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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카페 게시글
시 해석 및 시 맛있게 읽기 스크랩 교가를 부르다/ 맹문재
은하수 추천 0 조회 15 15.06.12 16:1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교가를 부르다/ 맹문재

 

교문 사이로 보이는 교정의 나무들은 낯설도록 키가 컸지만

교실은 왜소했고

용접을 하고 주조를 하던 실습관은 헛간처럼 허름했다

 

정문처럼 서 있는 수위아저씨에게 다가가

몇 해 졸업생이라고 인사를 드렸는데

시를 가르쳐준 국어 선생님이 아닌가

 

나는 너무 놀라 다시 인사를 드렸는데

알아보지 못하는지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로 대하셨다

학교와 미리 얘기가 됐냐고 물으셨고

방문하려면 소지품 검사를 받아야 된다고 했다

나는 의아해 하며 가방을 넘겼는데

선생님은 이리저리 뒤지다가 책을 한 권 꺼낸 뒤

이런 불순한 것은 가지고 들어갈 수 없으니

압수한다고 했다

 

군대나 교도소도 아닌데 이래도 되느냐고

나는 말을 더듬으며 항의했다

"전태일평전"을 읽는 제자를 대견하게 여기기는커녕

어째 탄압하느냐고

시를 가르친 스승으로서 너무하지 않느냐고 따졌다

 

그래? 그럼 교가를 불러봐!

 

나의 막말을 다 들은 선생님은 또 다른 요구를 꺼냈다

순간, 아랫목같은 손길이 전해왔다

 

나는 왕주먹 같은 공고생이 되어 스무 몇 해 만에

교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 시집『사과를 내밀다』(실천문학사, 2012)

................................................................

 

 처음엔 모교 선생님의 태도에 하도 기가 막혀 실제로 있었던 에피소드일까 의아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상황 진술도 그렇거니와 맹문재 시인이 평소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사실적인 시를 즐겨 써왔다는 점을 떠올리면 허구가 아님이 확실해 보인다. 시를 읽으며 우리 사회는 자신의 몸을 태워 세상을 밝힌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45년간 한결같이 기려온 사람들과 아름답기는커녕 위험하고 불순한 계급투쟁의 산물쯤으로 폄훼하는 사람들로 크게 나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사이엔 깊은 간극이 있어 진보와 보수의 진정한 의미가 왜곡된 채 ‘좌빨’과 ‘수구꼴통’으로 일반에게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보수의 가장 큰 가치는 헌법정신의 수호일 것이다. 헌법은 인간의 존엄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행복추구권을 존중하고 있다. 근로기준법도 그 헌법정신에 근거하여 제정된 법률이다. 최저임금이니 근로시간이니 하는 개념조차 없이 노동자를 노예처럼 혹사시켰던 시절,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 보장하라”를 외치며 차가운 시장바닥에서 쓰러져 죽은 청년을 누가 먼저 애도하고 보듬어야할까. 진정한 보수라면 국민의 기본권 보호 장치인 헌법에 대한 수호의지가 누구보다 확고해야 한다. 그리고 보수는 그 사회에서 지켜나가야 할 주류적인 가치를 역사적 경험에서 찾아야 마땅하다.

 

 역사에서 불의에 항거했던 숱한 민중운동과 전태일 열사의 분신 등은 반드시 헌법정신 속에서 녹여 지켜나가야 할 사건들이다. 당시 전태일의 죽음이 알려지자 각계의 충격과 파장은 엄청났다. 기독교계에서도 개신교와 천주교의 공동 집전으로 추모 예배를 거행하였는데, 김재준 목사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전태일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게 아닙니다. 한국 기독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 모였습니다.”라고 한 대목은 오늘날 우리 모두 다시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다. 이는 그동안 이기적인 기복신앙에 갇혀 사회의 부조리에 침묵했던 기독교인의 비겁에 대한 통렬한 자기비판이고 반성이었다.

 

 전태일의 분신은 한국 노동운동사의 새로운 전기를 연 계기가 되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박정희 정권의 집권 10년째, 무리한 경제개발 과정에서 축적된 여러 모순들이 폭발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성장 드라이브 과정에서 소외된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들의 생존권을 위한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맹문재 시인은 그러한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훗날 공고를 나와 노동자의 삶을 산 이력을 갖고 있다. “전태일 평전”을 끼고 다닌 시인에게 전태일의 삶은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치게 한 계기가 되었으리라. 더불어 시인이 지향하는 문학의 방향성까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내일 맹문재 시인이 “전태일의 고향과 문학”이란 주제의 강연에 출연하기 위해 대구로 내려온다고 들었다. 전태일 열사의 친동생인 전태삼 씨와의 대담 형식으로 진행될 강연에 대담 진행자 자격인 것 같다. 전태일의 고향이 대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나 1954년 가족이 모두 서울로 이주해 서울에서 국민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1963년 15세 때 다시 대구로 내려와 보낸 1년간은 훗날 전태일이 생애 유일하게 행복한 시절로 기억했다. 당시 중구 남산동 명덕국민학교 내의 야간학교 청옥고등공민학교에서 공부를 했고 같은 반 여학생한테 설렘을 느꼈던 시기였다.

 

 한국 노동운동의 대부 전태일의 고향임에도 그의 생가에는 표지판 하나 없고 그를 기리는 어떤 사업도 이곳에서는 싹을 틔우지 못하고 있다. 까놓고 말하면 대구는 전태일 정신과는 가장 먼 거리에 있다. 갓난아기 때 잠시 기거했던 사실을 빌미로 방천시장에 김광석 거리가 조성되어 외형적인 성공을 거둔 김광석과는 달리 전태일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자긍심으로 보듬어 간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를 반체제적인 급진인물로만 왜곡해 인식되고 있는 현실에서 이번 강연이 인간 전태일의 참 모습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길 기대한다. 그래서 대구가 전태일과 조금이나마 가까워져서 뒷걸음치는 역사를 돌이킬 동력의 원천이 되길 희망한다. 교가가 아니라 전태일을 마음껏 구가했으면 좋겠다.

 

 

권순진

 

- “전태일의 고향과 문학” 강연 안내 -

 

때 : 2015년 6월 5일(금) 오후 7시

곳 : 광개토병원 6층 강당 (대구시 서구 내당동)

문의 : 한국문화분권연구소 김용락(시인). 010-2526-5693.

* 다음날인 6월 6일(토)에는 전태일 열사 생가답사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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