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전 다움 바크님의 의견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관련 자료를 찾아내던중 꽤나 엄청난 사실을 알아냈내요.
디코에서도 한강대교폭파에 관해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더랬는데 당시 지휘체계도 개판이고 다리를 끊을 시점을 조언할만한 유능한 참모도 없는 시점에서 당시 공병감이 뭘 어쩔수 있었겠냐는 주장에 이어 그게 그나마 그냥 타이밍 대충재서 끊은거면 다행이고 채병덕이 그냥 나 지나가고 끊어라고 해서 그렇게 되부렸다고하던거에서 채병덕은 이미 전후에 그러한 점과 관련해서 조사를 받았고 당시 채병덕총감과 동승했던 분이 그런 말 없었다고 증언해서 끈난 문제라 하던중...
ㅋㅋ
드디어 진실이
애플만이나 페렌바하의 미군쪽 기록에는 국방차관 장경근이 폭파명령 내렸다고 한다내요. 다만 이들 기록의 신빙성은 반반. 근데 국방차관에 관한 증언이 우리측에도 있답니다. 당시 다리를 끊은 최공병총감의 사형과 관련해서는 참모총장을 전쟁중에 사형시키는 케이스는 없으니 그런거였을 수도 있고 윗선 정치인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는데 여기서 당시 국방장관과 차관은 정치인이므로 장경근이 확증범일 경우 후자가 되겠죠.
그런데 이 한강대교폭파와 관련해서 채병덕 장군의 경우는 당일일거수일투족이 후에 조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당시 채장군과 동행했었다는 육군대위였던 문모씨의 증언이 남아있죠. 그런데 이 장경근은 미국측에서 의혹을 제기한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어떠한 조사도 받지 않았습니다. 전 이게 더욱 심증범을 확증범으로 몰아갈 증거라 보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 확증범을 가려낼 방도가 없는 전후 무려 60년이나 지난 21세기죠.
그리고 국방차관위에 국방부장관, 국방부장관위는 누구인지 다들 아실 겁니다.
요약하면 한강대교폭파당일날 당시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장군또한 다리를 통해 강남으로 건너갔지만 당시 다리에 있던 공병총감이나 기타인원에 대해서 다리폭파에 따른 구체적 지시상황을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것은 후에 확실히 확인한 일입니다.
후에 당일날 국방부차관 장경근이 다리에 와서 나 지나가고 다리폭파해라고 했다는 하는 설이 미국측에서 매우 심각하게 제기되는데 불운하게도 이건 미국의 공식적 입장이 아니고 미육군부가 간행한 전쟁책자에 의해서입니다. 책을 낸건 분명히 미육군부입니다. 이 책을 쓴 애플만은 단순 편집자였죠. 그리고 우리측에도 장경근을 지목하는 사람이 있었음에도 묵살되고 후에 조사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장경근당시 국방차관이 진범이라는 전제하에 대통령이 자의적으로 한강대교폭파를 명령했을 가능성이 타진되죠. 그리고 이 경우 한강대교조기폭파는 매우 원시적인 현장지휘관의 대충계산 타이밍재기조차 하지 않고 폭발한게 됩니다. 이로서 아무리 전황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해도 일러도 너무 일렀던 대교폭파가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가 밝혀지죠.
참고로 당시 국군이 윗선에서 무너진 부대는 둘째치고 강북에서 전선붕괴를 막기위해
6월 26일
새벽 포천-의정부간 축석령 자일리 전투 2사단 5연대 2대대,1대대
오전 의정부 금오동전투 2사단 16연대 1대대,2대대
6월 26일
17:00 의정부 백석천 전투 2사단 25연대 2대대,3대대
6월 27일
오전 창동전투 3사단 22연대 2대대, 1,3,5,16연대 잔여병력
저녁 미아리전투 수습된 창동전투병력에 5사단 20연대 1대대, 15연대 2대대, 수도경비사 8연대가 증원
로 병력을 축차투입했고 이들부대관점에서 보면 강건너서 싸우러 가니까 다리 끊는 꼴이 되버렸고 실제 싸울수 있는 장비, 인원을 이들 부대에서 많이 잃었습니다. 생생한 부대를 날려버린거죠. 뭐 이만~
첫댓글 결과론만 보지 말고 이후에 벌어질 일들과 같이 연계해서 바라보시죠... 어차피 다리 안끊고 싸웠어도 투입된 부대는 붕괴될 것은 분명했습니다. 훈련이나 장비면에서 비교가 안되었으니까요.만약에, 저런이유로 주요다리 폭파를 미적거리다가 적이 돌파를 하게 되고, 수많은 피난민과 함께 대전으로 대구로 진격하였다면? 과연 그랬다면 어쨌을까요? 결과론으로는 그렇지만 과정으로 보면 덕분에 3일이라는 시간을 번 셈도 됩니다. 다리때문만이 아니라 잔존하는 국군소탕에도 전력을 분산했었으니.. 결국 미군이 오산에 진출하여 훨씬 더 북쪽에서 싸워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번 셈이죠. 반드시 지켰다? 전쟁에서 장담은 금물입니다
글쎄요 그건 로마님글에 제가 달아논 글에 대한 반박일테고, 이건 그날 결정이 미시적측면에서봐도 형편없는 과정으로 결정됬다는 건데요. 최선의 결정을 못내렸다면 당연히 욕먹어야죠. 어쨌든 최창식대령은 사형당했습니다. 이미 그때의 관점으로 봐도 불만이 있는 세력이 있었다는 얘기죠.
하지만 꼭 당시 한강다리를 미리 끊었어야만 되었다고 보여지진 않네요. 이유로 든 것들로 어짜피 가정이 아닌가요. 그럼 반대로 강북에 투입된 부대의 장비와 인원을 안전하게 돌렸더라면 한강방어선을 더 강력하게 구축하였을 테고, 낙동강까지 계속 지연전을 펴면서 내려갈 때도 보더 더 많은 시간을 벌었을 테니 말이죠.
전쟁시에 중요다리를 끊는 것은 군사적으로 당연한 얘기지만, 언제 어떻게 끊는냐는 또다른 문제니까요. 적이 코앞에 있다고 스스로 겁먹어 앞에서 힘들게 막고 있는 동료는 내 팽개치고 그들이 돌아올 다리를 끊는 게 군사적을 더 옳은 것인지, 그리고 이후에 벌어진 상황들을 봐도 다리를 그렇게 빨리 끊을 필요는 없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만...
음..그래도 언젠가는 폭파하여야 했겠죠. 역시 정도의 차이지만 피해는 발생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