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계절
아가 2:8-13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9월부터 창조절을 시작한다. 지금은 하늘의 기운이 변하는 시기이다. 포악한 무더위가 지나고 마침내 새로운 계절이 왔다. 요즘처럼 새로운 계절을 실감한 적이 있던가, 싶다.
색동교회 비전에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내일의 집’이 있다. 계절의 변화나 자연재해 혹은 생태계 파괴 이야기를 들으면 창조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9월은 아름다운 계절이지만, 그러나 종종 태풍의 위협도 찾아온다. 인생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종종 시련과 고난 덕분에 의미를 찾기도 한다. 시인 윤동주의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란 시가 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새로운 계절을 맞는 사람은 누구나 새 계절에 대한 기대와 다짐이 존재한다.
1)
아가서 본문은 계절의 변화를 소개한다. 바야흐로 새로운 계절을 알려주듯 잔잔한 미풍이 불어온다. 미풍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들의 꽃을 피우고, 나무의 푸른 열매를 맺게 하는 그런 부드러운 바람이다.
태풍이 한순간 거칠게 지나가는 것과 달리, 미풍은 두고두고 귓가에 속삭이며 마음을 흔들다. 그래서 하늬바람은 사랑의 사건을 일으키고 있다.
아가(雅歌)는 사랑의 노래이다. 두 젊은 연인의 사랑을 묘사한 시로 가득하다. 그 사랑은 봄을 스치는 바람과 함께 깊어 간다. 사랑은 얼마나 설레이는가. 두 젊은이가 사랑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흐믓하다.
초대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남녀 간 사랑의 관계로 이해하였다. 아가서는 하나님도 인간을 이렇게 사랑하신다고 노래한다. 하나님은 죄인인 나를 부르시고, 동행 길에 초대하신다. 지극한 사랑으로 회개와 새로운 삶을 재촉하신다.
본문을 오페라라고 한다면 본문의 앞부분(8-9)은 여자 목소리이고, 뒷부분(10-13)은 남자의 목소리로 들려주어야 한다. 여자는 멀리서 들려오는 남자의 인기척을 듣는다. 그 소리는 외침도, 함성도, 호소도 아니다. 다만 자연의 자취처럼 들린다.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8).
그리운 임은 너무나 기다렸기에 이젠 기척만으로도 알 수 있다. 내가 사랑하는 분은 나를 만나기 위해 마치 바람처럼 빠르게 들판을 달리고, 작은 산을 넘어 오고 있다. 마침내 기다림이 그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어느덧 내게 가까이 와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
“내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9).
초대교회 교부 암브로시우스는 시편 118편을 주석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 영혼의 자세를 이렇게 비유하였다. 그 모습은 ‘강가에 앉아 신랑을 기다리는 젊은 여인’과 같다. 뭔가 눈앞에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가?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이 가득한 존재이다.
2)
아가서는 내 삶의 현장에 찾아오신 하나님 사랑의 감미로움과 하나님을 사모하는 인간의 심경을 절절하게 나타낸다. 너무 그리워하기에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와 발걸음은 거리가 멀어도 충분히 구별할 수 있다. 나를 지켜보고 계신 주님은 나를 인도하시려고 어느새 내 곁에 계신다. 그리고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10, 13)라고 불러주시고, 손을 내밀어 ‘함께 가자’고 하신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10, 13).
그러나 인간의 불신과 두려움은 하나님과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때로는 미풍을 태풍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미 우리 곁에 계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데, 여전히 아득한 거리감을 느끼면서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포스코사의 광고가 흥미롭다. 주제가 ‘우리 사이 거리’인데, 어색하고 불편한 인간관계의 간격을 거리로 비유한다. ‘사장님과의 거리 42.195Km, 친구와의 거리 110m, 아빠와의 거리 400m, 팀원과의 거리 1000m, 선임과의 거리 2Km, 그러나 함께 응원하면 우리 사이 가까워진다.’
엊그제 만나 어느 원로 목사님이 자기 딸 이야기를 하였다. 딸이 셋인데 모두 까칠하다고 불평한다. 모두 50대라는데, 아버지에게 점점 간섭이 늘어서 잔소리처럼 들린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딸들과 친밀감을 느끼는데, 딸들은 아버지를 그저 보호 대상으로, 피감독자로만 본다는 것이다.
집집마다 관계의 문제가 있다. 좋은 관계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관계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밤낮 노력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함께 하는 것이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즐겁게 놀고, 함께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공동의 위기를 극복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 기도할 때 거리감을 극복할 수 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의 거리는 얼마인가? 자녀와 아빠 혹은 자녀와 엄마 사이 거리는 밀접한가, 혹은 소원한가? 그 단위가 밀리미터 혹은 센티미터인가, 아니면 킬로미터나 혹은 평행선은 아닌가?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인 나는 예수님과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보여 준다.
