다며 봉암사이야기를 불쑥 끄집어낸다.
그 순간 무엇으로 머리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생각나고 사라지기를 몇 번, 비록 이제는 희미해지긴 했지만 봉암사는 여전히 내 뇌리에 남아 있었다.
그래! 내가 왜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새벽 5시 경에 밖을 보니 엊저녁 객실이 동이날 정도로 주차되어 있던 차량들이 상당수 빠져나가고 비어있다.
문경 찻사발축제가 유명하여 모두 그곳으로 갔으리란 추측을 하며 봉암사로 떠날 채비를 했다.
봉암사초입에 다다랐을 즈음인 오전 6시 경에 아내에게 물었다." 우리 너무 일찍 절에 가능거 아이가?"
명절 꼭두새벽에 남의 집 찾아가는 결례를 범하는 사람처럼 어딘가 선듯 내키지 않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될, 아니 하지 말았어야 할 걱정이었다.
새벽 산그늘을 드리운 채 주차된 차량들이 내 어리석음을 질타하며 끝간데 없이 줄지어 서 있었다.
지금부터 3km 정도를 걸어 올라가야 한다...
이른 아침 햇살에 모습을 드러낸 백두대간의 단전 희양산.
해발 998m인 희양산의 거대한 암봉은 속세의 때와 흙을 씼어내린 신령스러운 모습으로 하얀 봉우리를 보여주고
있다.
산문을 들어서는 초입에 옹기종기 몇 가구가 모여있는 마을(사하촌:寺下村)길가에는 부침개를
부쳐 팔기도 하고 예불복이며 잡화를 파는 상인들로 북적인다.
길따라 걸어놓은 색색의 연등은 초록의 나뭇잎과 어울려 더 선명하게 느껴지고 잘 다듬어진
흙길을 밟는 발 밑 감촉은 부드럽고 더 없이 편안하다.
이제 오전 6시 30분인데 벌써 내려오는 분들도 보인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산문을 여는 시간이 새벽 4시라고 한다.
마치 설산의 봉우리 같은 희양산의 영봉(靈峰)은 히말라야 설산을 다니며 혹독한 수행을 한
티벳의 성자 미라래빠가 그 설산을 가리켜 "지순하고 흠 없는 붓다의 가르침을 상징한다"고
했듯이, 수행도량 봉암사에 강하고 청정한 기운을 불어 넣어주고 부처가 가르친 절대 진리의
세계가 이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무한한 지혜의 초월심(超越心)은 하나의 힘이요,
지순한 본체는 또 하나의 힘이요,
분별 떠난 명상 수행 또한 그러하며
대광명(大光明)또한 또 다른 힘이네.
어떤 일 일어나든
어느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으로 바라볼지니
그 자체가 위대한 힘을 만들어내네.
흘러가는 모든 것, 충만한 모든 것, 돌아가 안기는 모든 것,
존재의 본질을 직시함은
한결같이 다함없는 힘을 주네.
모든 형상에서 자유로움은 하나의 힘이요,
스승의 가르침을 실행함은 또 하나의 힘이요,
죄업과 범행(犯行)없이 존재함도 또 다른 힘이네.
행하는 모든 것을 명상하는 마음으로 하면 그것이 곧 힘이요,
나타난 모든 현상을 친구 삼으면 위대한 힘이 솟아나나니
불굴의 끈기와 결심이 있으면 힘이 샘솟네.
이것이 나의 힘, 미라래빠의 힘이니
이로써 이단을 물리치네.
나는 이제부터 띠셰 설산의 주인이 되어 불법을 전하리라.
- 미라래빠의 십만송 중에서 -
봉암사(鳳巖寺)는 지금부터 약 1,100여 년 전인 신라 헌강왕 5년(서기 879년)에 지증국사
(智證國師)가 창건한 고찰로서, 당시 이곳은 신라 문화의 정수인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킨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으로 그 사격이 매우 당당하다.
특히 신라 제49대 헌강왕은 신라 말의 국운을 중흥하기 위해 중국의 신진 문물 제도를 받아들여
풍습을 쇄신하고, 불교의 진리로 백성의 정신을 고양하는 유신정치를 꾀하고 있었는데, 이런
헌강왕의 개혁의지에 이념을 제공한 것이 지증대사의 선사상(禪思想)이었다.
일주문
일주문은 다포양식의 맞배지붕에 희양산봉암사(曦陽山鳳巖寺)란 편액이 걸려있다.
기둥의 좌우에 주련은 걸려있지 않다.
일주문 후면의 봉황문 편액
봉암용곡(鳳巖龍谷)의 가람임을 표방하는 글이다. 글씨는 고려 공민왕의 친필이라고 한다.
헌강왕 당시 심충(沈忠)거사가 지증대사의 명성을 듣고 희양산 일대를 희사하여 수행도량으로 만들 것을 간청
하였다.
