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타작
전은실
잠이 오지 않는 가을날의 조금은 쓸쓸한 밤. 유독 유년의 많은 꿈들로 기억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지금 계절의 추수행사이다.
아부지와의 충실했던 교감이나 엄마의 낮게 깔린 자애로움이 백설기처럼 차곡차곡 하얗게 빚어낸 듯 아름다운 기억들이다.
씨앗을 뿌려 가꾸어야만 잔자식들의 학비를 준비하는 촌살림의 어려움을 갈무리하는 과정 중에서 가장 뿌듯한 시간이라고 두 분은 줄곧 말씀하셨고, 따라다니면서 방해는 되었을지언정 덩달아 흥에 겨웠던 그 시간들을 내 삶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로 찡하게 남겨진 지금.
그 중에서도 다른 곡식에 비해 까다로이 추수를 해야 하는 콩은 자칫하면 콩깍지가 너무 말라 콩이 튀어버리면 한해의 농삿일에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게 되기 때문인지 엄마 아부지께서는 유독 마음을 많이 쓰시면서 콩 추수를 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콩을 뿌리고 김을 매며 엄마 아부지께서는 한여름의 비지땀도 많이 흘리셨었다. 그러면서도 두 분은 오직 하나 어린 자식들 생각밖에 없으셨다.
아이를 낳아서 키워 보는 지금도 두 분의 마음 깊이를 가늠키가 무척이나 어려울 정도로… 절대적인 명분이었던 우리들을 위한 그런 희생을 목표로 한 한해의 마무리…
가을철 구름 한점 없이 아주 맑은 날, 콩을 꺾어 한 짐을 모아 미리 꼬아 놓은 새끼줄로 묶어 지게에 얹어 울 오빠랑 아부지랑 산 빈달에서 지고 내려 오셔서 마당에 부려 놓으시고는 다시 산으로 또 콩을 지러 가시고 나면 어린 우리는 엄마를 성가시게 따라 다니면서 새끼줄에 묶여 있던 콩단을 끙끙거리며 풀러 마당에다 가지런히 펴서 말려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콩타작을 할 때 덜 터트려지기 때문에 콩이 튀는 소리가 짝짝 날때까지 말려야 했다. 그러고도 며칠이 지나야 콩 타작을 할 수 있었다.
밭에 있는 콩들을 다 꺾고 볕을 쪼여서 타작을 해야만 남김 없이 콩깍지 안의 세상을 벗어나 사람 사는 세상으로 다시 태어나 유용한 쓰임새로 돌아서기 때문에 도리깨질을 하시는 아부지께서는 며칠을 도리깨를 매만지시는 모습을 보았었다.
길다란 도리깨를 어깨 뒤로 휘휘 돌려 바닥에 뉘어둔 콩대 위로 내리치면 옆에서 지켜보는 우리도 절로 신이 나서 힘드신 아부지 졸르면서 귀찮게 하다가 머리를 써서 물 한 대접 가득 담아 아부지 옆에 다가가서 내밀고선 겨우 받아쥔 도리깨, 가까스로 도리깨를 한번씩 받아 내려 쳐보다가 잘못해서 도리깨를 놓치면 옆에 계신 엄마나 아부지의 몸을 맞혀버리곤 하여서 일을 도와 드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일을 더 힘들게 했던 일, 그것보다도 콩 타작하는 날, 콩깍지가 다 깨어져 콩을 다 떨었을 때 멍석을 벗어나 멀리까지 날아가버린 콩들을 아무런 생각 없이 자금자금 발로 밟고 다니면 마당흙에 박힐까봐 우리에게 낮은 소리로 하시던 엄마의 경고는 가히 엽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야들아!! 콩 밟고 댕기다가 넘어지마 곰보된대이…”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콩처럼 콩콩 뛰어 다니면서 무던히도 신이 났었던 일.
큰 콩대는 손으로 주섬주섬 집어서 다시 새끼로 단을 묶어 쇠먹이로 마굿간 옆 처마 아래에 칡넝쿨을 길게 이은 끈으로 묶어 쌓아 두고, 잘잘하게 도리깨에 아작이 난 잔가지들은 까꾸리로 끌어서 푸대에 담아 쇠죽 끓일 때 함께 넣으려고 쌓아 두는 일까지 끝이 난다.
드디어 콩깍지나 콩대들보다도 더 많아진 콩을 푸대에 담아야 하는 일이 시작된다. 싸리비로 우리가 콩을 쓱쓱 쓸면 엄마는 키를 가지고 오셔서 잔 콩깍지들을 까불러 버리고 콩 자루에 담는데 아부지께서 자꾸만 자루를 쥐고 이리 저리 흔들어 꼭꼭 담으셨다.