내가 죄 때문에 하나님과 멀리 거리를 둘 때 그 거리는 ‘하늘과 땅 차이’(사 55:9)였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광야 길을 따를 때에 언약궤와 백성 사이의 거리는 ‘사흘 길’이었다(민 10:33). 그런데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시기 전 감람산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과 거리는 ‘돌 던질 만큼 거리’(눅 22:41)였다. 그런데 기도하기 시작하면 즉시 내 곁에서 함께 하신다(롬 8:26).
그 거리는 물리적으로는 멀게 느껴지지만, 언제나 가까이 계신 이유는 나를 사랑하셔서 측은히 여겨 달려 나오시는 그 은혜 때문이다(눅 15:20).
사랑은 거리를 좁히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이 나를 찾아와 주셨다. 사랑하는 임처럼 산을 넘어 들판을 지나 빠른 바람처럼 내 삶의 터전으로 방문하신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나를 간절히 부르시고, 나를 기뻐하신다. 주님은 언제나 나를 반기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집단 명사가 아니라, 어떤 그룹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이미 나와 함께 하시는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 심리적인 거리를 좁히기 위해 노력하라.
3)
사랑은 언제나 새로운 계절이다. 사랑하면 예뻐진다고 하지 않던가? 바야흐로 새로운 계절이 찾아왔다. 팔레스타인의 겨울은 우기이다. 이제 봄이 와서 비가 멈추면 집 안에 머물러 지내던 사람들이 이젠 들로 나갈 수 있다.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11-12).
이젠 무대의 장면이 달라져 남자의 목소리로 듣는다. 계절이 바뀌어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멧비둘기가 소리가 들려오는 사랑의 때가 무르익었다. 사랑을 나누기에 적절한 때가 왔으니, 이제 웅크리던 집에서 나와 들로 나가서 사랑을 나누자고 한다.
사랑도 때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때가 무르익지 않았는데 사랑을 강요하는 것은 싹도 움트지 않은 나무에서 억지로 꽃을 피우려는 일이다.
하나님은 내 인생에서 새로운 계절을 만들어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초월적 존재로서 우리가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분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친밀한 연인처럼 내게 가까이 다가오신다. 봄철의 따사로움처럼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신다.
사실 인생의 봄을 충분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내가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논리적으로 잘 설명하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신앙은 지식이 아니다. 사실을 아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변화다.
신앙은 사랑으로 표현되는 변화된 삶이다. 복음은 그것을 믿는 사람의 삶과 만나 가슴을 울릴 때, 삶을 바꿀 때 기쁜 소식이 된다.
저마다 우리 인생에도 새로운 계절이 온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의 삶은 새로운 절기를 맞는다.
중국교회는 아가서의 이 말씀을 가리켜 오랫동안 자신들을 박해하던 현실이 이제 지나고 드디어 새로운 봄이 올 것임을 기대한다. 이제 새로운 세상이 찾아왔다고 노래한다.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13).
내게 찾아온 사랑은 나에게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말한다. 동행한다는 것은 자기가 살아오던 자리에서 떠나, 함께 가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 삶이 중심이었는데, 이젠 삶의 중심이 바뀌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 중심’의 사랑을 벗어나는 것이다.
사랑을 하면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의 중심이 된다.
사랑을 믿고 떠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어나 함께 가는 일은 신뢰가 없다면 위험한 일이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무모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 그 사랑 때문에 일어나서 떠날 수 있다. 십자가와 부활신앙을 지녔다면 그러한 모험도 감수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이 빵을 사고 싶을 때 동전을 지불한다. 가구를 사고 싶을 때 은전을 지불한다. 그리고 토지를 사고 싶을 때는 금전을 지불한다. 그러나 사랑을 사고 싶을 때 당신은 당신 자신을 지불해야 한다. 사랑의 값은 당신 자신 뿐이다.”
어느새 새로운 계절이 왔다. 자기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인생의 새로운 계절을 의식하며 산다. 좋은 그리스도인은 절기가 바뀔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돌아보고, 은총을 소망한다.
이제 삶의 기지개를 켜고, 마음의 문을 나서보라. 지금 내가 누구랑 동행하느냐에 따라, 나는 그 길을 간다. 나는 지금 누구랑 같이 다니는가?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의식하며 살아가는가?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10, 13).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관계를 돌보시기를, 그리하여 새로운 계절에 주님과 동행하며 사랑의 열매, 감사의 열매를 두루 맺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