대사는 처음에 거절하다가 이곳을 둘러보고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싸였은즉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鳳巖龍谷) 같다.”며 경탄하고,
“이 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獲是地也 庸非天乎). 수행승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不爲靑衲之居 其作黃巾之窟)”라 하며 대중을 이끌고 와서 봉암사를 창건하게 되었
다. 이와 같이 봉암사는 창건 당시로부터 국찰의 면모를 갖춘 선사(禪寺)의 대가람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일주문 앞 암각문(岩刻文)
그 후 봉암사는 후삼국의 대립, 갈등으로 절이 전화를 입어 폐허화되고 극락전만 남았을 때인 태조 18년(935년)
정진 대사(靜眞大師)가 중창하여 많은 고승을 배출하였다. 정진대사의 중창불사로 인해 봉암사는 창건이래 최
대 규모의 대선찰(大禪刹)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불교중흥을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던 것이다.
이 때는 봉암사에 대웅전 광명보전 등 법당과 동상실 서상실 등 승당 및 누각 문과 행랑 그리고 동암 서암 등의
9개의 산내암자가 장엄하게 산문을 이루고 있었고. 3천여 대중이 머물러 동방장과 서방장으로 나누어 정진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후 고려 말에 태고보우 국사가 두 차례나 주지를 하면서 사격이 높아지게 되었다. 그 후 조선조 세종대왕 때
함허당 기화 스님이 절을 중수하였고,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의 병화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
1674년 다시 소실된절을 신화(信和)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703년 다시 중건하였으나 이후 크게 쇠퇴하였다.
구한 말인 1907년 의병전쟁 때에 다시 전화를 입어 극락전과 백련암만 남고 전소되었다. 1915년 윤세욱 스님이
요사와 영각, 창고 3동을 신축하였고, 1927년에는 지증대사의 비각과 익랑(翼廊)을 세웠다.
1980년대 중반부터 조실이신 전 조계종 종정 서암스님과 주지 동춘스님 등의 원력으로 남훈루와 선원을
시작으로 대웅보전 등의 중창불사에 힘을 기울여 현재의 도량으로 모습을 일신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봉암사는 우리나라 사찰 중 유일하게 일반인의 산문 출입이 금지된 사찰로서 유명하다.
이는 1982년 6월 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여 성역화 의지를 표명하였고,
1982년 7월 문경군에서는 사찰 경내지를 확정 고시하고, 희양산 봉암사 지역에 대해 특별 수도원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막아 동방제일 수행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1984년 6월 제13차 비상종단 상임위원회
에서 선풍 진작과 종단 발전을 위해 봉암사를 종립선원으로 결정하면서 부터이다.
어느 참배객의 몰입
봉암사가 희양산 일대의 사찰림을 국가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하고 사찰 경내지로
확정 고시된 것은 사회적으로도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자신의 사유지를 국가보호지구로 지정해달라고 건의한 사람과 단체는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종교계도 마찬가지다. 수백만 이상의 신도를 가진 여러 종교 중에서 종교재단의 토지나 사유지
를 공익적인 차원에서 헌납한 경우는 거의 없다.
현행법상 국가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되면 일체의 개발행위는 물론 실질적인 사유권
행사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희양산은 백두대간의 단전에 해당하는 높이 998미터의 거대한 바위산으로 서출동류(西出東流)하는 30리
계곡을 끼고 있어 천하 길지(吉地)로 이름 나 있다.
멀리서 보면 우뚝한 모습이 한 눈에 영봉(靈峰)임을 알 수있다.
보물 5점이 문화적 가치로 보존되고 있는데, 특히 극락전은 2층 목탑으로서 주목할만한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지증대사적조탑(보물 137호), 지증대사적조탑비(보물 138호, 최치원 지음), 정진대사원오탑(보물 171호),
정진대사원오탑비(보물 172호), 봉암사 삼층석탑(보물 169호) 등의 성보 문화재가 옛 선사의 향기를 은은하
게 전하고 있다.
침류교(枕流橋)
흐르는 물을 베개하여 정진하라...
이제, 이 다리를 건너면 속세에서 부처의 세계로 들어간다.
첫댓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세상너머님~~~^^*()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참배하던 날, 지레 주눅들어 사진담는데 보살님!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스님 한 분이 서 계셨습니다. 사진 찍어도 되는지요? 찍고 싶은대로 마음껏 찍으시라...고 저는 알아듣고 마음놓고 열심히 찍었는데 함께 갔던 보살님 한 분께서 찍지 말라고 하는데 왜 찍느냐고, 저를 나무라십니다.ㅎㅎ 봉암사에서는 조사스님들이 더 무섭습니다.^^ 공부 잘 합니다. ()()()
산문초입에 등산복차림과 전문 사진가의 출입은 금한다고 되어있었지요? 저는 전문사진가가 아니라서 마음 편하게 찍었습니다. 아마도 님께서 전문 사진가 수준이시라 보살님이 만류하신건 아닌지요.ㅎㅎ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귀한 영상 감사합니다. 모셔 갑니다 _()_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