콩이 가득가득 든 자루들은 쥐 안드는 대청 마루에 혹여 덜 말랐을지 몰라 주둥이를 열어 가져다 두고, 그 다음 일은 싸리비로 다 쓸리지 않은 콩을 줍는 일을 했는데 이리 저리 도리깨에 맞아 좁던 마당을 넓혀가며 튀어 달아난 콩과의 지겨운 전쟁은 아무리 줏어도 줏어도 끝이 나지 않은 일. 더군다나 내가 좀전까지 자금자금 밟고 댕기며 눌러 놓은 콩들은 마당 흙에 꽉 박히어 손가락으로 후벼파야만 줏어 담을 수 있었는데 좀 전에 덜 밟고 댕길껄… 후회 막급이었지만 이미 그 때는 늦은 일, 밟고 댕긴 내가 모두 줏어야 하는 일…
어둡사리가 내릴 때까지 오래도록 줏어서 조그만 자루에 담아 그건 내꺼라고 우기기도 했다.
콩씨를 뿌릴 때 도운 것도 아니고, 콩이 자랄 때 볕을 나누어 준 것도 아니고, 잡초가 자랄 때 밭매길 한 것도 더더욱 아니며 갖은 장난으로 콩 타작까지 방해하며 잔칫날처럼 쏘댕기고, 줏은 콩이 내꺼라고 한되박이 되는 자루를 움켜쥐고 잠에 들었는데(그거면 일만 하시는 울 엄마 좋아하시는 박하 사탕을 많이 살 수 있을거라는 마음에 움켜쥐어 봤던 일) 그리 오래 그 많던 콩자루는 우리와 함께 하지 못하였답니다.
내가 움켜쥐고 앉은뱅이 내 책상 바로 옆을 오랫동안 머물다가 그 콩들과의 이별엔 허전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아부지께서 흔들어 가며 담으신 콩자루는 넘어지지 않고 장터에 나갈 때까지 마루를 지켰고, 우리는 그 콩 자루에 올라 말타기도 하고 작은 키에 높아진 세상하며 보기만 하여도 풍성한 수확으로 남아 있었지만 든든함도 잠시, 대학이며 고등학교며, 남들이 말하듯 자손들이 많은 우리집의 분주한 살림살이는 콩 농사만으로는 등록금이 모자라서 약초를 건사하여 메우기도 하였지만 여느 약초의 손질 과정보다도 재미가 있었고 가을맛이 절절하던 추수의 시기…
그리고 콩이라면 산골 살림에서 먹거리로는 더 나은 것이 없었다. 맷돌에 불린 콩을 들들 갈아 두부도 해먹고, 기제사나 차례제사를 기준으로 웃목을 차지하며 자라던 콩나물은 겨우내 촌가의 아주 소중한 단백질 공급원이 되었다.
또한 구수한 된장도 만들어 먹고, 청국장도 만들고 등개장도 만들고… 엄마께서는 농한기에도 콩, 콩이야기에 콩요리에 바쁘셨다.
또한 콩을 볶아 콩가루를 만들어 쑥개떡도 인절미도 버물버물 해서 먹었으며, 밥도 비벼 먹고 날콩을 그대로 디딜방아에 찧어 고운 채에 쳐서 손칼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콩에 관한 요리법은 아무리 생각을 해도 참 다양하다. 지금은 우리가 엄두도 못낼 요리법이며 엄마께서는 여섯 딸들의 본보기가 되기 위하여 몸소 실천하며 가르쳐 주셨던 요리들, 그래서 요리라면 그리 낯설지 않아 가끔 시도를 해보는 자신감이 그때 그 시절에 생긴 것 같다.
이후, 콩은 후년의 농사의 씨앗으로 밀가루 포대 같은 종이 봉지에 담겨져 시렁에 달렸다. 말리기도 해야겠거니와 쥐들이 덤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시렁에 길게 매달아 두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편, 메주콩으로 빚어져 안방 천정 아래 시렁의 길다란 나무기둥에 남겨지고, 콩가루 국시에 넣어 먹을 콩가루로 빻아져 일년의 양식으로 남아지고선 콩은 한해의 생명을 마감한 것이다.
또 하나 더 없이 소중한 쓰임으로는 언니, 오빠들 학비에 보태어 쓸 소중한 자금이 되었고 우리가 일용할 양식들을 만들어준 것이다.
지금도 콩은 내 어릴적 그리움으로 남겨져 있어,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나는 내 아이들에게 난 가끔씩 콩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